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방드리유 드 퐁트넬 대수도원
호기심과 걱정스러운 마음을 안고 나는 루앙-이브토 거리에서 생 방드리유1) 대수도원까지 이어진 언덕길을 걸었다. 파리에서 몽유병에라도 걸린 듯한 일주일을 보낸 데 이어, 루앙 역 근처의 작은 호텔에서 기차가 도착하고 떠나는 철컹 소리, 기적 소리, 증기와 연기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악몽에서 깼다가 다시 악몽에 빠져드는,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격렬한 고통의 밤을 보내고 난 뒤였다. 아침에 버스를 타고 센 강 하류의 안개 자욱한 굽이들과 짙푸른 녹색 들판, 일렬종대로 늘어선 포플러나무들을 지나오면서도 나른하고 축 처진 기분이 나아지질 않았다. 그리고 지금, 후끈 달아오른 길을 걸어 올라 늦여름 숲 속을 지나가자니, 계획 따위는 그냥 내팽개치는 게 낫겠다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는 성공보다 임박한 실패를 더 두려워하고 있었다. 수도원에 빈방이 없다면, 아니 뭔가 다른 이유로 수사들이 날 받아주지 않는다면, 파리로 돌아가 앞으로 몇 주 동안의 계획을 다시 조정해야 한다. 나는 도버 해협 너머에 있는 이교도의 섬에서 온 보잘것없는 사람인 주제에 사전 언질이나 연락은커녕 피정2)에 들고자 하는 그럴듯한 변명거리도 없이 막 수도원 앞에 도착한 참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당시에 쓰고 있던 책을 마무리할 동안 머물 수 있는, 값싸고 조용한 어떤 곳을 찾고 있었다. 파리에서 사귄 친구 하나가 생 방드리유 대수도원이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답고 오래된 베네딕토회3) 수도원이라고 말했다. 나는 멋대로 계획을 세우고 출발했다.
그날이 일요일이었는데 출입관리소는 방금 미사를 마치고 나와 성화와 메달, 묵주 따위를 사는 방문객들로 북적거렸다. 뿔테 안경을 쓴 수사 한 명이 잔뜩 시달린 표정으로 빗발치는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나는 족히 25분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상당히 불안해하며 내 입장을 설명했다. 수사가 안쓰럽다는 듯이 듣더니 아빠스4)께 말씀드려볼 테니 좀 기다리라고 말했다. 마침내 검은 수도복을 입은 형체가 정원을 가로질러 오는 게 보였다. 웃고 있었다. 그는 무거운 내 가방을 들며 결과를 알려주었다. “아빠스께서 허락하셨어요. 환영합니다.”
잠시 후 문이 닫히면서 일요일 방문객들의 소음이 차단되고, 우리는 하얀 층계와 통로들이 얽힌 고요한 미로에 갇혔다. 수사가 어떤 문을 열고 말했다. “이 방을 쓰시면 됩니다.” 천장이 높은 17세기 양식의 방에는 편안해 보이는 침대와 기도대, 책상, 태피스트리로 장식된 의자, 방향을 조정할 수 있는 초록색 독서등이 있었다. 회반죽을 바른 하얀 벽에 걸린 십자가를 보니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창문 밖으로는 잔디 깔린 안마당에 작은 분수가 물을 뿜고 있는 게 보였고, 마을의 반목조 주택들로부터 수도원을 가려주는 담과 수도원 건물의 회색 측면이 보였다. 그 너머로 숲이 펼쳐졌다. 책상 중앙에는 커다란 잉크병과 펜이 가득 찬 상자, 방금 새 압지를 끼운 필기장이 놓여 있었다. 가방을 풀어 옷과 종이 뭉치, 책 따위를 꺼내 놓자마자 어디선가 종이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접객담당 수사가 다시 나타나 점심식사를 하는 식당으로 나를 이끌었다. 걸어가는 사이에 건물의 건축 양식이 18세기 양식에서 17세기, 다시 고딕 양식으로 바뀌었다. 마침내 우리는 맞보 형식의 둥근 천장을 씌운 지극히 아름다운 회랑에서 걸음을 멈췄다. 조각이 새겨진 큰 문과 그 옆에 놓인 성수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문 앞에는 다른 방문객 몇 명이 모여 있었다. 접객담당 수사가 우리를 식당 안으로 안내했다. 안에는 백발에 테두리 없는 작고 검은 모자를 쓰고 녹색 끈에 달린 금십자가를 가슴에 늘어뜨린 키 큰 귀족적인 용모의 아빠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스는 우리 각각에게 몇 마디씩을 건넸다. 몇몇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아빠스의 오른손에 낀 커다란 에메랄드 반지에 입을 맞췄다. 그는 아주 오래전에 가정교사한테서 배웠을 게 분명한 영어로 내게 깍듯한 인사말을 건넸다. 한 수련수사가 은제 물병과 대야를 들고 다가왔다. 아빠스는 우리 손에 물을 조금 따른 다음 수건을 건넸다. 베네딕토회의 관습에 따른 환영의식이 끝났다.
