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제국주의의 유산
19세기 유럽 제국주의의 역사는 여전히 많은 모순을 안고 있는데, 이는 과학 기술의 도움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순들 중의 하나는 19세기 중반 영국의 영토 확장이다. 세계적 강대국인 영국이 더 이상 제국의 책무를 원하지 않는다면서 “다른 데 정신이 팔린 상태로”* 마지못해 영토를 차지한 일이다. 이 일이 정말 필드하우스의 말대로 “식민지라는 꼬리에 끌려 다니는 식민모국이라는 개”라고 할 수 있는가? 이보다 더 적절한 비유는 맥그리거 레어드가 『스팩테이터Spectator』에 사용한 필명으로 머리가 많이 달린 개를 뜻하는 케르베로스Cerberus였다.
* 영국 역사가 J. R, Seely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한 강의를 담은 『The Expansion of England』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제국 건설의 추진력은 단지 하나의 기원起源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제국의 전초 기지들―그 대부분이 콜카타와 봄베이에 있었다―에는 모험을 좋아하고 어찌하든지 땅을 얻고자 하는 의욕적인 제국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정복의 도구를 제조할 산업이 없었다. 그들의 야망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 수만 있었다면, 그들은 북아메리카의 13개 식민지의 정착민들처럼 자신들의 힘으로 정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버마, 중국, 중동, 그리고 아프리카에 맞서기 위해 영국의 기술을 필요로 했다.
또 영국 본토의 정치가들은 때때로 이들을 돕는 것을 꺼렸는데, 이집트 점령을 오래 지연한 것이 그 하나의 예가 된다. 그러나 제국의 도구를 만든 사람들―피콕, 레어드 가문, 무기 제작자들 같이―은 주변부의 제국주의자들이 요구하던 장비를 제국에 제공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2차 제국주의로, 실제 일이 이루어진 뒤에 런던의 승인을 받았던 영국령 인도의 확장과 같은 것이다.
19세기 중반의 제국주의는 무엇보다도 영국의 촉수가 인도에서 버마, 중국, 말레이 반도, 아프가니스탄,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홍해로 뻗어나간 것이다. 영토 면에서는 이보다도 훨씬 더 인상적으로 신제국주의를 표출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19세기 말의 몇십 년 동안 아프리카를 서로 가지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분할이 이윤 획득의 측면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역사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이런 점은 과학 기술의 도움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발명품 하나하나를 기술과 당시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비추어 보면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기술 혁신의 내적인 논리에 따라 설명하는 방식 때문에 시간적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패턴을 보지 못해서는 안 된다. 어느 시대에나 기술의 진보는 있었지만 아프리카 분할에 참여한 제국주의자들에게 유용했던 혁신 기술들은 1860년에서 1880년의 20년 동안에 특히 많이 나타나 그 첫 효과를 발휘했다. 바로 이 20년은 키니네 예방법으로 아프리카가 유럽인들에게 안전한 곳이 되고, 제국의 변경에 주둔하던 군인들 사이에서는 속사의 후장식 총이 전장식 총을 대체하던 때였고, 복식 기관, 수에즈 운하, 해저 케이블로 인해 증기선이 정부 보조금을 받는 우편물 루트만이 아니라 원양의 보통 화물 사업에서도 범선에 대해 경쟁력을 갖추게 된 기간이었다. 1880년에 새로운 땅을 정복하기 위해 떠났던 유럽인들은 그들보다 20년 먼저 떠났던 사람들보다 자연에 대해서 또 자신들이 마주치는 사람들에 대해서 훨씬 우세한 지배력을 가지게 되었고, 더 안전하고 편하게 임무를 달성할 수 있었다.
19세기 제국의 진로에 영향을 끼친 발명품들 중에서 절대적인 것은 아주 적은 수였다. 키니네 예방법이 가장 좋은 예로, 많은 유럽인들은 키니네 예방법이 없었다면 아프리카에 위험을 감수하면서 가지 않았을 것이다. 프랑스인들이 압델 카데르와 싸울 때 사용했던 전장식 총은 다른 비서구인들도 패배시킬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어떤 유럽 국가도 프랑스인들이 알제리를 위해 희생했던 것만큼 버마. 수단, 또는 콩고를 위해서 희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컴퓨터, 제트 비행기, 위성, 무기 시스템 같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강대국 정부만 연구 개발비를 댈 수 있고, 또 일반적으로도 강대국 정부들만 적극적으로 연구 개발하려는 주요 기술 혁신에 익숙해 있다. 19세기 유럽 국가의 정부들은 제국주의 외에도 신경 써야 할 다른 문제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산업화, 사회 갈등, 국제적 긴장, 군사 준비태세, 그리고 예산의 균형을 위한 노력 같은 모든 문제들이었다. 영국, 프랑스, 벨기에, 그리고 독일의 지배 집단 내부에서는 식민지가 필요한가와 제국주의의 비용에 대한 뜨거운 논쟁이 있었다.
