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제1부 들끓는 분노
분노의 정치경제학 - 조정환
공적 분노의 소멸 - 공진성
조직의 역설 - 김기성
증오사회 - 정명중
제2부 저항의 몸짓
어두운 시대를 향한 반란 - 한순미
분노의 화폭 - 이선옥
마당정신의 시학 - 조태성
영화는 어떻게 역사를 기억하는가? - 강소희·주선희
친밀함의 스펙터클을 넘어 - 최유준
제3부 폭력과 일상
87년, 뜨거운 여름 - 류시현
지식인의 분노와 부끄러움 - 김창규
분노한다 고로 살아간다 - 김경호
아, 대한민국! - 이영진
파견 노동자의 일상 - 박수정
공적 분노의 소멸
분노와 질서
누가 질서를 부여하나?
질서 관념은 분노의 발생과 관련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권리 의식이 질서 관념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질서를 상상하느냐에 따라 권리 의식은 달라지며, 그에 따라 자신의 권리가 침해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달라진다. 예컨대, 신을 정점으로 하여 지상의 모든 만물이 수직으로 그 등급을 달리하여 늘어서 있다고 생각할 때, 각각의 피조물이 마땅히 가지는 권리는 차등적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신을 정점으로 하지만 지상의 모든 만물이 신 앞에 평등하게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면, 각각의 피조물이 마땅히 가지는 권리는 동등하다.
가족을 예로 들면 조금 더 이해하기가 쉽겠다. 자식들 사이에 어떤 질서가 있다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자식들에게 마땅히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권리가 달라진다. 옛날에는 장남과 차남의 권리가 달랐고, 아들과 딸의 권리가 달랐다. 그런 차등적 권리 부여는 그것을 정당한 것으로 인식하게끔 하는, 자식들 사이의 위계적 질서의 존재(에 대한 믿음)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이런 상이한 질서 관념이, 단수화해서 말하면, 근대 사회와 전근대 사회를 가른다.) 그러므로, 분노가 권리의 침해에 대한 인식과 관련될 때, 그것은 또한 일정한 질서 관념과 관련된다.
질서order는 다른 말로 하면 차례이고 순서이다. 그것은 또한 계급과 위계의 존재를 함의한다. 사과 열 개가 앞에 놓여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리고 그것을 일렬로 세워보자. 무슨 순서대로 세울까? 큰 것부터 작은 것 순서로? 색깔이 붉고 진한 것부터 그렇지 않은 순서로? 혹은 그 반대 순서로? 아니면 무작위로? 사과를 이른바 ‘순서대로’ 늘어놓는 방법이 나에게는 몇 가지 떠오르지 않는다. 떠오르지 않는 이유는 사실 목적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과를 상품으로 팔아야 하는 사람은 상품가치가 높은 순서대로 사과를 쉽게 늘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사과들은 상품가치에 따라 분류되고, 그렇게 분류된 사과에는 가격이 등급처럼 매겨질 것이다. 예컨대, 두 개에 천 원, 세 개에 천 원, 그리고 다섯 개에 천 원, 그렇게 분류되어 순서대로 늘어서 있는 사과는 상인에게 질서 있는 모습으로 비칠 것이다.
그런데 그 상인의 어린 손녀가 나타나서 그 상인이 한눈을 파는 사이에 사과의 배열을 바꾸어 놓았다고 가정해보자. 상인은 새롭게 배열된 사과에서 처음에는 별 다른 질서를 발견하지 못하고서 정렬된 상품을 흩뜨려 놓았다고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린 손녀가 사과를 다르게 배열한 이유를 설명한다면, 상인은 이제 그 사과의 배열에서 나름의 질서를 발견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상인은 사과를 팔기 위해 사과의 배열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놓을 것이다.