식전 찬가가 몇 분간 계속됐다. 방문객용 식탁은 식당 한가운데, 아빠스의 식탁이 놓인 단상 바로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앞에 놓인 접시 옆에 납작하게 접힌 비레타5)를 올려놓은 걸 보니 내 자리 양옆의 방문객은 둘 다 사제인 듯했다. 거대한 방의 양쪽 벽을 따라 수사들이 앉은 식탁이 두 줄로 정연하게 배치됐다. 그 뒤로 늘어선 로마네스크 양식의 벽기둥들은 노르만 양식의 아치들과 만나 나지막한 통로를 만들었다. 그곳에는 까마득하게 오래된 듯한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 돌로 만든 회색 벽이 고딕 양식의 나무 천장으로 쑥쑥 뻗었고, 아빠스의 식탁 위로는 거대한 십자가가 매달렸다. 수사들이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냅킨 한쪽 끝을 목깃 안에 밀어 넣자 위쪽 어둠 속에서 라틴어로 뭔가를 낭송하는, 이 세상의 소리 같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찾았다. 식당 저쪽 끝, 6미터쯤 되는 기둥 위에 제비집처럼 툭 튀어나온 작은 공간이 있었다. 어딘가에 그곳으로 오갈 수 있는 계단이 숨어 있을 터였다. 공중 독서대에 가려 머리와 어깨만 보이는 수사가 독서대에 놓인 뭔가를 읽었다. 독서대를 밝힌 등불 덕분에 그곳은 주변의 어스름 속에서 빛나는 휘황한 벽감처럼 보였다. 노래하는 듯한 음성이 확성기로 들렸다. 그런 와중에 식탁마다 대기하고 있던 앞치마를 두른 수사와 접객담당자가 움푹한 그릇에 담긴 야채수프를 내오고 삶은 계란 두 알씩을 개인용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이어서 감자와 렌즈콩, 엔다이브 샐러드가 나오고, 마지막으로 둥근 카망베르 치즈가 나왔다. 수도원 제빵실에서 만든 훌륭한 빵도 나왔다. 이따금씩 수사들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나와 아빠스의 식탁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보였다. 아빠스가 신호를 보내면 수사는 몸을 일으켜 깊숙이 절한 다음 물러났다. 아마도 수도원 생활을 그린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석판화를 봐서 그랬겠지만, 나는 뭔가 풍성한 붉은 포도주의 향연을 기대했다. 그러나 우리 식탁에 올라온 금속제 주전자에는, 아 슬프구나, 맹물만 들어 있었다.