후장식 총, 기관총, 증기보트, 증기선, 키니네 예방법과 다른 기술 혁신의 결과물들은 침투, 정복, 새 영토를 개발하는 데 드는 비용을 재정적인 면과 인간의 조건, 모두에서 낮추어준 것이다. 이 기술들 때문에 제국주의의 비용 효과가 커져서 정부만이 아니라 작은 집단들도 제국주의에서 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봄베이 관구는 홍해 루트를 열었고, 왕립 니제르 회사는 소코토의 칼리프령을 정복했다. 심지어 맥그리거 레어드, 윌리엄 매키넌, 헨리 스탠리, 세실 로즈 같은 개인조차 문제를 일으켰고, 나중에 제국의 일부가 되는 방대한 지역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19세기에 새로운 기술들이 나타나 제국주의의 비용이 적게 들었기 때문에 유럽인들과 유럽의 정부들이 제국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국가들은 제국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도 역사가들이 강조해온 정치, 외교, 기업적 동기만큼이나 아프리카의 분할에서 중요한 요소가 아니겠는가.
이 모든 것은 더 깊은 의문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 기술 혁신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으며, 제국주의자들에게 쓸모 있는 것으로 밝혀진 것을 왜 실제로 적용하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19세기의 기술 혁신은 언제나 산업혁명이라는 맥락에서 설명이 된다. 예를 들어 철제선박을 건조하게 된 것은 엔지니어링의 모든 영역에서 철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하면서 가능하게 된 것이고, 해저 케이블을 놓게 된 것은 기업이 원하고 전기 산업이 발전했기 때문으로 설명을 한다. 그러나 특정한 새로운 기술의 발명과 그에 따른 물품 제조는 전체 산업화 과정이라는 맥락에서 설명을 할 수 있고, 또 분명히 그렇게 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기술들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실제로 적용한 것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새로운 기술의 확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서양인들과 비서구인들 사이의 정보의 흐름을 고려해야만 한다.
아프리카의 어떤 지역에서는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낸 “토킹 드럼talking drums”*을 이용해서 소통할 수 있다. 유럽인들은 이것을 부풀려서 거대한 신화로 만들고, 아프리카인들은 밤에 북의 진동을 이용해서 대륙을 가로질러 서로에게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물론 이 신화는 서양인들이 장거리 통신에 얼마나 집착해 있었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19세기의 아프리카인들과 아시아인들은 서로 고립되어 있었고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있었다. 아편전쟁 이전 중국의 조정은 광저우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틀린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영국, 버마, 나이지리아에서 일어나는 불길한 개발을 모르고 있었다. 니제르 강 주변에 살고 있던 사람들도 그 강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고 있었다. 스탠리는 콩고에서 화기나 백인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났다. 아프리카 전역에서 전사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서만 배웠고, 이웃의 경험을 통해서는 배울 수 없었다.
* 우리나라 장구처럼 생긴 북으로, 주로 서부 아프리카에서 사용되었다. 연주자가 독특한 북채를 이용해서 사람들이 내는 소리와 비슷한 높낮이와 리듬이 있는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뒤에도 나오듯이 그 효과가 과장되어 있다고 한다.