상인은 사과에 질서를 부여했고, 손녀는 (상인이 보기에) 그 질서를 파괴했다. 무질서해진 것이다. 그러나 손녀가 그것이 ‘무-질서’가 아니라 다만 ‘다른-질서’임을 설명하자, 할아버지는 그것이 질서일 수도 있겠다고 인정하지만, 다시 원래의 질서로 되돌린다. 이 예에서는 그래도 질서를 무너뜨린 사람이 예쁜 손녀이기에 할아버지가 화도 그나마 덜 내고, 손녀의 설명도 들어주고, 질서일 수도 있겠다고 인정해주지만, 현실에서는 설명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고 질서라는 것도 인정해 주지 않을 것이다. 분노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런데 ‘원래의’ 상태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왜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 놓아야 하는 걸까? 흔히 사람들은 기존의 상태나 과거의 상태를 원래의 상태라고 부르면서 변화에 반대해 그 상태로의 회복을 정당화하곤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기존의 상태나 과거의 상태가 그 자체로 원래의 상태는 아니다. 기존의 상태나 과거의 상태가 잘못된 상태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손녀가 사과의 배열을 흩뜨려 놓기 전에 상인이 애초에 사과를 잘못 배열해 놓았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과거의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이 옳은 일일 수는 없을 것이다.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옳은 일이 되려면, 그것은 사물들을 애초의 목적에 맞게, 이 경우에는 상품가치에 따라, 바르게 배열해 놓는 것이어야 한다. 원래의 상태란 시간과 무관하게 올바른 상태이며, 그것은 원래의 목적이 실현된 상태이다.
그런 상태를 사람들은 과거에,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지금도 여전히, 신과 자연의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예컨대, 기독교에서는 신이 태초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천지를 창조했고 피조물들 사이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했으므로 그 질서에 따른 상태가 올바른 상태이고 회복해야 마땅한 원래의 상태라고 주장한다. 창조자 신의 자리에 자연을 놓으면 성리학적 또는 자연법적 주장이 된다. 이때, 올바른 상태와 원래의 상태는 신과 자연의 이름 아래 마치 선험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처럼 간주된다. 그러나 자연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신이 세상에 어떤 목적을 부여했는지를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겠나?
그런 선험적으로 올바른 상태의 모습조차 철저히 누군가의 경험적 해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근대인들의 비판이었다. 불평등한 남녀관계와 신분제도가 옛날에 신과 자연의 이름으로 옹호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 불합리성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사실은 원래의 올바른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우리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관습적인 것을 원래의 올바른 상태라고 나중에 정당화했던 것이다.
질서의 근거보다 질서 관념이 우선한다
질서, 곧 원래의 올바른 상태가 선험적으로 존재함을 여전히 주장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몸이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는 시간과 함께 변하지만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은 거의 불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질서 관념과 권리 의식은 사회에 따라 다르고 시대에 따라 변할지 몰라도, 인체의 구조는 사회에 따라 다르지 않고 시대에 따라 변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예쁜 눈과 코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시대에 따라 달라져도 눈과 코의 위치는 달라지지 않으며, 머리 없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몸은 머리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인체의 질서에 비유해 사회적 질서를 설명하려고 했고, 또 그렇게 사회적 질서를 정당화하곤 했다. 그러나 사실은 인체의 질서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사회적 질서가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적 질서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그런 질서를 비유적으로 인체에서 발견해냈던 것이다.
어떤 사회적 질서를 인체의 질서처럼 자연적이고 불변적인 것으로 이해할 때, 그것을 바꾸려는 시도는 원래의 올바른 질서를 파괴하려는 부당한 행위가 되고, 그러므로 또한 그 질서 안에서 권리를 누리던 사람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에서 일어난 정치적?사회적 격변은 질서에 대한 관념들의 충돌이었고 각가의 질서 안에서 보장받던 권리가 체계적으로 침해받는 것에 대해 분노하는 자들간의 충돌이었다. (그에 앞선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도 교황을 정점으로 한 인간들의 수직적 위계질서를 부정하고 신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함을 주장한 것이었다.)
위계적인 질서 관념 안에서 차등적인 권리의 부여가 정당한 것이라고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 모든 사람이 자연적으로 평등하며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짜증나게 하는 존재를 넘어 분노를 유발하는 존재였다. 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체계적으로 침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모든 사람이 자연적으로 평등하며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구체제 안에서 특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천부적 권리를 체계적으로 침해하는 존재였으며, 그러므로 또한 분노의 대상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화의 역사는 대부분 이렇게 시작된다. “감히 네 놈 따위가”라고 소리치며 분노하는 특권계급과 오랫동안 천부의 권리를 빼앗겨왔음을 깨닫고 분노하는 하층민의 충돌로 시작된다.
