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에서 봄까지
내 어깨에 기대어 오분이나 잤는지 너는, 물빛 선연한 꿈을 꿨다는데 거짓말처럼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내 어깨에 기대어 한숨 자고 난 너는, 몇년간이나 파도처럼 밀려왔던 차가운 꿈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잠든 새 기대어 있던 한쪽 귀로 꿈이 다 흘러나온 것
틀어놓은 수도꼭지 같은 귀에서 콸콸 다 쏟아진 것 아니겠냐고 했다.
그때 네가 쏟은 꿈이 내 어깨에는 여전히 물 얼룩처럼 묻어 있다.
저녁에 나가보니 문 앞에 고양이가 쓰러져 있었다.
급작스레 고양이의 장례를 치르고, 곧 꺼질 걸 뻔히 알면서도 문 앞에다 양초 한자루를 밝혀두었다.
달빛이 촛불 주위를 부나비처럼 맴도는 걸
달빛이 눈발처럼 촛불에 달라붙어 타 죽는 걸 보고 들어왔다.
새벽에 나가보니 간밤에 네가 일으켜 세워놨는지, 촛불이 있던 자리에 눈사람이 서 있었다.
마지막 하나 남은 턱걸이를 하듯,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던 겨울의 맨 끝이었다.
내 어깨에 꽃그늘처럼 기대어 잠들기 전 너는, 여생의 봄을 꿈속으로 미리 다 흘려보냈으니, 앞으로는 곧바로 장미가 피고 여름이 올 거라고 했다.
봄에 죽은 친구가 이제 별 얘기를 다 한다고 생각하며 어깨 위를 돌아봤다.
예상치 못한 계절이 정말 오고 있었다.
가슴에서 사슴까지
어느날 내 가슴이 불타면 어쩌나.
내 사슴은 어쩌나.
깡마른 사슴. 비 맞는 사슴. 눈물 맺힌 사슴. 다리 부러진 사슴. 멍투성이 사슴. 땅에 파묻힌 사슴. 아빠 없는 사슴. 엄마 없는 사슴.
폐에 바닷물이 찬 사슴. 바다가 된 사슴. 자식 잃은 사슴.
집으로 돌아오는 늦은 밤, 어김없이 마중 나온 사슴. 폴짝 내 가슴속으로 뛰어드는 사슴. 잠 못 드는 사슴, 때문에 점점 커지는 가슴. 점점 자라는 사슴이 사는 사람의 가슴.
온몸에 멍이 든 알몸의 네살배기 아이가 제 손을 과자처럼 선뜻 내민다. 사슴은 잘도 받아먹는다. 꽃잎보다도 작은 나뭇잎 한장 남김없이, 내 가슴팍에 앉아 사슴은 다 먹어치운다. 그렇다고 이 계절이 오는 걸 막을 수는 없다. 가는 걸 붙잡아놓을 수도 없다.
이 계절에 일어난 참혹한 사건으로 사슴은 태어났다. 누군가는 죽고, 사슴은 태어났다. 나는 죽은 이의 가슴을 사슴이라고 부른다.
사슴은 태어나자마자 눈 뜨고, 일어섰으며, 매일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려 한다. 나는 그 여정을 가슴에서 사슴까지, 라고 한다.
무너진 내 가슴에서 태어난 사슴 한 마리가 자란다. 내 가슴은 사슴 따라 점점 커진다. 계속 커진다.
어느날 가슴이 터지고 불타면 내 사슴을 어쩌나.
한순간 구름처럼 하얀 재가 된 내 사슴을 어쩌나.
사슴 한 마리 사슴 두 마리 사슴 세마리…… 아무리 백까지 백번을 헤아려도 잠이 오지 않는다.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