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편력
내 인생의 본격적인 독서는 서른 살에 대학원에 진학한 뒤부터다. 보통 20대에 하는 개인적 삶—공부, 연애, 방황, 여행 따위—을 ‘학생 운동에 휩쓸려 빼앗겼다’(내가 선택했지만)는 피해의식과 분노가 있었던 나는, 30대에는 나 자신만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 물론, 여성인 나에게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어서, 그런 결심 자체가 필요 없는 것이었다. 즉 어차피 내가 개인적으로 산다고 해도 그것은 여성운동일 수밖에 없었지만, 하여간 나는 결심하고 또 결심했다. 사실은 이 역시, 귀가 얇은 나의 엉뚱한 책 읽기의 영향이 있다. 나는 공부를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고등학교 때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을 감명 깊게 읽은 탓이다. 대학원생 생활은 내게 대학생이 된 것 같은 설레임을 주었다. 지하철 첫차를 타고 조용한 학교 안 카페에서 아침 7시에 ‘모닝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폼을 잡는) 것이 꿈이었다.
주로 전공 책을 읽었지만 동료들과 세미나를 했다. 전공(여성학) 자체가 거의 방사적放射的이다 싶을 정도로 학제를 넘나들어서, 책 한 권을 읽으려면 다섯 권 정도를 같이 읽어야 이해할 수 있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여성학은 프로이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두 기둥으로 삼고 생물학, 문학, 인류학, 지리학, 역사학, 의학 등 망라하지 않는 분야가 없다. 실제로 서구 여성주의자들의 전공은 신학, 핵물리학, 정신분석, 영장류 동물학, 군사학 등 다양하다.
성격이 급한 데다가 자기만의 프레임(틀)이 생기자(?) 책을 빨리 읽을 수 있었다. 30대 몇 년간을 평균 10시간 정도 책을 읽었다. 그냥 도서관에서 살았다. 경험한 사람은 알겠지만 하루에 읽을 수 있는 책의 분량은 정해져 있지 않다. 책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하루동안 학위 논문은 20권, 단행본은 5권도 읽을 수 있다. 물론, 한 권으로 며칠을 끙끙대기도 한다. 책을 읽는 속도와 이해하는 속도는 관점, 시각, 인식론, 프레임, 방법론에 달려 있다. 책 자체도 영향을 끼치지만, 그것도 익숙함에 달린 문제이지 객관적인 속도는 없다.
책을 읽은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습득習得이고, 하나는 지도 그리기mapping이다. 전자는 말 그대로 책의 내용을 익히고 내용을 이해해서 필자의 주장을 취하는(take) 것이다. 별로 효율적이지 않다. 반면 후자는 책 내용을 익히는 데 초점이 있기보다는 읽고 있는 내용을 기존의 자기 지식에 배치(trans/form 혹은 re/make)하는 것이다. 습득은 객관적, 일방적, 수동적 작업인 반면에 배치는 주관적, 상호적, 갈등적이다. 자기만의 사유, 자기만의 인식에서 읽은 내용을 알맞은 곳에 놓으려면 책 내용 자체도 중요하지만 책의 위상과 저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려면 기본적으로 사회와 인간을 이해하는 자기 입장이 있어야 하고, 자기 입장이 전체 지식 체계에서 어떤 자리에 있는가, 그리고 또 지금 이 책은 그 자리의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를 파악해야 한다.
나는 여성주의 책을 포함해서 모든 책을 비판적으로 읽는다. 여기서 비판적이라 함은, 한계가 있다고 전제하고 읽는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읽는다고 해서 감동이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믿음이 아니라 상대화해서 해석해 가며 읽는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주의는 말년에 마르크스가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여러 방향으로 내파하고 파생했다. 푸코나 알튀세르가 ‘보충’한 마르크스주의가 있고, 정신분석이나 섹슈얼리티 이론으로 재해석한 빌헬름 라이히가 있으며, 마르크스주의와 협력하고 갈등하고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고 전유한 페미니즘 이론이 있고, ‘제3세계 이론’이나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은 탈식민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마르크스주의 인류학, 문예 이론, 과학사 등 마르크스주의의 위치와 형태는 다양하고 변화를 거듭한다. 물론, 이것도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이고 페미니즘 입장에서 보면 마르크스주의의 위상은 또 다르다. 공적 영역만을 사회로 한정한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면서 나온 급진주의radical 페미니즘에서 볼 때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토록 비판하는 자유주의와 ‘같은 처지’다. 근대성을 성찰할 때도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는 함께 비판대에 오른다. 한마디로, 독자적인singular 마르크스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물론 마르크스주의의 특징이 아니라 지식 일반의 특징이다.