폭력과 분노
민주화의 과정은 폭력적 과정이다
민주화의 과정은 많게나 적게 폭력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물리적 파괴와 관련해서만 민주화의 과정이 폭력적인 것은 아니다. 한국어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폭력violence은 위반violation을 함축한다. 무엇을 위반하고 무엇을 침해한다는 말일까? 일정한 법과 질서를 위반하고 그 속에서 부여되는 권리를 침해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실은 눈에 보이는 인체의 질서와 사물의 질서를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것만 폭력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고 그 안에서 부여되는 권리를 침해하는 것도 폭력인 것이다. 민주화의 과정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관념 속의 질서를 바꾸는 과정이었고, 그런 만큼 또한 폭력적인 과정이었다.
어느 날 자식이 아버지/어머니에게, 그리고 학생이 교사와 교수에게 ‘동무’라고 부르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실제로 68혁명 이후에 독일의 대학에서 급진적인 교수의 강의실에서는 교수와 학생이 의도적으로 서로 반말을 하며 수업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시간이 흐르고 익숙해지면, 즉 새로운 질서에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편입되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처음에는 분명히 그것이 매우 폭력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노년/장년 세대와 청년 세대 사이에 유사한 갈등이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연장자가 하대하는 것을 폭력적으로 느끼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젊은이가 수평적으로 대구하는 것을 오히려 폭력적으로 느끼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길가에서 자주 보게 되는 광경이 “어디다 대고 함부로 반말이야”와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충돌하는 것이다. 한쪽은 자신이 가진 대등한 권리가 침해되었다고 느끼고, 다른 한 쪽은 자신이 어른으로서 가진 우월한 권리가 무시되었다고 느끼는 것이다.
폭력(의 인식)은 분노를 유발하고, 분노는 다시 폭력을 유발한다. 앞에서 설명했다시피 분노는 자신이 속한 질서가 파괴되고 그 안에서 보장받던 권리가 체계적으로 침해될 때 발생한다. 거대한 구질서와 신질서가 충돌하는 과정은 물리적으로만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관념적으로도 폭력적인 것이며, 그로 인해 엄청난 분노가 표출되는 과정이다. 기존의 질서가 무너져가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그 안에서 과거에 자신이 누리던 권리가 사라져가는 것을 보면서 어찌 그것을 폭력적으로 느끼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반대로, 자연적인 원래의 질서(예컨대 평등한 질서)가 오랫동안 어떤 집단에 의해 유린되어 온 것을 깨닫고서, 그리고 그 질서 안에서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오랫동안 빼앗겨온 것을 깨닫고서 어찌 현재의 질서를 폭력적으로 느끼지 않을 수 있으며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분노한 민중이 치켜든 무기만 폭력적인 것이 아니고, 그렇게 반항하는 하층민을 제압하는 군대와 경찰의 힘만 폭력적인 것이 아니고, ‘원래의 올바른’ 상태에서 벗어나 ‘부당하게’ 강요되고 있(다고 인식되)는 질서 자체도 그 질서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폭력적인 것이다. 그런 폭력 앞에서 사람들은 분노하고, 분노한 사람들은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온갖 힘을 다 사용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다른 질서 관념을 가진 사람에게 폭력적인 것이 된다. 이렇게 폭력은 폭력을 부르고, 분노는 분노를 부른다.
민주화의 과정은 이처럼 거대한 질서와 질서가,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질서를 관철시키려는 폭력과 그런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폭력이 서로 맞부딪치면서 시작되었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처음에는 새로운 질서가 옛 질서를 대체하기도 했지만, 이내 옛 질서가 복구되어 새 질서를 대체하기도 했고, 다시 새 질서가 새로운 옛 질서를 무너뜨리고 복귀하기도 했다. 그렇게 몇 차례 질서들의 교체가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폭력적인 일들도 일어났지만, 결코 과거와 같이 하나의 질서가 의심받지 않고 사회를 지배할 수는 없게 되었다.
종교개혁 이후의 기독교의 운명처럼, 한 번 나누어진 질서는 다시 하나가 될 수 없었고, 오히려 질서order는 계속해서 나누어져 질서들orders이 되었다. 막스 베버는 이런 변화를 두고서 ‘가치의 다신교적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질서의 분화는, 그리고 그로 인한 질서의 상대화는 불가피한 일이 되었다. 질서의 분화와 상대화는 관념의 영역에서는 극단으로 치달아 허무주의에 이르기도 했지만, 현실의 영역에서는 덜 폭력적인 질서, 곧 ‘질서들의 질서order fo orders'인 민주주의를 낳았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나!”
