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이 책에 수록된 논의들은 내가 농민, 계급투쟁, 저항, 개발프로젝트, 동남아시아 산악지역의 최빈층 사람들에 관한 글을 쓸 때 오랫동안 속에 품어왔던 것들이다. 나는 내가 30여 년간 세미나 토론 과정에서 뭔가를 거듭 반복해서 말해왔고, 그것에 관해 거듭 글을 써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이건 꼭 아나키스트가 주장함직한 얘기처럼 들리는군’이라고 생각했다.
기하학에서 두 점은 선을 만든다. 하지만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점들마저 같은 선상에 위치해 있다면 그런 식의 일치 현상은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기 어렵다. 나는 그런 일치에 깊은 인상을 받고는 이제 아나키즘의 고전과 운동사에 관한 책들을 읽을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스스로 견문을 넓히고 나와 아나키즘과의 관련성을 밝혀보자는 뜻에서 이에 관해 폭넓게 다루는 학부 강좌를 개설했다. 그 강좌가 끝나고 나서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뒷전으로 미뤄두다 한꺼번에 모아서 정리한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아나키즘의 국가 비판에 대한 내 관심은 환멸, 그리고 혁명적 변화에 대한 간절한 소망에서 비롯되었다. 1960년대 북아메리카에서 정치의식에 눈뜬 이들은 이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나와 다른 많은 이들에게 1960년대는 민족해방을 지향하는 농민전쟁과의 로맨스라고 부를 만한 것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였다. 한동안 나는 유토피아가 가능해 보였던 시대 조류에 완전히 휩쓸려 들었다. 나는 아메드 세쿠 투레의 기니에서 시행된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 가나 대통령 콰메 은크르마의 범아프리카주의 제창, 인도네시아에서 행해진 초기 선거들, 내가 1년을 지낸 적이 있었던 버마의 독립과 최초의 선거, 공산혁명을 겪은 중국에서의 토지개혁, 인도 전체에서 시행된 총선거 등을 외경심 어린 마음으로 지켜봤다. 지금 돌이켜보면 순진한 마음으로 그랬던 것이지만.
내가 겪은 환멸은 역사 탐구와 그 무렵 일어난 사건들이라는 두 가지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성공으로 끝난 모든 주요 혁명은 혁명에 의해서 전복된 국가보다 더 강력한 국가, 애초에 자기네가 섬기려고 했던 사람들에게서 더 많은 자원을 수탈하고 그들을 더 강하게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국가를 만들어내는 결과를 빚어냈다. 나는 뒤늦게야 그런 진실을 깨달았다.
마르크스의 아나키즘 비판, 특히 레닌의 비판은 선견지명에서 나온 것만 같았다. 프랑스 대혁명은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이어졌고, 거기서 다시 때 이르게 출세한 호전적인 나폴레옹이 지배하는 국가로 이어졌다. 러시아의 시월혁명은 레닌이 주창한 전위정당의 독재로 이어졌으며, 다시 크론슌타트에서 폭동을 일으킨 수병들과 노동자들(바로 프롤레타리아 계급 사람들!)에 대한 강제진압, 집단농장, 강제노동수용소로 이어졌다. 앙시앵 레짐(구舊체제, 특히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전의 정치·사회 조직을 뜻함)이 봉건적 불평등을 잔혹한 수단으로 통제 관리했다고는 하지만, 여러 혁명의 기록은 그와 비슷한 암울한 느낌을 자아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혁명의 성공에 꼭 필요한 에너지와 용기를 제공해준 인민대중의 열망은 거의 예외 없이 배신당했다.
현대의 혁명들이 세계역사상 최대 규모의 계급, 곧 농민을 위한 것이라고 전제할 때 그 무렵 일어난 사건들 역시 과거의 사례들에 못지않게 심난해 보였다. 1954년에 체결된 제네바 협정에 따라서 베트남 영토의 반에 해당하는 북부 베트남을 지배하게 된 베트민(베트남 독립동맹. 1941년에 베트남에서 반反프랑스,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호치민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단체.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수립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은 농민 급진주의의 역사적 온상이었던 지역들의 소농과 소지주들의 민중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중국에서 대약진 운동 기간 동안 마오의 비판자들이 입을 다문 상태에서 마오는 수많은 농민을 대규모 농촌 코뮌(농촌인민공사)과 거대한 공동식당(여성들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켜 생산노동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만들었다)으로 몰아넣었지만 그 운동은 파국적인 결말을 맞고 있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학자들과 통계전문가들은 1958년에서 1962년 사이에 희생된 사람들의 숫자를 둘러싸고 아직까지도 논쟁을 벌이고 있지만 아무리 적게 잡아도 3천5백만 명을 하회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대약진운동 때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고 있는 동안, 크메르 루주가 지배하던 캄푸치아(현재의 캄보디아)에서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거나 처형당했다는 섬뜩한 소식은 흉악하게 일그러진 농민혁명의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굳히는 역할을 했다.
서구권, 빈곤국들에게 그 국가들이 시행한 냉전 정책이 ‘현존 사회주의’의 건설적인 대안을 제공해준 것 같지는 않다. 혹심한 불평등을 폭압적으로 관리해온 정권과 구가들은 공산주의와의 투쟁에서 동맹자들로 환영받았다. 이 시기를 잘 알고 있는 이들은 이 시기가 개발경제학이라는 새 분야와 개발 연구의 초창기 파고波高를 대표하던 때이기도 했다는 점을 떠올릴 것이다.
혁명적 엘리트들이 집산주의의 흐름 속에서 광범위한 사회공학 프로젝트를 구상했다면, 개발 전문가들은 계층적으로 설계된 재산 형태를 축으로 해서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는 자기네의 능력을 혁명적 엘리트들에 못지않게 깊이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물질적 인프라에 투자하고, 환금성 작물재배를 권장하고, 토지시장을 활성화시키고, 국가 권력을 전반적으로 강화하고 불평등을 증폭시키는 방식을 통해서 자기네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자유세계’, 그중에서도 특히 글로벌 사우스(남미와 아프리카, 남아시아의 개발도상국)에서의 자유세계는 자본주의의 불평등에 대한 사회주의의 비판, 그리고 이러한 불평등을 보장해주는 국가에 대한 공산주의 및 아나키즘의 비판에 취약했다.
이런 이중적 환멸감은 “사회주의 없는 자유는 특권과 불의를 빚어내고, 자유 없는 사회주의는 예속과 잔혹함을 빚어낸다”라는 미하일 바쿠닌Mikhail Bakunin의 금언이 맞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 같았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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