문학과 진보
오래 침묵하고 있는 시간의 한파가 길어지자
바람이 대신 나뭇가지를 붙잡고 울었다
─ 도종환 「바람 소리」에서
1, ‘민족’ 없는 민족 문학
민족문학작가회의약칭 민작가 긴 토론 끝에 ‘민족문학’ 대신 ‘한국’을 택해 2007년 12월 한국작가회의로 재출범했다.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 단체를 대표했던 민작이 ‘한국’을 내세운 것은 사건이다. 분단체제의 극복과 통일한반도의 창출이 ‘민족’에 집약되었던 것을 상기할 때, 반국주의半國主義로 비칠 오해를 무릅쓰고 ‘한국’을 선택한 민작의 속셈이 가쁘다. ‘민족’이 짊어진 이념적 과부하 상태를 ‘한국’이 일정하게 해독解毒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진전이지만, 그럼에도 한반도의 남쪽에 살고 있다는 실존적 조건에 대한 자의식이 이전보다 강하게 전제됨은 부정할 수 없겠다.
남과 북이 어떻게 만나야 할지를 새로이 고민해야 할 때다. 경우들을 상정해보자. 첫째, 한국이 북한을 만나다. 대한민국을 남한 또는 한국으로 약칭할 때, 이는 반도의 북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대한민국 또는 한국의 미수복지구로 상정하는 것이기에 남쪽 중심이다. 둘째, 조선이 남조선을 만나다. 이는 반도의 남쪽, 한국을 조선이 해방시킬 피점령지구로 상정하는 것이기에 북쪽 중심이다. 셋째, 남측과 북측, 또는 북측과 남측이 만나다. 기왕의 남북접촉에서 사용되었던 이 용어들은 ‘남북한’ 또는 ‘남북조선’과 달리 상대를 일정하게 인정한다는 점에서 진전은 진전이다. 그럼에도 실용적 차원에서 타협한 궁여지책에 가까워 성숙한 상호주의의 징표로 보기는 어렵다. 최근 올림픽 출전을 가리는 남북 축구경기가 북이 태극기가 평양에 게양되는 것을 저어해 제3국 중국에서 열린 것은 그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기왕에 이룩한 남측/북측의 만남을 토대로 새로이 모색될 제3의 방식은 무엇인가? 한국과 조선 또는 조선과 한국이 만나다. 반도의 남과 북에 현실로서 엄연히 존재하는 두 나라, 두 국민을 다른 이름으로 숨기지 말고 그 이름대로 부르는 훈련이야말로 진정한 시작이다. 그 이름을 기피하는 것은 우리가 그토록 비판하는 일종의 중세적 명분론에 준하는 행태이거니와, 그나마 7·4남북공동성명, 남북유엔동시가입 그리고 6·15선언에서 이미 형해만 남은 형편이 아닌가? 남과 북은 ‘둘이면서 하나’이자 ‘하나이면서 둘’이다. ‘둘이면서 하나’라는 점을 잊지 않되 이제는 ‘하나이면서 둘’임을 더욱 의식할 때다. 후자에 방점을 찍는 비판적 상호주의가 착실히 자리 잡을 때 오히려 남북연합으로 가는 길의 입구에 생각보다 빨리 당도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국’도 그렇지만 ‘민족문학’의 깃발을 내린 것이야말로 사건이다. ‘민족문학’ 대신 가치중립적인 ‘한국문학’이 아니라 실용적 차원에서 ‘한국’을 택한 충정은 십분 헤아려야 마땅하지만, 변혁적 민족문학 이념의 결여에 어떻게 대응할지 진지한 토론이 요구된다. ‘민족문학’은 우리 진보운동의 역사적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열쇠 중의 열쇠다. 돌이켜보건대 민족문학은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약칭 조공의 테제에 처음 등장했다. 해방조선의 현실을 토지혁명에 기초한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핵심적 과제로 삼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단계로 규정한 조공은 식민지시대 계급문학론의 교조주의를 자기비판하면서 그 대안적 짝으로 민족문학론을 제출하였다. 