낭송은 이제 라틴어에서 프랑스어로 바뀌었다. 여전히 나로서는 내용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음산하고 단조로운 곡조였다. 루이 필립,6) 뒤팡루,7) 라코르데어,8) 기조,9) 티에르,10) 강베타,11) 몽탈랑베르12) 같은 몇몇 알 만한 이름들이 튀어나왔다. 우리가 19세기 프랑스 역사에 관한 부분을 듣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성경도 아닌 책을 읽으며 손님들을 대접하는 이 딱딱한 관습은 처음에는 우스꽝스럽게 생각됐지만 이상하게도 성스럽게 들렸다. 나는 낭송 본래의 목적이 과시적인 허영에 재갈을 물리는 동시에 성 베네딕토13) 시절의 배우지 못한 신자들을 배려하는 데 있음을 알아챘다. 식사가 진행되는 내내 다른 말은 한 마디도 듣지 못했다. 식탁이 치워지자 수사들은 팔을 포개 겉옷 안에 숨긴 채 고개를 숙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스가 작은 나무망치로 가볍게 탁자를 내리쳤다. 봉독하던 수사가 책을 접고 밖으로 굴러떨어질 듯이 난간 위로 깊숙이 절한 다음 특정한 곡조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Tu autem Domine miserere nobis”라고 노래했다. 모두 일어서서 팔을 교차해 양 무릎을 짚고 몸을 직각으로 굽힌 자세로 긴 감사기도를 노래했다. 몸을 일으킨 그들은 방향을 틀어 아빠스에게 절한 다음 여전히 감사기도를 노래하면서 천천히 식당을 나섰다. 양쪽으로 나뉘어 회랑을 지난 수사들은 성당으로 들어가 통로 끝까지 걸어갔다. 둘씩 짝지어 통로 끝까지 걸어간 수사들은 서로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다음 양쪽에 있는 수도자석으로 향했다. 노래는 약 8분 남짓 계속됐다. 그다음엔 입장할 때와 반대로 엄숙한 퇴장 절차가 이어졌다. 검은 형체들로 이루어진 줄은 회랑으로 나오는 순간 흐트러져 수도원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새 압지와 펜과 인쇄용지 크기의 깨끗한 종이 앞에 앉았다. 나는 조용한 고독과 평화를 원했고, 여기 그 고독과 평화가 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쓰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바깥 숲에 비가 오기 시작했다. 우울한 기분과 뭐라 말할 수 없는 외로움이 갑자기 망치로 내려치듯 나를 덮쳤다. 방문 안쪽에는 을씨년스러운 문구들이 잔뜩 적힌 ‘방문객 숙소 이용수칙’이 붙어 있었다. 수사들의 하루14)는 오전 4시에 새벽기도와 뒤이은 초대송으로 시작되고, 이어 개인미사와 독서, 묵상이 이어진다. 방문객의 하루는 오전 8시 15분 아침기도와 곧바로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의 아침식사로 시작된다. 삼시경과 육시경 사이에는 10시에 시작되는 수도원 장엄미사15)가 끼어 있다. 점심식사는 오후 1시. 구시경을 거쳐 저녁기도는 오후 5시. 저녁식사는 7시 30분이고, 8시 30분에는 끝기도, 9시에는 침묵 속에서 잠자리에 든다. 이용수칙은 식사 때 침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따로 ‘기분전환’을 하는 것은 금지되며, 아빠스의 허락이 있을 때만 수사들에게 말을 걸 수 있다. 수도원 안을 걸을 때는 소음을 내서는 안 되며, 회랑에서 담배를 피워서도 안 된다. 말할 때는 목소리를 낮춰야 하고, 침묵해야 할 시간에는 철저히 침묵을 지켜야 한다. 규칙들이 지독하게 악의적으로 느껴졌다. 그처럼 무성한 침묵과 엄숙함이라니! 그곳은 거대한 무덤, 대규모 공동묘지와 다를 바 없었다. 나만이 그곳에 살아 있는 유일한 주민이었다.
