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기술의 철학, 적정기술의 의미
홍성욱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 과학기술학)
이주영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석사과정)
적정기술의 기원과 흐름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가장 절박하게 필요한 기술은 무엇일까? 핵융합 기술? 수명연장 기술? 마인드 컨트롤 기술? 스마트 자동차 기술? 나노 로봇 기술?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에 따라, 필요에 따라 제각각일 것이다.
현대 공학자들의 눈부신 성과는 21세기의 원동력 중 하나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일반인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새롭고 창조적인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상생활에서부터 전문적인 작업에 이르기까지 기술은 무시할 수 없는 사회의 기반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인간의 편리와 필요를 만족스럽게 충족시켜 주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기술로 인한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기술은 자연재해에 맞먹는, 아니 어떤 경우에는 그보다 더 심각한 위험의 원천이 된다. 자연재해를 막기 위해 도입한 기술이 새로운 재앙을 가지고 오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렇다면 이처럼 사회 전반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기술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새로운 태도와 접근은 무엇일까?
20세기까지 기술은 인류가 자연을 비롯한 외부 대상을 이해하고 정복하는 수단이었다. 기술은 그것의 손이 닿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인간에게 유용한 대상으로 바꾸는, 미다스Midas의 손 같은 것이었다. 그 과정은 효율로, 그 결과는 대량생산으로 특징지어졌다.
그러나 기술의 결과가 항상 인간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자동화 기술과 컴퓨터 기술은 인간을 직장에서 쫓아내기도 했고, 정보혁명을 불러 온 IT 기술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했으며, 해충을 박멸하기 위해 만든 살충제의 화학성분은 인간의 몸에 축적되어 심각한 질병을 일으켰다. 기후변화 역시 산업혁명이 시작된 이래 기술이 야기한 가장 심각한 문제들 중 하나다. 기술의 개발과 발전에 엄격한 제한을 가하거나 지금의 발전 속도를 현저하게 줄이지 않는 한, 이 문제들에 대처할 뾰족한 방안은 적어도 현재로선 존재하지 않는다.
기술 문제에 대한 대처는 작은 공동체에서 글로벌한 차원의 국제협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한 중요한 조건은 기술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 관념을 바꾸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이 자동적으로 우리 삶의 풍요와 안녕을 가져올 것이라는 낙관론을 20세기의 유물로 던져 버리고, 기술에 대해 더 성찰적이고 더 현실적이며 더 사려 깊은 인식을 만들어 공유해야 하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은 우리에게 주는 것이 있지만 그만큼 앗아가는 것도 있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지만 동시에 닫아 버리기도 하며, 예측한 결과를 낳지만 때로는 엉뚱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런 격변의 시대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기술적 태도는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적정기술의 원조는 인도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였던 마하트마 간디다. 그는 영국이 인도에 이식한 대량생산 기술들이 인도의 빈곤을 해결하기는커녕 인도인들을 기술의 특혜를 받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하고 실업 상태에 머무르는 대다수 민중으로 나누고, 이러한 구분 속에서 빈곤을 영속화한다고 비판했다. “세계 빈곤의 해결은 대량생산mass production 기술이 아니라 대중에 의한 생산production by the masses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유명한 문구는 그의 철학을 한눈에 드러낸다. 그는 ‘차르카Charkha’라는 손물레를 직접 돌려서 실을 자아 옷을 해 입는 운동을 펼쳤는데, 이는 제국의 첨단기술이 아닌 손쉬운 인도의 전통 기술에 근거해서 대중이 직접 생산에 참여하는 적정기술운동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적정기술의 원조로 꼽히는 마하트마 간디와 인도의 손물레 차르카 |
간디는 월든 호숫가에서 2년간 채식을 하면서 자연과 교감했던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빗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무소유의 삶의 철학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간디의 운동은 인도를 넘어 전 세계에 영향을 끼쳤는데, 그의 영향을 받아서 적정기술 운동을 펼친 사람이 바로 독일 출신의 영국 경제학자 슈마허Ernst Friedrich Schumacher였다.
