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지난 10여 년 동안 나는 산업 생산 양식에 관하여 글을 쓰고 여러 권의 책을 출간했다. 그간 출간된 책들에서는 대량 생산된 상품과 서비스에 의존할수록 함께 사는 삶에 필요한 기반이 서서히 붕괴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춰왔다. 각각의 글에서 나는 경제성장마다 드러나는 구체적 영역을 조사하면서 한 가지 일반 법칙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것은 어느 순간 산업 생산 양식이 내가 이름 붙인 ‘근원적 독점’이 되어버리면 사용가치는 필연적으로 파괴된다는 것이다. 이전의 글에 이어 이 책에서는 산업이 발전하면서 어떻게 ‘가난의 현대화’를 만들어 내는지 설명하려 한다.
‘현대화된 가난’은 과도한 시장 의존이 어느 한계점을 지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가난은 산업 생산성이 가져다준 풍요에 기대어 살면서 삶의 능력이 잘려나간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풍요 속의 절망이다. 이 가난에 영향을 받는 사람은 창조적으로 살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데 필요한 자유와 능력을 빼앗긴다. 그리고 플러그처럼 시장에 꽂혀 평생을 생존이라는 감옥에 갇혀 살게 된다. 현대의 이 새로운 무력함은 너무나도 깊이 경험되는 것이라 겉으로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우리 시대에는 일상 언어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다. 지금까지 만족스러운 행위를 표현할 때 쓰던 말은 대부분이 동사였지만, 이제는 오로지 수동적 소비를 하도록 고안된 상품을 가리키는 명사가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예컨대 전에는 무언가를 ‘배운다’고 말해지만, 지금은 ‘학점 취득’이라 말한다. 여기에는 개인과 사회의 자아상에 깊디깊은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자신이 겪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표현하는 데 애를 먹는 것은 평범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경제학자는 기존의 경제 이론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이 현대의 가난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 새로운 돌연변이 가난은 계속 퍼져 나간다. 개인의 재능과 공동체의 풍요, 그리고 환경 자원을 자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현대의 특이한 무능이 우리 삶을 속속들이 감염시킨다. 그리하여 전문가가 고안한 상품들이 문화적으로 형성된 사용가치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시장 밖에서 만족을 얻을 기회는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예를 들어, 지금 내가 가난한 것은 로스앤젤레스에 사면서 35층 고층건물에서 일하느라 두 발의 사용가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이 신종 가난을,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간에 벌어진 소비 격차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날이 갈수록 인간의 기본적 필요가 상품이 되어가는 세계에서 점점 더 벌어지는 이 소비 격차는 전통적 가난이 산업사회의 방식으로 드러나는 모습이며, 기존의 계급투쟁이라는 개념으로 이 격차를 적절히 노출시키거나 줄일 수 있다. 또한 현대의 가난은 생산수준이 올라가면서 환경에 뿜어내는 외부효과 때문에 짊어져야 하는 사회적 비용과도 다르다. 환경오염과 스트레스, 세금이 불평등하게 부과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피해를 막을 수단 또한 그만큼 불평등하게 배분된다. 그러나 소비 격차와 마찬가지로 이 부당한 사회적 비용도 산업사회에서 나타나는 전통적 가난의 특징이다 보니 경제 지표나 객관 증거로 밝혀낼 수 있다.
하지만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가리지 않고 영향을 미치는 이 산업화된 무력함은 그렇지가 않다. 현대의 새로운 가난이 만연하는 세상에서 상품에 중독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죄악이거나, 또는 두 가지 다일 수 있다. 소비를 하지 않고 무언가를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평균 수준의 소비자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는 어떤 사회 복지도, 직업 훈련도, 소수 집단 우대 정책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국과 쿠바, 스웨덴에서 국민에게 표준 주택을 공급하는 법안이 통과되면서 자신만의 특별한 집을 설례하고 만들 자유는 사라졌다. 인력과 기술, 건설자재, 관련 법규와 대출 등은 주거를 인간의 활동이라기보다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하듯 조직된다. 그 상품을 제공하는 쪽이 기업가든 관료든 현실에서 나타나는 결과는 똑같다. 그 결과는 인간의 무력함으로, 우리 시대에만 겪는 특별한 가난이다.
경제 성장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곳 어디서든, 직장에 다니지 않거나 소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쓸모없는 인간으로 취급된다. 공인된 전문가의 허가 없이 집을 짓거나 아픈 사람을 치료했다가는 법을 우습게 아는 겁 없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우리는 자기 안의 재능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었고, 그 재능을 발휘하도록 환경조건을 조절할 힘을 빼앗겼고, 외부의 도전과 내부의 불안을 이겨낼 자신감을 상실했다. 오늘날 멕시코에서 아이를 어떻게 낳는지를 예로 들어 보자. 남편이 정규직 직장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최소한의 사회복지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여성에게 전문가의 보살핌 없이 아이를 낳는 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들은 산업사회의 생산양식을 그대로 반영하는 출산 방식을 따른다. 반면에 빈민가나 외진 시골에 사는 그들의 형제들은 여전히 집에서 아이를 낳을 능력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이런 출산 방식이 조만간 아이를 소홀히 다룬 혐의로 기소될 행위라는 걸 그들을 아직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립적인 여성에게도 현대의 전문가가 고안한 출산 방식이 손길을 뻗치면서 자율적 행위를 위한 조건, 그리고 열망과 능력은 점차 파괴되어간다.
