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오늘, 다시 꺼내보아야 할 이유 있는 판결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서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법 없이도 살 사람’은 줄어들고, “사회가 있는 곳에 법이 있다”라는 말은 현실로 다가온다. 일주일에 한두 번 열리는 ‘장날판사들은 재판기일을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에 수십 건을 심리하면서 정의를 밝혀달라는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온몸으로 느낀다. 그런데 현실은 이런 재판에 대해 ‘유전 무죄, 무전 유죄’라든지 ‘전관예우’라고 뭉뚱그려 비난하지만,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비판하고 평가하는 일은 드물다. 판사는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라는 말을 방패 삼아 속마음을 감추었고, 법조인은 문서를 작성하고 판례를 평석하는 데 그쳤으며, 인문학자와 사회과학자는 법 제도와 판례를 도외시했다. 송사가 있는 사람은 ‘재판부와 연고 있는’ 변호사를 찾으면서 패소하는 경우 잘못된 법이나 판사의 불공정을 탓하고, 심지어 정치권이나 언론에서는 결과가 자기들이 추구하는 이념이나 정책에 들어맞는지에 따라 재판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기도 한다. ‘내로 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에 빗대어, 재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법감정을 ‘유법 불정우리 편에 유리하면 법에 따른 재판, 우리 편에 불리하면 정치적이거나 정실에 따른 재판’이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30여 년간 재판만 해온 사람으로서 시민들과 사법부의 거리를 좁히고, 건강한 논쟁 속에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으면 했다. 현재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군 재판들을 다루는 것도 좋겠지만, 현 사법부에 몸을 담고 있기 때문에 우선 고전처럼 오랫동안 인류에게 곱씹어볼 가치를 남긴 역사적 재판들을 다루면서 우리 현실을 투영해보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숨 가쁘게 흘러가는 재판 현장에서 한 걸음 떨어져 생각할 때마다 역사책을 읽으며 성찰의 시간을 가진 것도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이런 유의 책이 한두 권 출간되거나 외서가 번역되었다. 여러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고르고 서술하는 데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흥미 위주로 쓴 것이 많고, 우리 사회와 관련지어 평가한 것은 미흡한 편이다. 사법과 재판에 대해서도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세기적 재판을 골라 재판 과정을 생생하고 재미있게 소개하면서, 사건이 일어난 사회적 배경과 판결이 사회에 미친 울림을 큰 눈으로 살펴보았다. ‘지금 여기’ 우리가 곱씹을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고 가다듬어 쓰고자 했다.
이 책에서는 고대 아테네부터 현대 미국까지 사회적 상황과 갈등이 잘 드러나는 재판 사건을 선정했다. 선정된 재판에는 정치적카틸리나 재판, 찰스 1세 재판, 마버리 재판, 경제적로크너 재판, 사회적소크라테스 재판, 드레퓌스 재판, 아이히만 재판, 미란다 재판, 문화적드레드 스콧 재판, 브라운 재판, 종교적토마스 모어 재판, 갈릴레오 갈릴레이 재판, 세일럼의 마녀 재판, 젠더적마르탱 게르 재판, 팽크허스트 재판 갈등과 분쟁이 두루 포함되어 있다. 이 재판들에서 사회적 대립과 갈등이 집약적으로 드러나거나 폭발했고, 재판 후에 논쟁과 평가를 거쳐 해결되었거나 새로운 방안을 찾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사에 길이 남을 정의로운 재판뿐 아니라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억울하게 재판받은 사람도 소개하고자 했다. 역사적 오판을 살펴보면서 고인을 기리고, 그 원인을 되새겨보는 기회가 되었다. 역사적인 평가와 더불어 재판에서 지켜지지 않았거나 새로 정립된 법과 재판의 원리와 원칙은 무엇인지 나름대로 살펴보았다. 특히 이 책에서는 상반되는 평가를 모두 언급하면서 저자의 견해를 밝히고, 사실과 평가를 나누어 적었다. 한마디로 이 책이 뽑은 재판의 주제는 ‘법치주의는 무엇이고, 자유와 인권과 민주주의는 어떻게 퍼져나갈 수 있었는가’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세계사에서 유명한 재판에 대한 이야기지만, 저자나 독자의 눈과 관심은 우리 현실에 있을 것이다. 타산지석, 반면교사라는 말이 있듯이, 다른 나라 재판을 거울삼아 우리를 되돌아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권력자를 처단하는 〈찰스 1세 재판〉을 쓰면서 당시 상황이 최근 우리 사회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노동자의 최대 노동시간을 법으로 규제하는 문제를 다룬 〈로크너 재판〉을 보면 이미 100여 년 전에 벌어진 노동문제에 관한 논쟁의 뿌리와 깊이를 느낄 수 있다. 당대에는 노동자의 최대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것이 위헌이었지만, 위대한 소수 의견 덕에 한 시대를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다. 〈미란다 재판〉과 〈드레퓌스 재판〉에서는 형사재판을 바라보는 입장의 차이와 과거사 사건에 대한 재심의 어려움을 실감할 것이다. 이런 재판들이 비록 현실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지는 않으나, 생각의 실마리로 삼기에는 충분하다고 본다.