책 속에 진리가 있다는 말은 역사 최대의 거짓말이다. 책 속엔 아무것도 없다. 저자의 노동이 있을 뿐이다. 굳이 말하자면, 사상에서 이데올로기(‘거짓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담론이 있다. 저자의 입장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것보다 저자와 갈등적against 태도를 취할 때 더 빨리, 더 쉽게,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같은 책을 한 번 읽은 사람이, 여러 번 읽은 사람보다 내용을 더 잘 파악하고 더 뛰어난 논쟁력을 갖는 경우도 이 때문이다. 이런 능력은 책 읽기는 물론 사고방식 훈련을 해야 키울 수 있다. 쉽게 말해, 늘 고민거리가 많고 잡념이 많고 관찰력이 풍부하고 문제의식이 많은 사람이 있다. 사실, 이런 사람은 공부, 사업, 사회운동 무엇을 해도 잘하는 유형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공부 개념은, 인생의 아주 짧은 시기(대개 10대 후반)에 갖추어야 할 특정 분야의 매우 협소한 능력을 가리킨다. 입시 개혁이란, 결국 공부 개념의 범주를 넓히는 것이 아닐까. 고3 때 성적으로 인생이 위계화되는 이 사회. 우리는 창피해해야 한다. 근대성, 합리성까진 기대하지도 않는다. 한국은 기본적으로 모태 차별 사회고, 그것을 ‘실력’의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학벌은 가장 저열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신분 사회이고 인종 사회다.
어쨌든 내가 30대에 지향한 책 읽기 방법은 책을 빨리, 정확히, 복잡하게, 쉽게 읽는 것이었다. 망상에 가까운 욕심이지만, 이는 요리와 비슷하다. 재료가 어떻게 섞이는가에 따라 영양가, 맛, 칼로리, 조리 시간이 달라진다. 책 읽기는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다. 당파성과 응용력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 데 필요한 태도는 왜 이 책을 읽는가에 대한 사회적 필요와 자기 탐구라는 정의감과 그 정의감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창의력이라고 생각한다. 창의력은 독서의 결과가 아니라 태도에 가깝다. 폴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전 3권)는 읽는 데 하루가 걸린다. 반면에 스피박이나 버틀러 책을 처음 읽을 때는 머리털이 빠지고 변색되고 욕이 나오면서 며칠이 걸린다. 그녀들의 책은 문장 하나에 참고 문헌subtext이 여러 개 전제되어 있다. 배경 지식이 없으면 독서가 불가능하다. 게다가 ‘악필’로 명성이 높다. “쉽게 읽히는 것은 속임수”라고 말하고 생각하게 하는 문장을 쓰는 것을 정치적 실천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본의 정신분석학자 도미야마 이치로의 한 문장, “(호미) 바바의 파농은 파농을 라캉으로 환원한 경우다.”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세 사람의 사상을 다 섭렵한 다음 이 세 명의 사상이 접합하고 갈등하는 지점을, 읽는 사람의 시점에서 찾아야 한다. 이처럼 한 문장이 한 쪽이 되기도 하고 한 권이 되기도 한다.
여성학gender studies이나 평화학peace studies은 알려진 대로 다(多, multi-), 간(間, inter-) 학제적이다. 기존 분과 학문의 경계를 의문시하고 학문 간 협력과 횡단을 추구한다. 소위 ‘통섭統攝’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영어의 ‘con/silience’를 번역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통섭의 원리에서 강조하는 친밀성(?)보다 이질적인 분야들 간의 충돌과 긴장,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새로운 정치학과 앎에 더 관심이 있어서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하지는 않는다. 나는 스스로를 지식인으로 정체화하거나 특정 분야의 전공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자기 탐구와 지적인 호기심이 많은, 반反전공주의 입장을 지닌 시민이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