이제 두 가지 분노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는 공적인 분노이고, 다른 하나는 사적인 분노이다. 상대적인 질서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져 있다고 믿는 권리가 침해될 때 느끼는 분노가 사적인 분노라면, 그런 주관적 질서들의 질서 안에서 각자에게 주어져 있는 권리가 침해될 때 느끼는 분노는 공적인 분노이다. 예컨대, 국정원의 불법적인 대선개입과 관련하여, 그것이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자의 당선을 체계적으로 방해했기 때문에 분노하는 것과, 그렇게 분노하여 이른바 ‘대선결과에 불복’하려는 자들이 현재의 대통령과 그를 지지하는 자신의 권리를 체계적으로 침해한다고 느껴서 분노하는 것은 모두 사적인 분노에 해당할 것이다.
국정원의 대선개입과 관련하여 매우 엉뚱하게도 그것이 대선결과에 과연 실질적으로 영향을 끼쳤는지를 두고 다투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개입을 비판하는 쪽은 그것이 대선결과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고, 개입을 (드러내놓고 옹호하진 못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는 쪽은 그것이 대선결과에 사실상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이쪽은 그러므로 분노할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저쪽은 그러니까 분노할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주관적 질서 관념에 기대어 ‘자신의’ 권리가 침해되었다고 주장하고 분노하는 것은, 사람의 일로서 자연스럽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적인 분노이며, 그래서 타인의 공감을 얻을 수 없다. 그 반면에, 객관적 질서(질서들의 질서) 관념에 근거하여 ‘우리의’ 권리가 침해되었다고 주장하고 분노하는 것은 가히 ‘거룩한 분노’라고 할 수 있겠다.
분노한 사람들이 자주 내뱉는 말이 있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나!” 억울할 때에도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한다. 이때 법은 질서를 의미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각자의 주관적인 법(질서)에 근거하여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분통을 터뜨린다. 여름에 만난 파독 광부 출신의 어느 교민은 대사관 직원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불만이 아주 많았다. 자신이 비록 우연히 광부로 독일에 오기는 했지만, 출신 집안으로 보나 그 밖의 개인적인 능력으로 보나 평범한 광부 취급을 받을 사람은 아닌데, 대사관 직원들이 자신을 한낱 광부출신의 무식한 늙은이로 취급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런 섭섭함과 분노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위의 예에서처럼 어느 질서 안에서 자신이 차지해야 마땅하다고 믿는 지위보다 현재 자신의 지위가 크게 낮을 때, 또는 혁명 상황에서처럼 자신이 옳다고 믿는 질서 안에서의 자신의 지위보다 타인이 옳다고 믿는 질서 안에서의 자신의 지위가 크게 낮을 때, 아무튼 자신의 믿음과 현실이 충돌할 때, 사람들은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나!”라고 외치며 분노한다. 오늘날 한국사회 곳곳에서 이런 크고 작은 분노의 목소리들을 쉽게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분노는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기 힘들다. 그것이 사적인 질서(법) 관념에 기대고 있기 때문인다. 어느 사회가 크게 두 개의 대립하는 질서 관념을 가진 사람들로 양분되어 있다면,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 외롭지는 않겠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충돌은 그만큼 더 파괴적일 것이다. 어느 일방이 자신의 질서를 다른 일방에게 힘으로 강요하면, 그 폭력이 분노를 유발하고 그 분노가 다시 폭력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많은 사회들이 이런 크고 작은 세계관적 충돌을 겪으면서 결국 사적인 질서들을 통합하는 하나의 공적인 질서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자기의 질서 안에서 자기가 자기를 인식하는 대로 타인도 자기를 인식해주기를 요구하는 인정투쟁들의 결과로서, 어느 한 편의 요구만 인정되는 하나의 사적인 질서가 아니라, 가능한 대로 모든 사람의 요구가 표출되고 조정되어 궁극적으로 인정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공적인 질서, 곧 ‘질서들의 질서’가 생겨난 것이다. 이것이 ‘법들의 법’, 곧 민주주의이다. 이 질서가 유린될 때, 이 질서 안에서 보장받는 권리가 침해되었을 때, 그때 표출되는 분노가 바로 공적인 분노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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