선진국에서 가난의 현대화는 전문가의 공언 없이는 아무리 자명한 것도 깨닫지 못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전문가란 텔레비전 기상 캐스터일 수도 있고, 교사일 수도 있다. 몸에 조금만 이상한 기미가 생겨도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거나, 아니면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하고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에 이를 때까지 내버려둔다. 서로 떨어진 거리를 교통수단이 이어주지 않으면 친구나 이웃과도 멀어진다. (‘떨어진 거리’는 처음부터 교통수단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세상과 접촉하지 못한 채 지내고, 누군지 모르는 사람을 위해 일을 하고, 자신이 느끼는 것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다.
1973년에 『공생을 위한 도구Tools for conviviality』를 출간하고 난 뒤 그 사이 경제 현실도 변하고, 내 견해도 바뀌었다. 이 책은 그 변화를 반영해 정리한 후기後記 성격을 지닌다. 그동안 기술이나 제도 영역에서 기술과는 상관없는 의례와 상징의 힘이 비약적으로 커졌다. 그만큼 과학적이며 천문적이고 합리적인 신뢰는 감소했다. 1968년을 예로 들면, 그때까지만 해도 전문가의 권위에 맞서는 사람은 과학적이며 전문적이고 합리적인 신뢰는 감소했다. 1968년을 예로 들면, 그때까지만 해도 전문가의 권위에 맞서는 사람은 낭만주의자이거나 반계몽주의자 혹은 몽상에 사로잡힌 엘리트로 치부되곤 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상식으로 기술과 제도를 평가하는 수준은 미숙하거나 시대에 역행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즉 시민운동을 이끄는 정치 지도자나, 전문 지식을 수단으로 가난한 사람의 교사임을 자임하는 '진보적’ 전문가에게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전문가들이 정의하는 필요와 문제, 해결을 중심으로 후기 산업사회를 재편하자는 주장은 이념과 정치, 사법 제도에서 암암리에 모두가 받아들인 가치였다. 다른 사안이라면 분명히 극렬하게 대립했을 이들이 이 점에서만은 의견 일치를 보았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전문가가 만든 기술이 과연 향상된 기술인지, 현대적인 기술인지에 대한 최종 인증을 공동체와 이웃들, 시민의 모임이 담당하게 되었다. 체계적인 기술 분석을 통해 이들은 전문 제도권의 대리인들이 대중을 위해 정의했다고 하는 '필요’와 '문제’, 그리고 '해결’을 비웃으면서 스스로 확신을 하기에 이르렀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전문가의 견해에 기초해 개정된 법률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과학에 심한 편견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제는 전문가의 견해에 기반한 공공정책을 신뢰하는 사람은 드물다. 수많은 사람이 전문가의 도움 없이도 자신에게 필요한 과학적 정보를 얻고 스스로 결정을 내린다. 어떤 경우에는 희생이 뒤따르고 죽음을 감수하더라도 직접 행동에 나서기도 한다. 이들은 자유와 기득권을 희생하면서까지 현대의 과학적 태도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산 증인이 된다. 이들이 깨달은 것은 원자력 발전소, 중환자실, 의무교육, 태아 검사, 정신외과, 전기충격 요법, 유전공학 등의 오류를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는 충분하며, 이 증거들이란 모두 단순하고 명확해서 보통 사람도 충분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10년 전만 해도 의무교육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강고한 성역이었다. 그때와 달리 지금 의무교육을 옹호하는 이들은 거의 어김없이 학교가 있어야 생계를 유지하는 교사이거나 세련된 부르주아와의 이론 싸움에서 전문 지식을 지켜야 하는 마르크스주의자일 확률이 높다. 10년 전에는 현대 의료 제도의 효과가 얼마나 뛰어난지 그 신화를 의심하는 이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의학 교재에는 그 신화가 그대로 실렸다. 즉 현대에 들어 성인의 평균 수명이 길어졌고, 암 치료 기술로 환자의 생명이 연장되었으며, 의사 덕분에 유아 생존율이 높아졌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인구동태통계의 지표만 보면 언제든 알 수 있었던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즉 성인 평균 수명은 지난 몇 세대 동안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을 만큼의 변화가 전혀 없었으며, 가장 부유한 나라의 평균 수명은 전 세대보다도 낮아졌고 가난한 나라보다도 길지 않았다. 10년 전, 인류의 고귀한 목표는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고등교육과 평생교육, 예방의학과 고속도로, 그리고 초고속 통신으로 연결된 지구촌이었다. 오늘날에는 교육, 교통, 의료, 도시화를 둘러싸고 위대한 신화를 만들던 제례祭禮의 신비가 어느 정도 벗겨졌다. 그러나 아직 제도화가 허물어진 것은 아니다.