슈마허는 케인즈가 존경하던 주류 경제학자였고, 케인즈와 함께 오랫동안 영국 재무성을 위해 일했다. 그러다 1955년에 UN사절단의 일원으로 버마(현 미얀마)를 방문했고, 당시 버마 수상이던 우 누U Nu의 자문을 맡아서 버마의 경제 상황을 공부했다. 이 과정에서 간디를 알게 됐으며 제3세계의 빈곤 문제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서양의 경제학이 제3세계의 빈곤 문제에 관심도 없고 이를 해결할 수도 없다고 결론지었다. 빈곤 문제는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인간의 문제이며, 보편적인 해법이 아니라 특정한 환경 속에서 특정한 시공간에 맞는 특수한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제3세계를 위해 찾은 해법은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이었다. 1965년, 그는 영국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중간기술개발모임ITDG, Intermediate Technology Development Group>을 만들어 중간기술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중간기술은 지역사회의 기술과 물질적 자원 그리고 자금을 활용하며, 지역의 역사나 문화와 양립 가능하면서 그 지역의 바람과 필요를 충족하는 기술을 의미했다.
슈마허는 1973년에 출간된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도 중간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이 책은 오일쇼크와 맞물리면서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중간기술운동에 참여하던 사람들은 중간기술이라는 표현이 첨단기술이 아닌 어정쩡한 2류 기술 같은 뉘앙스를 준다는 이유에서 이 개념 대신 새로운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적정기술’이었다.
적정기술은 일자리를 창출하며, 지역의 재원을 사용하고, 재생 가능한 에너지원을 이용하며, 값싸고, 조작이 간단하며, 기존의 인프라와 부합하면서 자원의 낭비를 지양하는 기술이다. 적정기술은 기술을 우위에 두지 않고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을 우위에 둔다. 이는 기술과 지역의 환경적, 문화적, 역사적 요소들 사이에 균형 혹은 적합도fitness를 추구한다는 의미이다.
대량생산과 자동화 기술이 실업과 인간소외를 낳는다는 비판이 고조되던 1960~70년대에 적정기술운동은 전 세계를 휩쓸었다. 미국에서는 정부 조직 내에 적정기술센터가 만들어졌고, 간디의 영향을 직접 받은 인도에서도 다양한 적정기술 조직이 만들어졌으며, 중국은 문화혁명 시기에 국가 정책으로 도시에는 자본집중적인 대규모 공장을 세우지만 농촌에는 적정기술에 근거한 소규모 공업을 발전시킨다는 취지의 ‘두 발로 걷기 운동Walking on Two Legs, 兩條腿走路’을 펼쳤다. 적정기술운동이 최고조였을 때에는 전 세계에 이를 담당하는 조직이 1천 개가 넘을 정도였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에 정점에 이르렀던 적정기술운동은 이후 급속하게 쇠퇴했다. 여러 가지 비판들이 등장했는데, 적정기술이 제3세계의 빈곤을 극복하는 대안이 될 수 없으며 실제로 해 보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매우 비효율적이라는 게 비판의 요지였다.
역설적으로 적정기술은 선진국이 제3세계 국가들을 빈곤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 만든 제국주의적 음모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등장했다. 경제학자들은 대규모 공업시설을 갖춤으로써 빈곤에서 탈출한 한국과 대만 같은 신흥공업국가의 사례가 적정기술의 개념적 오류를 잘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판 속에서 적정기술은 결국 주류 엔지니어 사회에 침투하는 데 실패했다. 적정기술운동 조직은 와해되거나 이름과 목표를 바꾸어서 근근이 그 명맥을 이어 나갔다.
적정기술의 이념은 1980년대에 조금 다른 형태로 표출되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지속가능한 개발Sustainable Development”이라는 슬로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환경과 개발에 관한 세계위원회WCED>가 1987년에 『우리의 미래Our Common Future』라는 책에서 주창한 ‘지속가능한 개발’은 산업혁명 이후에 유지되던 기하급수적인 발전 양상을 일차함수적인linear 개발로 바꾸는 것으로, 환경보호와 경제성장이 양립 가능할 뿐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관계로 재설정되었다. 또 발전만이 아니라 평등, 가난, 권력의 문제가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1992년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열린 지구정상회담은 지속가능한 개발을 기본 원칙으로 한 ‘리우 선언Rio declaration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을 채택했는데, 여기에서도 제3세계의 빈곤 문제에 대한 선진국의 책임이 강조되었다. 전 지구적 차원의 이산화탄소 감축을 의결한 1997년의 ‘교토 의정서Kyoto Protocol’는 “선진국은 개발도상국의 환경보호와 경제개발을 위해서 적정기술을 이전해야 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는데, 이는 지속가능한 개발의 틀 속에서 적정기술이 결국 ‘지속가능한 기술sustainable technology’의 한 가지 형태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준다.