물론 아프리카인들이나 아시아인들이 새로운 기술을 채택한 경우들이 분명히 있기는 하다. 인도의 토호土豪들은 유럽인들을 고용해서 병력을 훈련시켰다. 에티오피아의 베즈비즈 카사는 영국군 병장에게 캐논포를 만들게 했고, 사모리 뚜레는 프랑스에서 총포술을 배워오도록 대장장이를 보내기도 했다. 메흐메트 알리는 나라를 근대화하려는 속성 프로그램을 시행하면서 자신의 주변에 유럽인 엔지니어들과 관리를 두었다. 그러나 이런 시도들은 그 자체가 매우 드문 일들이었고, 대부분 불충분했다는 점이다. 19세기에 서양의 기술 발전을 따라갈 수 있었던 나라는 일본뿐이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서양인들은―유럽인들이든 다른 대륙에 정착한 유럽인들의 후손들이든― 기술적인 것만이 아니라 다른 면에 있어서도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매우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아프리카에 있던 서양 의사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것을 프랑스와 영국에서 발표했으며, 미국의 대포 제작자들은 자신들의 제품을 런던에 전시했다. 영국 전문가들은 대포 제조 기술을 배우러 미국까지 갔고, 울즐리 장군은 제안을 하기 위해 미국의 발명가 히람 맥심을 방문했다. 맥그리거 레어드는 니제르 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듣고 고무되어 새로운 종류의 배 만들기를 시험하게 되었다. 네덜란드와 영국 식물학자들은 아시아에서 기를 식물을 얻기 위해 남아메리카까지 갔고, 인도네시아에 있던 서양 과학자들은 세계의 독자들을 위해 프랑스어와 독일어로 논문을 발표했다. 가장 최신형 라이플은 각국에서 모방되어 시험을 위해 식민지로 보내졌다. 우편과 전신에 의해 전 세계의 산물産物, 가격, 상품의 양에 대한 최신 정보가 전 세계로부터 유럽의 금융 중심지로 들어가기도 하고, 소식이 전해기도 했다. 그리고 주요 신문―특히 런던의 『타임스』―은 해외에 특파원을 보내 먼 땅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자세한 기사를 실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서양의 사람들은 가장 최근의 뉴스에 굶주렸으며 유용한 기술 혁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것이 철이든 강을 오르내리는 증기선이든 키니네 예방법이든 기관총이든 복식 기관이든 한 곳에서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그 존재가 다른 곳들에 빠르게 알려지고 실제로도 이용되었다.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토착민들이 자신들의 이웃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 유럽인들이 다른 대륙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더 많았다. 이것이 유럽인들이 가진 “토킹 드럼”이었다.
19세기의 유럽 제국들은 새로운 기술의 이점을 이용해서 싼 값에 획득한 경제 제국들이었고, 한 세기 뒤에 유지비용이 상승하자 재빠르게 포기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국제 관계의 균형을 깨고, 옛 생활 방식을 뒤엎어 새로운 전 지구적 문명에의 길을 열었다.
이러한 기술에 기초를 둔 제국주의에 참여했던 유럽 국가들이 몰고 온 영향에 대해서는 여전히 열띤 논의가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지나친 국가적 자부심의 시기요, 광적이고, 종종 흥겨웠던 전쟁 준비의 시기였다. 제국의 변경에서는 비용을 크게 들이지 않고 승리를 얻을 수 있고, 자연과 모든 왕국과 민족을 그처럼 갑자기 강력하게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은 민감한 유럽인이 원하는 균형을 신중하게 절충하고 조화시키기에는 어려운 것이었다.
신제국주의 시대는 또한 민족주의가 정점에 달했던 시대이기도 하다. 한때는 몇몇 비서구 세계의 민족들―특히 중국인들―을 존중했던 유럽인들이 기술 수준은 바로 전체적 문화 수준이라고 혼동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생물학적 능력이라고까지 혼동하기 시작했다. 다른 민족을 쉽게 정복을 할 수 있었던 사실이 과학계 엘리트들의 판단력까지 왜곡시켜 놓았다.
아프리카인들과 아시아인들에게 제국주의의 유산은 자신들을 정복했던 문명의 진정한 가치를 평가하는데도 영향을 주고 있다. 기독교는 아시아에서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고, 아프리카에서는 이슬람의 전파보다 약하다. 서양 문명의 전제가 된 자본주의는 대부분의 3세계 국가에서는 뿌리를 내리는데 실패했다. 자유와 법의 지배에 대한 유럽인들의 개념은 훨씬 더 실패했다. 서양의 기술적인 힘은 맥그리거 레어드가 바랐던 것처럼 “지금 야만으로 가득 차 있는 암흑의 지역으로 ‘인간을 향한 평화와 선한 의지’의 기쁜 소식”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제국주의자들이 사용했던 기술적 수단은 제국 건설의 동기가 되었던 사상이 남긴 흔적보다도 훨씬 어두운 흔적을 남겨 놓았다. 유럽인들은 짧은 지배 기간 동안 아시아와 아프리카인들도 기계류와 기술 혁신에 매료되도록 만들었다. 이것이야말로 제국주의의 진정한 유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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