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 어느 일요일에 우리집에 잔뜩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지. 일요일 아침이었어. 술꾼들이 모여앉아 술 마시기 가장 좋은 때지. 왜 그런지는 스스로 한번 생각해보시고. 어쨌든 내 친구 하나가 여자를 데리고 나타났지. 에벌린이라는 여자였어. 에벌린은 올 때부터 이미 술에 취해 있었지만 우리는 에벌린한테 술을 더 갖다 마시라고 했어. 곧 레지가, 아 내 친구 이름이야, 레지가 자기도 한잔하려고 부엌에 갔는데 술병이 없는 거야. 뭐, 레지도 한창때 술깨나 마시는 치들하고 어울려봤기 때문에 바로 술병을 둘 만한 곳을 뒤지고 나섰지. 그런데 장이며 물건들 뒤며 구석구석 다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어. 레지는 어떻게 된 건지 금세 눈치채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는 소파에 앉아 있는 에벌린 양을 봤어. 에버린은 염소처럼 취해 있었지. 레지가 말했어. 에벌린, 위스키 어디 갔어? 그러니까 에벌린이 이러는 거야. 아 가가 바바 랄라 가가. 레지가 다시 물었지. 에벌린, 위스키 어디에 뒀냐니까? 아 랄라 블로글 블라블라. 레지는 조금씩 약이 오르기 시작했어. 그래서 에벌린 얼굴에 자기 얼굴을 들이대고 이렇게 말했지. 아 로들 로들 블라블 가가 블라블라. 그제야 에벌린이, 변기에 숨겨놨어요, 그러더라구.
백 정말 재미있네요.
흑 좋아할 줄 알았어.
백 그래서 위스키가 진짜로 거기 있었나요?
흑 아 그럼. 거기가 술꾼들이 술병을 감출 때 애용하는 곳이거든.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거요. 술꾼이 걱정하는 건 술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는 거. 실제로 그래서 죽으면서도 말이야. 술꾼이 걱정하는 건 술로 죽을 기회가 오기도 전에 술이 떨어지는 거지. 배고프쇼? 이야기는 조금 이따 다시 하면 돼. 어디까지 했는지 잊어버리지 않으니까.
백 괜찮습니다. 계속하세요.
흑 만일 선생이 술꾼한테 술을 주면서, 당신 사실 이걸 원하는 게 아니잖아, 하고 말하면 술꾼이 뭐라고 할 것 같소?
백 뭐라고 할지 알 것 같은데요.
흑 물론 아시겠지. 하지만 술꾼이 뭐라 해도 선생이 여전히 옳은 거요.
백 술꾼한테 사실은 그가 술을 원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 게요?
흑 그렇지. 술꾼은 자기가 진짜로 원하는 걸 얻을 수가 없어. 어쨌든 자기는 얻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그 대신 진짜로 원하지도 않는 걸 가지려 하니까 아무리 가져도 모자랄 수밖에.
백 그럼 술꾼이 진짜로 원하는 게 뭔가요?
흑 술꾼이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선생도 알잖아.
백 아니 모르겠습니다.
흑 아냐, 알아.
백 아니요, 모릅니다.
흑 흠.
백 흠 뭡니까?
흑 이거 대책 없는 분이시구만, 교수 선생.
백 그러시는 댁도 해변에서 보내는 하루처럼 유쾌한 분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흑 술꾼이 뭘 원하는지 모르신다?
백 네. 모릅니다.
흑 누구나 다 원하는 걸 원하지.
백 그래서 그게 뭡니까?
흑 하느님한테 사랑받기를 원하지.
백 나는 하느님한테 사랑받고 싶지 않은데요.
흑 그거 마음에 드네. 보쇼, 선생은 바로 핵심으로 치고 들어가잖아. 술꾼도 사랑받고 싶어하지 않아. 말로는 말이야. 그저 위스키 한 잔을 원할 뿐이지. 교수 선생, 선생은 똑똑한 사람이잖소. 어디 한번 어느 게 말이 되고 어느 게 말이 안 되는지 말해보쇼.
백 나는 위스키 한 잔 역시 원치 않는데요.
흑 조금 전에 한 잔 달라고 했던 거 아닌가?
백 일반 명제로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흑 우리가 지금 일반 명제 얘길 하는 게 아니잖소. 술 얘기를 하는 거지.