지속가능한 기술이라는 개념 속에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던 적정기술이 2000년 이후에 다시 부활해서 제2의 르네상스를 맞고 있는 데에는 ‘디자인 혁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0~70년대 적정기술운동은 “누구를 위해 적정한 기술인가” 또는 “무엇에 적정한 기술인가”라는 문제에 천착했지만 “어떻게”라는 문제에는 상대적으로 주의를 덜 기울였다.
1981년에 IDEInternational Development Enterprises를 설립한 폴 폴락Paul Polak은 “어떻게”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디자이너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2007년에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展Design for the Other 90%>을 시작했다. 이 전시는 소형화와 저렴한 가격을 지향하며 개발된 ‘소외된 계층을 위한 기술’이 새로운 고객층을 만들고 확장하려는 기업의 목표와 모순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면서, 적정기술이 NGO뿐만 아니라 기업을 위해서도 새로운 활로를 제공해 준다는 점을 강조했다.
폴 폴락이 2007년에 시작한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展>. 사진 속 제품은 오염된 물을 정수해 주는 '라이프 스트로' |
마틴 피셔Martin Fisher와 닉 문Nick Moon의 ‘킥스타트KickStart’*는 폴락의 주장이 실제로도 실현 가능함을 ‘머니메이커Money Maker’**를 통해 입증했다. 이들은 제3세계 사람들을 빨리, 효과적으로, 지속적으로 가난에서 탈출시키는 것을 목표로 잠재성 있는 소규모 비즈니스를 발굴하고 신기술-비즈니스 묶음을 개발하여, 지역의 소규모 사업자에게 신기술을 판매하는 사업의 중개자 역할을 하고 있다.
* 1991년에 '어프로텍ApproTec'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비영리 사회적기업. 최근에 '킥스타트'로 이름이 바뀌었다.
** 모터펌프를 살 수 없는 가난한 아프리카 농민들의 소득 증대를 위해 개발된 간이 펌프. 모터 대신 두 발로 밟아서 작동시킨다. 킥스타트는 이 제품을 무상보급하지 않고 현지 기업을 통해 20만 개 가까이 판매하며 성공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창조했다.
킥스타트에서 아프리카 농민들을 위해 개발한 간이 펌프 '머니메이커' |
적정기술은 선진국의 공학교육과 연계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MIT에서 개설한 D-Lab 수업에서는 교수가 학생들을 데리고 제3세계 국가를 방문해 현지에서 필요한 기술을 함께 제작하는 실습을 진행하고 있는데, 현재 MIT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수업 중 하나로 꼽힌다. 국내에서 적정기술운동을 하고 있는 <나눔과기술> 같은 조직은 한동대학교, 한밭대학교와 연계해서 공과대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적정기술 디자인 경진대회를 개최하는데 이 역시 학생들의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수도권 대학에도 확산될 전망이다.