그림자 가격shadow price이나 갈수록 벌어지는 소비 격차도 현대의 가난에 포함된 중요한 특징이다. 하지만 나의 주된 관심사는 현대화가 일으키는 다른 결과들이다. 즉 자율은 무너지고, 기쁨은 사그라지고, 경험은 같아지고, 욕구는 좌절되는 과정에 있다. 예를 들어 나는 과도한 에너지로 움직이는 교통수단이 어떻게 서로가 이어지는 걸 방해하는 사회적 걸림돌이 되는지를 조사했다. 누구나 목적지에 빠르게 도착하고 모두가 자동차를 공평하게 사용할 때 자동차에 필요한 연료의 한도를 정해보고 싶었다. 물론 나는 초고속 교통체계의 특혜는 소수만 누리고, 피해는 다수가 받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대다수의 시민은 아침부터 서둘러야 하고, 소음과 공해를 겪어야 한다. 하지만 나의 관심은 다른 데 있다. 나는 현대성에 들어 있는 부정적 속성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시간을 잡아먹는 초고속 교통, 병을 만드는 의료,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교육이 그것이다. 허울뿐인 혜택이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부정적 외부효과가 불평등하게 부과되는 것은 이 부정적 속성에 뒤따르는 결과이다. 나의 관심사는 현대화된 가난이 인간에게 끼치는 직접적이며 구체적인 결과이며, 그것을 견뎌내는 인간의 인내이며, 이 새로운 비참함에서 벗어날 가능성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세계에 정의가 널리 퍼지는 것을 간절히 보고 싶다. 모든 인간이 기쁨 속에서 진정으로 함께 누려야 할 것을 불평등하게 분배하는 것에 분명히 반대한다. 하지만 최근에 나는 과연 그 분배라는 게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지 세심히 조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래전, 후기 산업사회의 모든 기업에 잠복한 반생산적인 신화 생산에 관해 처음으로 말을 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보다도 이 과제는 지금 더 분명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나의 목표는 인간을 오로지 좌절시키기 때문에 항상 부당한 이 시대의 거짓 풍요를 발견하고 고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 재생에 영감을 주는 이론이 가능해질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도구의 본성과 그 도구를 사용하는 사회에 확립된 정의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꾸준히 조사해왔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권리를 전문가가 만들어내는 사회에서는 자유가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걸 지켜보게 되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나누고 양쪽을 서로 비교했다. 현대의 도구 중 상품 생산력을 향상하는 도구와 사용가치를 만드는 도구, 대량 생산 상품을 구매할 권리와 개인이 만족을 얻고 창조적으로 표현할 자유, 급여를 받고 하는 일과 고용되지 않고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을 서로 비교해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타율적 관리와 자율적 행동으로 나누어 비교했을 때, 후자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많은 고통과 노력이 따르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의 독자들처럼 나 역시 상품과 권리, 일자리는 근본적으로 공정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정의를 위해 투쟁하자는 주장은 불필요한 듯하다. 오히려 그 정의를 보완하고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공생의 정치’라 부르고자 한다. 『공생을 위한 도구』에서 기술적 의미로 사용했던 이 용어는 사용가치를 만들 수 있는 자유를 공정하게 분배하기 위한 저항을 의미한다. 또한 기업과 전문가가 만든 상품으로부터 혜택을 가장 적게 누리는 사람에게 사용가치를 만들 가장 큰 권한을 부여하도록 생산의 우선순위를 매김으로써 자유를 실현하려는 저항을 의미한다.
정치적 절차를 통해 한 사회가 생산할 부와 일자리에 한계를 설정해야만 부와 일자리 모두 공평하게 나누어져 누구나 자유롭게 누릴 수 있다. '공생의 정치’는 이러한 통찰에 근거한다. 과도한 부가 생산되거나 고용 기간이 너무 길어지면, 아무리 잘 분배하더라도 평등하게 생산적인 자유를 누리는 데 필요한 사회적, 문화적, 자연적 조건이 파괴되고 만다. 비트bit와 와트watt(각각 정보와 에너지 단위를 나타낸다)가 어느 한계를 넘어 대량 생산 상품에 과도하게 투입되면 필연적으로 인간을 '가난하게 만드는 부impoverishing wealth'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 가난한 부는 함께 나눌 수 없을 만큼 희소한 부이거나, 한 사회의 가장 힘없는 사람에게서 자유와 해방을 빼앗는 파괴적인 부이다. 나는 지금까지 펴낸 책들을 통해 사회적으로 치명적일 수 있는 풍요의 한계를 시민 스스로 인식하여 사회적 차원의 상한선과 한계를 설정하는 정치 절차를 만드는 데 이바지하고자 한다.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