백 나는 음주 문제는 없습니다.
흑 그래도 문제가 있기는 있잖소.
백 글쎄 나한테 어떤 문제가 있든 알코올로 다룰 수 있다고는 상상할 수 없는데요.
흑 뭐로 다룰 수 있는지 댁도 아는 것 같은데요.
흑 선셋 리미티드로.
백 네.
흑 그게 선생이 원하는 거다?
백 그게 내가 원하는 겁니다. 그래요.
흑 그게 엄청나게 센 위스키야, 교수 선생.
백 그러니까 그건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아니다.
흑 그건 선생이 진짜로 원하는 게 아니지. 바로 그거요.
백 글쎄요. 나는 정말로 그걸 원하는 것 같은데요.
흑 당연히 그렇겠지, 여보.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여기 앉아 있지도 않을 테니까.
백 아니, 거기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흑 상관없소. 어쨌든 그게 내가 들고 있는 패야.
백 신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겐 그만큼 어떤 결핍이 있는 거겠지요. 나 같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댁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흑 잘 이해하지. 전적으로 동의하고.
백 동의한다고요?
흑 동의하구말구. 그 결핍이 바로 하느님이니까.
백 뭐, 말했다시피, 우리는 그냥 의견이 갈릴 수밖에 없겠네요.
흑 설마 토론의 장을 닫아버리는 건 아니시겠지, 응?
백 이 지점에서 닫지는 않겠습니다.
흑 내가 할말이 조금 남았거든.
백 왜 아니겠어요?
흑 금주협회 모임에 한두 번 가긴 갔었소. 거기서도 하느님 얘기는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 하지만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게 또한 하느님 얘기라는 건 잠깐만 있어봐도 알 수 있었어. 문제는 금주협회에 하느님이 충분치 않다는 거였어. 하느님이 너무 많다는 게 아니라. 나는 어떤 것들엔 아주 아둔하지만 그래도 마침내 금주협회의 진실이 그런 거라는 걸 알게 됐어. 그리고 그건 아마 다른 많은 경우에도 진실일 거야.
백 글쎄, 이거 유감이지만, 나한테는 신이라는 관념 자체가 쓰레기 더미에 불과합니다.
흑인이 두 손을 가슴에 얹고 몸을 뒤로 기댄다.
흑 오 주여 자비를, 오 우리를 구하소서 예수여. 교수 선생이 우리를 죄다 신성모독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절대 구원받지 못할 거요.
흑인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으며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린다.
백 댁은 그게 악한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군요.
흑 오 자비를. 그래요, 교수 선생.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선생은 그렇게 생각하잖소.
백 생각이고 뭐고 없습니다. 그건 그냥 사실일 뿐입니다.
흑 아니 그건 그냥 사실일 뿐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그건 선생에 관한 가장 큰 사실이야. 거의 유일한 사실이나 다름없어.
백 하지만 그게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군요.
흑 그게, 나는 그게 치료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거지. 저 위에 계신 분이 그걸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얘기라면, 그분은 그런 걸 하도 많이 봐서 선생이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골치 아파하지는 않을 거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군. 보쇼, 누군가가 선생더러 선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어떨까. 그리고 선생은 거기 그렇게 앉아 그 말을 듣고 있다면. 그다지 열받거나 하지는 않겠지. 안 그렇소?
백 그렇겠지요. 그냥 그 사람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겠지요.
흑 내 보기에도 그래. 심지어 그 사람을 좀 도와주려고 할지도 모르지. 그래서인지 내 경우에는 그분이 나한테 크게 소리를 질러대기까지 했지. 나는 어떤 깜둥이가 내 몸을 사과 속처럼 도려내는 바람에 두 동강이 났다가 원래대로 다시 꿰매는 수술을 받은 뒤에 자빠져 있었거든. 어쨌거나 이 말은 꼭 해야겠는데, 하느님이 하느님이라면 언제라도 선생 가슴에 대고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거야. 또 이 말도 반드시 해야겠는데, 하느님이 나한테 말을 했다면, 실제로 말을 했고 말이야, 하느님은 다른 누구한테도 말을 할 수 있다는 거야.
흑인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가볍게 세 번 치더니 교수를 본다.
정적.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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