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식
역사로 국가의 구심점을 만들다
삼국시대를 기술한 역사책 하면, 생각나는 두 권의 책이 있습니다. 하나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이고, 다른 하나는 일연의 《삼국유사》이지요. 그런데 이 두 책은 같은 역사를 기술하였는데도 사뭇 다른 느낌이 듭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저술자의 역사관 때문이겠지요. 재미있는 것은 《삼국사기》는 읽었어도 읽지 않은 느낌이 들고, 《삼국유사》는 읽지 않았어도 읽은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정사처럼 여겨지는 《삼국사기》는 왠지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지지만, 야사처럼 여겨지는 《삼국유사》는 대중들에게 재미와 흥미를 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우리들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는 선입견도 한몫 했을 것입니다. 그 선입견은 바로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고 민족사관을 수립한 단재 신채호가 한 말에서 비롯되는 김부식의 사대주의적 모화사관慕華史觀(중국의 문물과 사상을 흠모하여 따르려는 역사관.) 때문일 것입니다. 신채호는 김부식의 역사 기술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맹비난을 퍼붓습니다.
차호라, 김부식도 호종단의 심리를 받아 외국 문화로써 본국을 정복하여 유교로써 국교를 대신하려 하여 그 지은바, 소위 《삼국사기》가 이 꼴이 되었도다. 김부식의 고기古記를 산삭한 심리는 곧 호종단의 고적古蹟 없앤 심술을 가졌음이요, 화랑전기를 감손함은 호종단이 사성비四聖碑 부수던 버릇보다 더 심하다 할지로다. (중략) 《삼국사기》를 지을 때의 김부식 씨의 마음에, 이를 독립의 조선사로 지은 것이 아니라 지나 중국 역대사 가운데 〈동이열전〉의 주석으로 자처함은 명백하도다. (《조선상고문화사》)
호종단胡宗旦은 고려 중기에 송나라에서 귀화한 사람으로, 예종의 후대를 받아 벼슬을 받은 뒤 전국을 순찰하면서 가는 곳마다 비갈碑碣(사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쇠붙이나 돌에 글자를 새겨 세우는 것.)을 가져다가 글자를 긁어버리고, 부수고 혹은 물속에 넣었으며, 이름난 종들은 쇠를 녹여 틀어막아 소리가 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채호는 이렇게 우리 민족의 정기를 짓밟은 호종단을 거론하며 《삼국사기》는 이보다 더 심한 천인공노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때문에 신채호 이후 자주적 민족사관 입장에서 《삼국사기》는 매국의 역사요, 민족정신을 말살한 역적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사 기술에 있어 누구나 자신의 사관이 있는 것이고, 시대적 요구도 따르기 마련입니다. 근대 제국주의의 광풍이 몰아치던 20세기 초, 신채호에게 필요한 것은 자주적 민족사관이었을 테지만, 고려 중기 약화된 왕권을 되돌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김부식이 제시한 것과 같은 국가 구심점을 만드는 유교사관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20세기의 시대적 잣대로만 평가한다는 것은 무언가 찜찜합니다. 굳이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1844~1900)의 철학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역사는 어떤 사물, 어떤 관습, 어떤 기관의 ‘발전’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향한 진보 과정이 아니라 다양한 힘들의 투쟁에 따라 새로운 의미와 목적이 부가되는 복합적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김부식이 살던 고려는 출신에 따라 신분이 정해지는 골품제가 폐지되고 과거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는 사회였습니다. 누구나는 아니지만 적어도 양인良人이면 모두가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고, 재능만 있다면 얼마든지 관직에 나갈 수 있었지요. 하지만 과거는 지공거知貢擧라는 시험관에 의해 운영되었기 때문에 이들과의 친분이 과거급제의 실질적 조건이 되었으며, 5품 이상 관원의 자제에게는 과거를 통하지 않고도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음서 제도가 있어서 정권 장악의 기회는 몇몇 가문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누대로 권세와 부를 누리는 가문도 생겨났습니다. 그중 인천 이李씨는 문종 이후 7대 80여 년 동안 왕실과 중복되는 혼인관계를 맺어 왕권을 능가할 만큼 세력을 키워 갔으며, 이자겸李資謙 때 와서 절정을 맞습니다. 이자겸은 어린 외손자 인종을 왕으로 옹립하고 자신의 두 딸과 결혼시켜 권력을 장악합니다. 그리고 당시 유행하던 이씨가 왕이 된다는 ‘십팔자도참설十八子圖讖說’을 믿고 왕위마저 찬탈하려는 마음을 먹지요. 하지만 동조 세력이던 척준경拓俊京의 배신으로 반란은 실패하고, 이자겸은 유배지에서 죽습니다.