벌써 저녁기도를 알리는 첫 종이 울리고 있었다. 나는 회랑으로 내려가 교회 문 앞에 조용히 줄지어 있는 수사들을 바라보았다. 수사들은 일상복과 어깨에 걸치는 스카풀라16) 위에 두건이 달린 검은색 겉옷을 입었는데, 단이 바닥까지 늘어지는 데다 일상복이 다 가려질 정도로 품이 넉넉해서, 그 옷을 입은 사람들은 걷는 게 아니라 슬슬 미끄러져 가는 듯이 보였다. 수사들은 중국 관원들처럼 손을 소매 안에 숨기고 고개를 숙여 뾰족한 두건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로 거의 완벽하게 얼굴을 가렸다. 정체를 숨기기엔 그만인 복장이 아닌가! 그들의 모습은 18세기 래드클리프 여사17)의 소설에 나오는 잔인한 수사들, 또는 개신교의 반反교황 문건들에 묘사된 사악한 수사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지금 교회 문 앞에 모여선 수사들의 모습은 불길하다기보다는 어딘가 모르게 서글픈 느낌이었다. 식당과 교회에서만 수사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저녁기도때에는 자리에 앉아 전례18) 순서에 따라 두건을 썼다 벗었다 하는 수사들을 지켜보았다. 수사들의 얼굴은 기이할 정도로 창백했고 몇 명은 거의 파래 보일 지경이었다. 하나같이 얇은 피부 아래로 얼굴의 골격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그러나 광대뼈 아래가 쑥 꺼져 그늘이 질지언정 수사들의 얼굴에는 주름이 거의 없었다. 수사와 일반인을 뚜렷이 구별해주는 것이 바로 이 주름 없는 여윈 얼굴이었다. 그들의 얼굴이 아토스 산19)이나 메테오라20)에서 만난 구레나룻 무성한 그리스 수사들의 사나운 산적 같은 얼굴과 얼마나 다른지 나는 새삼 실감했다. 그리스 수사들의 눈썹은 울화통을 터뜨리거나 웃거나 아니면 집중하느라 찌푸려 있다가도 순식간에 올림포스 신과도 같은 자비롭고 평온한 모양이 되곤 했고, 아래의 눈은 늘 이글거리고 번득이고 반짝거렸다. 나는 로마 카톨릭의 수도자와 비잔틴 동방교회 수도자 간의 현격한 차이를 여러 곳에서 느꼈다. 두건을 쓰고 침묵을 지키며 재빨리 지나가는 어떤 수사를 보고, 나는 갑자기 테오필라크토스 집안의 형제인 크리스트와 폴리카르포스, 곧 디오니시오스 신부와 가브리엘 신부가 떠올라 미소를 지었다. 전쟁 때 크레타 섬에서 날 받아주고 보호해줬던, 무성한 수염과 긴 머리에 원통형 모자를 쓴 나의 신부님들. 리비아 해에 햇빛이 내리쬐일 때 올리브나무 아래에서 라키21)를 따르고 호두를 깨고 노래를 부르고 권총을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처칠에 대해 끝도 없이 물어대던 나의 신부님들. 그러나 이곳 수도원의 서늘한 그늘 아래에는 단 한 번의 웃음도 찌푸림도 없었다. 어떠한 격렬한 환희나 분노, 공포의 순간들도 저 경건한 수사들의 고요한 세계를 뒤흔드는 일은 없을 거라고 나는 느꼈다. 수사들의 눈은 늘 아래를 향해 있고, 이따금씩 정면을 바라볼 때에도 그 눈은 조그마한 불신의 그림자도 내비치지 않았다. 부단히 연마해온 고요함과 겸손함, 온순함, 그리고 이미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린 이의 아련한 애잔함이 묻어날 뿐이었다. 성당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줄에 매달린 희미한 불빛은 17세기 초 에스파냐의 화실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냈다. 수르바란과 엘 그레코의 화실에서는 둥그렇게 머리를 민 수수한 모델들이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을 숙이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을 것이다. 