냉전체제의 진군과 6·25전쟁1950~53이라는 열전의 폭발과 분단체제의 성립이라는 연쇄 속에서 이 사업이 두 나라, 두 국민, 두 국민문학으로 현실화함으로써 미완으로 귀결된 사정은 주지하는바, 1970년대 이후 4월혁명1960을 상상력의 모태로 남한에서 부활한 민족문학은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지향하는 점에서 해방 직후의 민족문학과 연속적이다. 그럼에도 자본주의는 물론이고 레닌주의와 그 아시아적 변종들에 대해서도 비판적이기 때문에 비연속적이기도 하거니와, 민족문학은 그후 반도의 현실적 조건과 조응하는 안팎의 논쟁을 통해서 혁명 또는 통일이 상정하는 정통적 의미를 수정하는 진화과정을 통과했음에도 변혁적 계기를 놓치지 않았다. 한국작가회의는 그 오랜 이름 민족문학을 바야흐로 방妨했다. 그것이 변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계기는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까? 상황의 변화를 냉철히 짚는 작업 속에서 진보의 내용과 형식을 탈구축/재구축하는 지적 모험을 사양할 수 없는 지경에 직면한 것이다.
(중략)
보유
이 글을 발표한 직후2008년 7월 2일 나는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소장 김동철 교수의 초청으로 부산에 갔다. 주최 측에서 준 강연의 제목은 ‘로컬·문화·로컬리티’다. 이날 토론이 흥미로웠는데, 특히 ‘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국지적으로 실천한다’는 금언에 대한 지적이 날카롭다. 요진즉, 프랭크 페더Frank Feather가 만들어 유포시킨 이 말이 초국적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글로벌 마케팅의 논리인 듯한데, 어찌 생각하느냐는 거다. 나는 이 금언이 서구의 진보파들 사이에서 1989년 이후 널리 사용되어왔다고 귀동냥한 터라, 아마도 시장담론이 진보파로 이전되었다기보다는 그 역코스일 거라고 막연히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인천으로 돌아온 후 나는 그 추측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였다. 이 금언의 발신자는 비확정적이다. ‘지구의 친구들’FOE, Friends of the Earth, 1969 창립의 설립자 데이비드 브라워David Brower가 최초의 저작권자라고 하는가 하면, 1972년 ‘유엔인간환경회의’의 고문 르네 뒤보스Rene Dubos라고 수정하는 설도 있고, 프랑스 신학자 자끄 엘륄Jacques Ellul이라는 등, 분분하다. 그런데 주로 환경운동 쪽에서 기원한 이 금언을 쏘니를 비롯한 다국적기업들이 1980년대 이후 사용하게 되었다는데, 그 징검다리 역할을 논 것이 프랭크 페더인 모양이다. 그는 1979년 이 금언을 제목으로 삼은 회의를 조직했다는 것이다.이상 Wikipedia 참조운동에서 기원했지만 다국적기업도 공유한다는 사실은 ‘나라’를 건너뛰는 것을 특징으로 삼는 이 말의 유연성을 잘 보여준다. 다국적기업이 이 말을 사용한다고 해서 꼭 편견을 가질 필요야 없지만, 세계와 지방을 그대로 연결함으로써 양자를 매개하는 나라를 마치 간이역처럼 통과해버리는 이 금언의 논리는 확실히 문제적이다. 국민국가라는 완강한 모형을 흔드는 작업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나라는 이처럼 그냥 스쳐도 되는 물건이 아니다. 나라를 제대로 넘어서기 위해서도 나라에 대한 더 곡진한 사유가 요구되거니와, 그렇다고 매양 나라라는 매듭만 매만져서는 백년하청百年河淸이다. 좀 무리가 있더라도 나라를 넘을 거점으로 국지 또는 지방을 더욱 강조할 필요는 여전하다고 하겠다. 하여튼 나라라는 매듭에 대한 균형적 사유 속에서 이 금언을 신중히 사용해야 한다는 깨달음이 종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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