이로써 외척 세력은 몰락하고 왕정이 어느 정도 복고되었지만 국내외 정세는 극도로 불안하였습니다. 안으로는 이자겸의 난으로 궁전이 불타며 정치 기강이 해이해졌고, 밖으로는 여진족의 외교적 압력이 심해졌습니다. 이 시기에 서경 출신의 승려 묘청이 풍수지리설에 의거해 고려가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개경의 지덕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역설하면서, 나라를 중흥하고 국운을 융성하게 하려면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채호가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연구한 ‘묘청의 난’입니다. 묘청은 인종의 총애와 함께 백수한白壽翰, 정지상鄭知常 등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으며 서경에 대화궁을 지으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고, 금나라도 항복할 것이며, 많은 나라가 조공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화궁이 세워진 뒤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으며, 오히려 궁 근처 30여 곳에 벼락이 치고, 인종의 서경 나들이 도중 갑작스런 폭풍우로 수많은 인마가 살상됩니다. 이에 묘청 일파를 배척하는 소리가 높아졌고, 김부식은 그 대표적 인물로 반란 진압의 책임을 맡았습니다. 김부식은 먼저 묘청의 일파 중 개경에 있던 백수한, 정지상 등을 처형하여 후환을 없애고 난을 진압합니다. 신채호는 이를 낭불郎佛 대 유가儒家, 국풍國風 대 한학漢學, 진취 대 보수의 싸움이라고 말하면서 만약 묘청이 승리했다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김부식이 보기에 묘청의 난은 그저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의 운세가 다했다는 항간에 떠도는 도참사상(앞날의 길흉에 대한 예언을 믿는 사상.)과 풍수사상에서 비롯된 허황된 것에 불과했습니다. 때문에 자신이 믿고 있던 유가적 통치 이념으로는 이런 터무니없는 사상을 용납할 수 없었지요.
고려는 이자겸으로 대표되는 외척 세력의 발호와 묘청으로 대표되는 서경 세력의 반란을 겪으면서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김부식이 기존의 역사를 두고 새로운 역사를 쓴 것 또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삼국사기》는 지난 역사를 정리해 새로운 전범을 만들어 체제를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쓰였던 것입니다. 《삼국사기》를 임금께 올리며 쓴 〈진삼국사표進三國史表〉에서 김부식은 인종의 입을 빌려 《삼국사기》를 편찬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금의 학사·대부는 오경이나 제자서, 진한의 역대 역사에 대해서는 두루 통하여 자세히 설명하는 자가 더러 있는데, 우리나라의 일에 대해서는 그 시말도 알지 못하니 매우 한탄스럽다. 더구나 신라·고구려·백제 삼국이 정립鼎立하여 예로써 중국과 교통했기 때문에 범엽의 《한서》라든지 송기의 《당서》에는 모두 삼국의 열전이 있지만, 그 사서들은 자기 나라에 관한 일은 자세히 기록하고 외국에 관한 일은 간략히 하여 자세히 싣지 않았다. 또 삼국의 고기라는 것도 글이 거칠고 졸렬하며 사적이 빠진 것이 많아서 임금의 선악이라든지 신하의 충사忠邪, 나라의 안위, 인민의 치란에 관한 것을 모두 드러내어 후세에 권계를 보이지 못했다. 그러니 재주와 학문, 식견을 갖춘 인재를 얻어 일가의 역사를 이루어서 만세에까지 해와 별처럼 빛나게 해야 한다. (〈진삼국사표〉)
인종은 공부하는 사람들이 중국의 역사에는 정통하지만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는 그 시말도 알지 못함을 한탄합니다. 더구나 중국의 역사책 귀퉁이에 기록된 우리의 역사는 너무도 소략해 읽을 것이 없었으며, 전해지는 《삼국사》는 글이 거칠고 졸렬할 뿐만 아니라 사적이 빠진 것이 많아 후세에 권계로 삼기에 불충분했습니다. 때문에 재주와 학문, 식견을 갖춘 이가 새롭게 역사를 기술해 만세에까지 해와 별처럼 빛나게 해야 한다는 것이 임금의 생각이었습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바로 이러한 취지에서 쓰였으며, 후세에 권계를 보이기 위한 선악, 충사忠邪, 안위, 치란에 관한 것들이 특히 강조되었지요. 때문에 단군신화를 위시한 여러 건국신화와 같은 믿기 힘든 이야기들은 생략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이규보는 〈동명왕편〉에서 “김부식 공이 국사를 중찬重撰할 때에 자못 그 일을 생략하였으니, 공이 생각하기에 국사는 세상을 바로잡는 글이니 크게 이상한 일은 후세에 보일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략한 것이 아닌가?”라고 서술했습니다.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김부식은 믿기 힘든 일들은 과감히 생략하고, 드러내 높여야 할 일들은 아무리 천한 사람의 행적일지라도 찾아내 기술하였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이 이를 유가적 합리성에 의한 사대적 역사 기술이라 비판하더라도 당시 김부식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지요. 