21세기 적정기술은 꼭 제3세계만을 위한 것일 필요는 없다. 예컨대 기후변화 위기에 지혜롭게 대처하려면 선진국도 친환경적이고, 에너지 사용이 최소화되고, 설비와 사용이 쉬운 기술을 필수적으로 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3세계를 위해서 개발한 적정기술이 선진국에서 다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고디사Godisa Technologies에서 만든 태양전지 충전기는 제3세계에 저가로 보급된 보청기의 배터리를 충전하기 위해 개발되었지만, 사용이 간편하면서도 반영구적이라는 특성 때문에 남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를 넘어 미국, 캐나다, 유럽 등지에도 공급되고 있다. OLPC라는 NGO에서 아프리카 학생들을 위해 제작, 공급했던 100달러짜리 노트북은 지금 우리가 널리 사용하는 넷북이나 태블릿PC의 기원으로 꼽히며, 프리플레이 에너지Freeplay Energy에서 만든 태양에너지 전등은 다른 에너지원이 불필요하다는 이유에서 선진국에서는 레저용으로, 일본에서는 재난 대비용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꼭 이런 구체적 기술이 아니더라도 요즘은 기술을 개발하는 많은 기업가와 엔지니어들이 이 제품은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 기술은 지속가능한가, 이 기술을 누가 사용하며 누가 유지·보수하는가라는 문제를 생각하는데, 이런 태도는 다름 아닌 적정기술운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술과 인간 ; 기술의 사회적 구성
‘진보의 세기’를 기념한 1933년 시카고 박람회의 모토는 “과학은 발견하고, 산업은 응용하며, 인간은 순응한다Science Finds, Industry Applies, Man Conforms"것이었다. 기술 진보에 대한 굳건한 믿음, 그리고 기술에 인간을 맞췄을 때 인간과 사회의 발전이 가능하리라는 낙관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생각이 여실히 드러나는 표현이다.
이렇게 기술을 중심에 두고 인간을 거기에 맞추려는 기술을 기술철학자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는 ‘독재적 기술’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민주적 기술’을 제창했다. 독재적 기술이 권력의 집중과 기술의 엘리트화를 지향하는 기술이라면, 민주적 기술은 권력의 분산과 기술의 민주화를 도모하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기술이 가치중립적인 산물이 아니라 사회적 특성을 반영해서 구성되며, 이렇게 구성된 기술이 다시 사회를 형성한다는 생각은 과학과 기술에 대한 인문사회학적 학제 간 연구를 추구하는 과학기술학STS,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의 핵심과도 맞닿아 있다. 과학과 기술을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과학기술학은 과학과 기술이 특정한 환경에서 어떻게 발전하고 작동하며 사회와 영향을 주고받는지 분석한다. 특히 과학기술학의 한 조류로서 기술이 구체적인 사회 속에서 어떻게 발전해 나가는지를 알아보고자 하는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SCOT, Social Construction of Technology’은 적정기술과 직접적으로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기술사회학자인 트레버 핀치Trevor J. Pinch와 위비 바이커Wiebe E. Bijker는 1987년에 「자전거의 변천 과정에 대한 사회구성주의적 해석」이라는 글을 통해, 해리 콜린스Harry Collins*의 ‘상대주의의 경험적 프로그램EPOR’의 세 가지 단계**를 기술의 영역에 적용시키는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을 주창했다. 이들에 따르면 세상에 자전거가 맨 처음 등장했을 때에는 자전거와 관련된 다양한 논쟁이 있었다. 지금은 자전거의 바퀴로 공기 타이어가 널리 쓰이지만 189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진동을 줄여 안정성을 확보해 주긴 하지만 자전거의 미관을 망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공기 타이어가 경주용 자전거에 사용되고 매우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음이 ‘증명’되자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안정성을 부여한다는 기존의 의미 대신 속도를 높인다는 새로운 의미가 공기 타이어에 부여되었고, 모든 논쟁은 종결되었다.
* 세계적인 지식사회학자로서 1990년대 과학자들과 인문사회학자들 사이의 치열한 논쟁인 '과학 전쟁'에서 인문사회학 진영을 대표했던 인물. 과학 지식이 과학계의 내적 질서에 따라 생산되는 '순수한 지식'이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그때그때 새롭게 구성되는 '구성적 지식'이라고 주장했다.
** EPOR은 과학지식이 과학자들 간의 사회적 협상 결과에 의해 결정된다는 '과학지식의 사회적 구성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며, 다음과 같은 3단계로 이루어진다. (1) 동일한 실험 결과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해석적 유연성' 입증 (2) 합의에 의해 논쟁이 종결되는 메커니즘 분석 (3) 종결 메커니즘과 거시적인 사회문화적 구조와의 관계 규명. 보다 넓은 사회구조와 연결.
*** 1790년에 프랑스에서 최초로 고안된 자전거엔 나무 바퀴가 달려 있었다. 고무 타이어는 1886년에 처음 등장했다.
마지막으로 핀치와 바이커는 자전거에 대한 논쟁이 남성과 여성, 노인, 사이클리스트 등 다양한 사회집단들 사이에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받았음을 설명했다. 이처럼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은 다양한 사건 및 집단들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하나의 인공물이 구체적인 모습을 획득한다고 주장한다.