저 화가들이 그처럼 세밀하게 그려낸 성녀 데레사22)와 십자가의 성 요한23), 그처럼 충실하게 포착해낸 순명24)과 기도, 명상, 고행, 신비체험과 같은 수도 생활의 외형적 흔적들, 영혼의 어두운 밤과 천상의 산을 오르고 내면의 집들을 순례하는 탐험이 남긴 그 흔적들은 그냥 지어낸 것이 아니었다. 저녁기도를 마친 수사들이 흩어졌다. 몇 시간 뒤에 끝기도까지 마치고 나자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일 분 일 초가 지날수록 혈관의 피는 느려지고 말라붙어 어느 결에 심장박동이 멈출 것처럼 오싹한 기분이었다. 이 사람들은 정말로 매일이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세상과 화해하고, 죄를 보속補贖 받고, 성사聖事를 통해 보호받으며, 자정에 가까운 어느 때라도 고통 없이 생을 마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때가 되면 죽음은 가장 손쉬운 변신이 될 것이다. 그들은 이미 죽음의 침묵과 죽음의 외양, 죽음의 안색, 그리고 유령의 걸음걸이를 손에 넣었으니까, 마지막 단계는 그저 사소한 통과의례일 뿐일 테지. 나는 혼잣말을 계속했다. “그다음엔, 천사들의 나팔 소리와 함께 금으로 만든 성문이 활짝 열리면, 그땐 어쩌지? 녹주석과 붉은 마노와 풍신자석(홍색을 띤 지르콘)이 깔린 천국의 거리를 보면 이 소박한 사람들은 황당해하지 않을까? 그처럼 오래 은거했으니까, 이 사람들은 분명 영원한 황혼의 빛을 받으며 한두 그루의 사이프러스나무가 서 있는 풍경을 더 좋아할 텐데…….” 수도원 전체가 잠자리에 든 그때는 어이없을 정도로 이른 시간이었다. (갑자기 사무치게 그리워진) 파리의 친구들이 어디서 저녁을 먹을지 아직 결정하지도 못했을 시간이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압도적인 우울과 무기력을 느끼며 루앙에서 가져온 칼바도스 한 병을 다 비웠다. 하얀 상자 같은 방 안을 둘러보면서 나는 파스칼이 선언한 ‘모든 인간악의 근원25)’에 시달렸다.
1) 생 방드리유(St. Wandrille, 600~668)는 7세기에 프랑스 북서부에서 활동한 베네딕토회 수사로, 퐁트넬 강변에 수도원을 세우고 초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프랑스어로는 ‘생 방드리유’, 라틴어로는 ‘상투스 완드레지실루스’이나 한국 카톨릭교회에서는 주로 ‘성 반드레지실로’로 불린다.
2) 피정避靜은 카톨릭 신자들이 영성 생활에 필요한 결정이나 새로운 쇄신을 위해 일상에서 벗어나 고요한 곳에서 묵상과 성찰 기도 등 종교적 수련을 하는 일이다. 피정 장소로는 성당이나 수도원, 피정의 집 등을 이용한다. 피정은 피세정념避世情念 또는 피속추정避俗追靜의 준말이다.
3) 베네딕토회Ordo Sancti Benedicti는 529년에 성 베네딕토(St. Benedictus, 480?~550?)가 이탈리아 몬테카시노에서 창건한 수도회로, 통일된 하나의 수도회가 아니라 성 베네딕토의 계율(《성 베네딕토 규칙서》)을 따르는 남녀 수도회들의 연합체를 일컫는다. 베네딕토회는 가장 규모가 큰 수도회로 로마 카톨릭뿐만 아니라 동방교회와 성공회에도 존재한다. 베네딕토회 소속 수도원들은 서로 종속 관계에 있지 않고 인사나 재정 등에서도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치 체제를 유지한다. 베네딕토회는 자치 수도원들의 연합 형태인 21개의 연합회와, 연합회에 속하지 않는 자치 수도원 및 수도 분원으로 구성된다. 보통 베네딕토회 다음에 연합회 이름을 표시하여 각각을 구별한다.