왜냐하면 국왕을 위시한 지배층은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새로운 구심점이 필요했고, 김부식은 이에 응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삼국사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역사를 기술하는 편년체 서술을 버리고 한나라 무제 때 사마천이 창안한 역사 서술 방식인 기전체를 따릅니다. 인간의 행위를 중심으로 기술하는 기전체 역사 서술은 시간의 흐름을 해체해 편찬자 혹은 역사의 중심자인 국왕의 의도대로 역사를 집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김부식은 《사기》를 참조하여 역대 제왕의 일대를 기술한 〈본기〉, 각국의 주요 연표를 적은 〈연표〉, 제도와 문물, 지리 등을 서술한 〈잡지〉, 시대를 대표하는 탁월한 인물을 다룬 〈열전〉의 순으로 역사를 서술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지배 세력이었던 개성의 귀족들의 요구에 따라 신라 정통론을 기저로 후세에 권계가 될 만한 일들을 뽑아 역사를 편찬합니다. 특히 명장名將과 명신名臣, 학자, 충절, 효자 그리고 반신叛臣과 역신逆臣 등 총 69명의 인물이 입전되어 있는 〈열전〉을 보면, 그 첫 편에 <김유신전>을 두고 마지막에 <궁예전>과 <견훤전>을 두어 삼국통일의 역사적 과정과 그 의미를 드러내고자 하는 편찬자의 의도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게다가 총 10권의 〈열전〉 중 3권을 차지하는 <김유신전>은 삼국통일의 기반을 만든 김유신의 위업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태종 무열왕의 아낌없는 배려와 신뢰를 기술함으로써 임금의 선행까지도 보여주고 있지요. 또한 권8에 기록된 11명의 인물들은 향덕向德을 제외하고는 《삼국유사》를 비롯한 그 어떤 역사책에도 보이지 않는 김부식만의 역사관에 의해 선발된 사람들이어서 그 특징이 확연합니다. 김부식은 이들의 삶 자체보다는 뛰어난 효행, 지조, 검소, 예술, 절행 등에 초점을 맞추어 유교적 덕목을 강조하였습니다. 허벅지 살을 베어 부모를 봉양하는 향덕과 성각, 다른 사람의 모함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실혜實兮와 물계자勿稽子, 가난한 삶 속에도 욕심내지 않는 백결선생百結先生과 검군劍君, 글씨와 그림에 뛰어난 김생金生과 솔거率居 그리고 한 남자만을 섬기는 설씨녀薛氏女와 도미都彌의 처 등의 이야기에서는 유교적 이념으로 통치 질서를 확고히 하려는 주제의식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더욱이 김부식은 유가적 이념 이외에도 글의 형식과 수사에만 치중한 나머지 알맹이는 없고 꾸밈만 있는 기존의 변려문騈儷文(변려문은 4자로 된 구와 6자로 된 구를 배열하기 때문에 ‘사륙문’이라고도 한다. 위진 남북조 시대 이래로 통용되던 한문의 문체로, 문장 전편이 대구로 구성되어 있어 읽는 이에게 아름다운 느낌을 주는 화려한 글이다. 그러나 글의 형식과 수사에만 치중한 나머지 알맹이는 없고 꾸밈만 있어, 당나라 때 한유로부터 글 한 편을 다 읽고 난 후에도 건질 내용이 하나도 없다는 비판을 받는다.)을 버리고 새로이 수용된 고문으로 역사를 기술하였습니다. 구한말의 문장가 김택영은 “《삼국사기》의 글은 능히 질박하고 풍부하면서 시원스러워 살아 움직이는 기세가 있다. <온달전> 같은 글은 《전국책》이나 《사기》 가운데 두더라도 거의 구별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으며, 나아가 <온달전>을 박지원의 〈야출고북구기〉와 함께 우리나라 5,000년 이래 최고의 걸작으로 꼽기까지 했으니 《삼국사기》는 문장으로서도 최고임을 보여줍니다. 찢어진 옷과 해진 신발, 꾀죄죄한 겉모습의 온달이 일국의 장수가 되어 전쟁에 나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서술한 김부식은 편장자구篇章字句, 즉 어절과 어휘, 문장구조 등을 작가의 의도에 따라 분절 또는 재배치함으로써 단순히 스토리만을 전달하는 글이 아닌 개성적이고 역동적으로 살아 있는 글로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성심 이외에도 아래와 같이 자신의 말에 책임을 다하는 신의를 강조합니다.
온달이 출병에 임하여 맹세하길, “계립현 죽령의 서쪽 지역을 우리에게 되돌려오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으리라”라고 하였다. 마침내 떠나 아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웠으나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길에서 죽고 말았다. 그런데 장사를 치르고자 해도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말하길, “삶과 죽음은 정해져 있습니다. 아아! 돌아가십시오”라고 하자 마침내 들어져 하관하였다. 대왕이 이를 듣고 비통해하였다. (〈온달전〉)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맹서를 지키기 위해 죽어서도 생사를 결정하지 못하고 떠나지 않는 온달의 모습에서 우리는 《삼국사기》가 전해주는 유가적 신념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필요한 것은 유가적 이념을 떠난 ‘신의信義’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삼국사기》를 읽는 이유이겠지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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