이 책은 우리 법원과 재판을 걱정하거나 비판하는 시민과 법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을 위해 썼다. 법학 입문서인 《민법 총칙》을 처음 읽을 때 마치 외계인이 쓴 이상한 책 같아 적성에 맞지 않다고 낙담했는데, 법조인들은 올챙이 때 추억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젊었을 때는 ‘법 만능주의’를 부르짖다가 나이가 들면서 ‘법 허무주의’에 빠져 철학이나 종교에 심취하는 법조인도 종종 만난다. 법은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일 뿐이고 법학이 ‘자기 인격 수양을 위한 학문爲己之學’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으면서, 평소에 인문학과 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나치게 많은 사건을 심리하느라 여유가 별로 없지만, 동료 판사들에게 재판과 사회의 ‘공명共鳴’을 성찰하면서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을 헤아리고, 사회와 역사에 대한 엄중함을 되새겨야 한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제까지 거창하게 말했지만, 그냥 옛이야기로 읽어도 좋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얽히고설킨 사연과 욕망과 어리석음을 보면서 사람의 본성과 살아가는 모습은 변한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진지하게 역사의 진보를 찾으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법과 재판의 모습은 양면적이고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고백하건대 이 책은 여러모로 부족하다. 그 나라의 원사료와 연구 결과를 읽은 것이 아니고, 역사학계를 비롯한 학자들의 글과 ‘선행 서적’을 읽은 후 비교 검토하고 정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적이고 심층적인 연구가 없는, 판사의 인상비평印象批評에 불과하다거나, 당시 법의 내용과 법리에 대한 설명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여길 수 있다. 또한 재판 이야기가 너무 자세하다고 불평할 수도 있고, 시대 상황에 대한 설명이 간략하다거나 오히려 불필요하다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 맞는 이야기다. 법철학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소크라테스 재판’만 제대로 다루어도 이 책 분량의 지면이 필요하다.
‘갈라파고스 군도’처럼 재판과 사법이 우리 사회와 동떨어져 있는 지금, 우리나라 판사의 시각에서 세계사적 재판을 알리는 것이 절실하다고 판단했다. 법원이 존립하는 기반은 권력이나 권위가 아니라 국민의 신뢰이기 때문이다. 우리 법원과 재판에 대한 신뢰가 그 어느 때보다도 떨어진 지금, 세계사적 재판을 함께 읽으며 소통하기 위해 수줍은 판사가 어렵게 용기를 내게 되었다. 모쪼록 재판과 사법에 관한 이야기가 법정 밖으로 나가 ‘세상 속으로’ 널리 퍼지기를 바란다.
글을 마치면서 개인적인 소회를 밝히고자 한다. 어렸을 때 꿈인 역사가가 되지 못하고 ‘자의 반 타의 반’ 판사로 살아왔는데, 역사서로 쌓은 만리장성에 이상하고 색다른 돌멩이 하나를 올려놓았다고 생각해본다. 글이 앞으로 나가지 않을 때마다 ‘두물머리 길’을 걸으면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계절의 무상한 변화를 느꼈는데, 소중한 추억으로 오래 남을 것 같다. 이 책을 써보라고 권유했으며 힘들어하는 저자에게 따뜻한 격려와 엄정한 평가를 아끼지 않은 이호근 교수님의 우정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 ‘근대를 읽는 역사 스토리텔러’라 불리는 주경철 교수님은 바쁜 시간을 내어 제자들과 함께 이 책에 대해 시각은 적절한지 사실史實은 정확한지 검토해주셨다. 머리 숙여 깊이 감사드린다. 물론 이 책에서 발견되는 모든 잘못은 전적으로 저자의 책임이다. 법학적 측면에서 초고의 부족한 부분을 지적해주신 윤성근 판사님과 전상현 교수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마지막으로 초보 저자의 거친 원고를 다듬어 멋스럽게 책을 만들어낸 휴머니스트 편집부에 고마움을
전한다.
2018년 7월
박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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