4) 아빠스(라틴어 abbas, 영어 abbot)는 베네딕토 규칙서를 따르는 수도회들과 일부 특정 수도회에서 대수도원 원장을 부르는 칭호이자 직함이다. 동방 수도원에서 수도자들이 자신들의 지도자이자 영성적 스승을 ‘아빠abba’라고 부르던 데서 유래했다.
5) 비레타(Biretta, 라틴어 biretum)는 카톨릭 성직자들이 쓰는 사각형의 각진 모자로, ‘사제 각모’라고 한다.
6) 루이 필립 1세(Louis-Philippe 1er, 1773~1850, 재위 1830~1848)는 프랑스의 국왕이며 오를레앙 공작의 아들이다. 프랑스 혁명에 참여하였고 자코뱅 당에 들어갔다가 아버지가 처형당하자 망명길에 올랐으나 181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사임한 후 귀국하여 팔레 루아얄과 오를레앙 공작 작위를 되찾았다. 자유주의를 신봉하고 평등주의를 주창하여 루이 18세와 샤를 10세 치하의 부르봉 왕정복고 기간에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루이 18세가 죽고 샤를 10세가 즉위하면서 왕위계승권을 얻었고, 1830년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타도되자 ‘프랑스 민중의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통치 기간 동안 금융가와 자본가가 막대한 부를 쌓은 반면 일반 민중의 생활환경은 더 악화돼 극심한 빈부격차를 빚었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왕위를 잃고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7) 펠릭스 뒤팡루(Félix Dupanloup, 1802~1878)는 프랑스 오를레앙의 주교로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카톨릭 자유주의를 대변했다. 7월 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루이 필립 1세의 7월 왕정 아래에서 교육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고, 오를레앙 주교와 프랑스 학술원 회원 시절에는 자유주의 계열의 카톨릭 잡지 발간을 도왔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교황 무류성 교리’ 반포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8) 장-밥티스트 앙리-도미니크 라코르데어(Jean-Baptiste Henri-Dominique Lacordaire, 1802~1861)는 19세기 프랑스의 성직자이자 설교가, 저술가, 정치가다. 프랑스 혁명 이후 도미니코 수도회를 다시 세우는 데 기여했다.
9) 프랑수아 기조(François Guizot, 1787~1874)는 프랑스의 역사가이자 연설가, 정치인이다. 1848년 프랑스 혁명 이전의 프랑스 정치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입헌군주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나중에는 루이 필립 1세 치하에서 교육부 장관과 런던 주재 프랑스 대사, 외교부 장관을 거쳐 1847년부터 1848년까지 수상직을 수행했다. 공교육에 힘을 쏟아 프랑스 전역에 초등학교를 설립했으나 일정 수준 이상의 부를 가진 자들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하는 정책으로 자유주의 세력과 공화주의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1848년 혁명으로 제2공화국이 선포되자 영국으로 망명하였고, 이듬해 귀국한 후로는 역사 연구에 몰두했다.
10) 아돌프 티에르(Marie Joseph Louis Adolphe Thires, 1797~1877)는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역사가다. 1836년과 1840년, 1848년에 수상을 역임했고, 1848년부터 1871년까지 재임한 나폴레옹 3세에 반대해 저항했다. 1870년에 일어난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하자 1871년에 제2제정이 물러가고 제3공화국이 선포됐다. 티에르는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고, 같은 해에 일어난 파리 코뮌을 수천 명의 파리 시민들을 살육하여 진압한 뒤 1873년까지 집권했다.
11) 레옹 강베타(Léon Gambetta, 1838~1882)는 프랑스의 정치가로, 제2제정 황제인 나폴레옹 3세의 전제정치에 반대하며 공화파를 이끌었다. 1870년 보불전쟁이 발발하자 국방정부의 내무장관으로 항쟁을 주장하며 전투를 지휘했다. 강화조약 성립 후 귀국하여 제3공화국 설립에 힘을 쏟았다. 1881년에 수상이 되었으나 좌우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금세 실각했다.