적정기술자들 역시 특정 기술을 개발함에 있어 과연 그 기술을 위한 재료를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가, 사용자들이 그 기술을 이해하고 있는가, 기술에 문제가 생겼을 때 사용자들이 고치고 관리할 수 있는가, 환경의 변화에 따라 기술도 쉽게 변할 수 있는가 등을 질문한다. 이 질문들은 “누구에게, 무엇에, 그리고 어떻게 적정한 기술인가”라는 문제를 다루게 되고, 결국 적정기술은 특정한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그 적정성을 부여받는다.
과학기술학의 관점에서 적정기술을 사례로 다룬 대표적인 예시로는 마리앤 드 라트Marianne de Laet와 애니머리 몰Annemarie Mol의 ‘짐바브웨 부쉬 펌프’에 대한 연구가 있다. 이 펌프가 적정기술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펌프가 지닌 유동성 때문이었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짐바브웨 부쉬 펌프는 1933년에 처음 개발된 것으로, 지금까지도 변형이 거듭되며 널리 쓰이고 있다. 가장 최신의 형태인 B형 펌프는 피터 모건Peter Morgan 박사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물이 나오는 머리 부분과 펌프를 지지하는 부분 그리고 레버로 간단하게 구성되어 있지만 지하 100m에서까지 물을 끌어올릴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졌다.
드 라트와 몰에 따르면 부쉬 펌프는 크게 ‘정체성’과 ‘성과에 대한 평가’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유동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펌프 역할 구획의 모호한 경계가 이 펌프에 유동성을 부여한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펌프는 하나의 인공물에 불과하지만, 제대로 물을 퍼 올리기 위해서 펌프는 하나의 수력 시스템이 되어야 한다. 또한 이 펌프를 사용하면 현저하게 대장균을 줄이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즉, 부쉬 펌프는 물을 끌어올리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역학체제로도 작용하고, 심지어는 건강을 증진시키는 역할까지 맡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펌프를 설치하려면 사회적 집단이 펌프와 하나 되어 일을 해야만 한다. 펌프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우물이 필요한데 그건 한두 사람의 힘으로는 팔 수 없고,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파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짐바브웨 정부는 부쉬 펌프가 굉장히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파악하고 아예 이 펌프를 국가적인 수도 기간시설과 연결시키기로 결정했다. 결국 부쉬 펌프는 식수를 공급하고 건강에 도움을 주는 기구를 넘어 마을들을 움직이고, 심지어는 짐바브웨라는 나라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는 기반시설로서 ‘짐바브웨’ 부쉬 펌프라는 정체성까지 얻게 된 것이다. 짐바브웨의 부쉬 펌프는 이렇듯 다양한 정체성 하에서, 그 기술을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목적에 알맞은 역할을 그때그때 담당하며 성공적인 적정기술로 작동하고 있다.
부쉬 펌프로 대표되는 적정기술은 누가 그 기술을 사용하는지에 따라 정체성과 평가가 새롭게 구성된다. 인간과 사회 그리고 주변의 환경에 따라 기술이 구성되는 모습을 적정기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적정기술의 함의는 제3세계의 기술을 넘어 모든 기술에 적용될 수 있다. 이 글의 첫머리에서도 강조했듯이, 21세기의 인류는 거대기술이 지닌 불확실성과 항상 바람직하지만은 않은 기술의 영향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기술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은 기술 발전 과정에서 인간의 역할을 한층 더 부각시킨다. 기술에 대한 바람직한 접근은 인간을 향한 깊은 고찰에서부터 시작된다.
적정기술의 정신과 실천은 이제 인간이 기술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인간에 맞춰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기술중심주의가 아닌 인간중심주의! 인간과 환경 모두를 위한 기술! 바로 이것이 21세기의 적정기술, 나아가 21세기의 기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난 세기의 낡은 슬로건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인간이 제안하고, 과학은 탐구하며, 기술은 순응한다.”
(People Propose, Science Studies, Technology Confor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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