12) 샤를 몽탈랑베르(Charles Forbes René de Montalembert, 1810~1870)는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역사가다. 몽탈랑베르 백작 가문의 아들로 1830년 라메네 신부가 종교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펴낸 신문에 관계하면서 정계로 뛰어들었다. 1831년 카톨릭 학교 설립에 참여했고, 국가가 교회를 배제하고 교육을 독점하는 것에 반대했다. 이를 계기로 7월 혁명으로 들어선 루이 필립 1세 치하에서 자유주의적 카톨릭 세력을 대변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1835년부터 1848년까지 상원의원을 지냈다. 제2제정 치하에서는 나폴레옹 3세에 반대했고, 교회가 종교적·시민적 자유를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해 교황청과 충돌을 빚었다. 국가와 마찬가지로 교회도 절대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갔다고 판단하고 실망한 그는 연구에 매진해 수도원 제도의 발달에 관한 《서양의 수사》(1860), 《19세기 카톨릭의 이해》(1852) 등의 저서를 남겼다.
13) 성 베네딕토(St. Benedictus, 480?~547?)는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라 불리는 수도자로, 이탈리아 중부의 누르시아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공부했으나 도시생활의 혼란을 피해 광야로 가 수비아코에 정착했다. 3년 동안 동굴에서 수도하다가 추종자들의 청을 받아들여 비코바로의 수도원장이 되었다. 엄격한 수도 규칙에 반항하는 수도자가 암살을 시도하자 529년에 몬테카시노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아폴론 신전을 파괴하고 인근의 주민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으며 530년경에 서방 수도원의 발생지가 되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수도 생활의 규칙을 정리한 《성 베네딕토 규칙서》를 남겼다.
14) 성무일도聖務日禱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를 올리는 일련의 의식으로,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규칙이다. 주로 찬가와 시편 기도, 짧은 독서 등으로 엮여 있다. 수도자들은 수도회 규정에 따라 성무일도를 바친다. 현재 카톨릭 교회는 7번의 성무일도를 규정하고 있는데, 아침을 여는 아침기도가 가장 길고, 초대송과 저녁기도는 아침과 저녁에 교회에서 장엄하게 올리는 기도다. 삼시경은 오전 중간에, 육시경은 정오에, 구시경은 오후 중간에 하는 기도다. 끝기도는 수도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주 이른 새벽에 올리는 새벽기도는 1964년에 폐지됐다.
15) 장엄莊嚴미사는 사제가 부제와 복사를 거느리고 향을 피우며 장엄하게 거행하는 미사로, 특별한 음악이 연주되고 성가대가 답하는 노래 미사다.
16) 스카풀라(라틴어 Scapula)는 7세기 초에 베네딕토 수도회에서 처음 등장한 수도복의 일종으로 수사들이 걸치던 노동용 앞치마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보통 일상복 위에 걸치는데, 소매가 없고 양옆이 터진 장방형의 천으로 앞뒤로 늘어지도록 어깨에 걸쳐 입는다. 수도자들이 입는 스카풀라를 일반 신자들도 착용할 수 있도록 양식화한 ‘신자용 스카풀라’도 있다. 보통 두 개의 직사각형 천을 끈으로 이은 모양이다.
17) 앤 래드클리프(Ann Radcliffe, 1764~1823)는 ‘고딕 소설의 여왕’으로 불리는 영국의 소설가로 《시실리의 로맨스》(1790), 《숲의 로맨스》(1791), 《우돌포 성의 미스테리》(1794), 《이탈리아인》(1797)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낭만주의와 감상주의 확산에 따른 이성 거부 풍조와 관련이 있는 고딕 소설은 주로 고딕 양식의 고성이나 수도원 등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묘사하며 공포를 유발하는 내용으로, 18세기 영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으나 19세기 이후에는 인기가 시들해졌다.
18) 전례典禮는 교회가 신에게 바치는 공식적인 예배로 성경이나 성전에 의거해 교회가 공인한 의식이다. 미사와 성사, 준성사, 성무일도, 성체행렬, 성체 강복 예절 등도 전례에 포함된다.
19) 아토스 산은 그리스 북부에 있는 산으로 그리스 정교회의 ‘신성한 산’으로 불리며 20개의 수도원과 부속건물에 거주하는 수사들이 반半자치공화국을 구성하고 있다. 963년에 성 아타나시오가 비잔틴제국의 황제인 니케포루스 2세의 후원을 받아 은수자들이 거주하고 있던 이곳에 최초의 수도원인 대大라우라를 세우면서 체계를 갖춘 수도원들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1400년경에는 40여 개의 수도원이 있었는데, 이 중 20개가 현재도 남아 있다. 1988년에 세계복합유산(문화유산+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0) 메테오라Meteora는 그리스 테살리아 지방 트리칼라 주의 깎아지른 바위 꼭대기에 있는 수도원 집단을 일컫는다. 12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성모 마리아 경당이 두피아니의 기둥으로 불리는 바위기둥의 기부에 있고, 1350년경 아토스 산의 수도원 공동체에서 온 수사 아타나시오스 코이노비티스가 ‘넓은 바위’라는 뜻의 플라티 리토스에 대大메테오른의 여러 건물들을 지었다. 1367년에는 은자 네일로스가 여러 바위 위에 교회 4채를 세웠고, 그중 하나는 아직까지 남아 있다. 1388년에 아타나시오의 제자인 은자 이오아사프(세르비아의 왕자)가 메테오른을 확장했다. 16세기에는 16개의 수도원이 있었고, 모두 밧줄과 그물을 이용해 접근할 수 있었다. 현재는 대부분 비고, 4개의 수도원에만 수도회가 남아 있다. 1960년대에 도로가 나자 관광객이 몰리면서 수도처로서의 매력을 잃었고, 기존의 수사들은 아토스 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21) 라키는 터키의 전통술로 투명하지만 물을 타면 우윳빛으로 변한다. 그리스와 키프로스에서 마시는 우조와 거의 비슷하다.
22)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Santa Teresa de Jesús, 1515~1582)는 에스파냐 이발라에서 태어난 신학자이자 교회개혁가로 19세에 가르멜회 수도원에 입회한 이후 여러 번의 환시를 경험하며 자신의 소명을 깨달아 좀 더 엄격한 수도 생활을 추구하는 ‘맨발의 가르멜회’를 설립했다. 에스파냐 전역을 돌며 가르멜회 수도원의 개혁을 위해 노력했으나 1580년까지 완화파와 개혁파 간의 격심한 분쟁을 겪었다. 1579년에 교황 그레그리오 13세의 승인을 받아 맨발의 가르멜회는 가르멜회로부터 독립했다.
23) 십자가의 성 요한(San Juan de la Crus, 1542~1591)은 에스파냐 아빌라 근교에서 태어난 신학자이자 교회개혁가다. 1563년에 가르멜회 수도원에 입회하여 이듬해부터 4년간 살라마아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1567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더 엄격한 카르투지오회로 옮기고 싶었지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만류로 가르멜회 개혁운동에 전념해 1569년에 수사들을 위한 맨발의 가르멜회 수도원을 처음 설립했다. 수도회 개혁에 반대하는 수사들에게 납치돼 9개월간 감금되기도 하다가 1579년에 맨발의 가르멜회가 인정을 받자 바에사에 개혁 가르멜회 대학을 세우고 학장을 역임했다. 1590년에 가르멜회의 분쟁이 재현되자 이듬해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고 곧 병사했다.
24) 순명順命은 복음적 권고의 하나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희생하고 자유의지를 가지고 기쁨으로 명령에 따르는 덕을 뜻한다. 특히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은 교황과 소속 직권자에게 존경과 순명을 표시할 의무가 있다.
25)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과학자, 심리학자, 신학자인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은 인간의 모든 악의 뿌리가 ‘가만히 방 안에 앉아 있지 못하는 성정’이라고 말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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