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내가 패션 에디터 일을 시작한 1970년대에 파리의 쿠튀르는 밀라노, 파리, 뉴욕과 런던의 패션쇼를 주도한 기성복에 밀려나게 되었다. 흥미롭고 고무적이었던 기성복은 나의 기대를 완전히 충족시켜 주었다. 패션쇼의 모든 마술, 즉 음악과 조명, 모델은 황홀했으며, 게다가 클럽이나 뒤풀이 파티에서 디자이너를 마주치는 경우에는 더욱 특별한 느낌을 받았고, 마치 그 세계와 일체가 된 듯했다. 런던으로 돌아가기까지 기다릴 수 없어 패션 기사란에 그 마술의 일부를 재현해 내고자 했다. 이러한 세계적인 쇼에 참가하는 일은 패션계 종사자들을 자극한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에는 세계가 천천히 움직였는데, 이는 방금 본 컬렉션에 대한 기사를 완성하기 전에 보통 우아하게 저녁 식사에 와인 한 잔을 곁들이면서 토론하고 생각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는 의미다.
뉴욕에서는 캘빈 클라인의 날렵하고 미니멀한 디자인이 신선하게 다가왔고, 전원의상의 느낌이 나는 랄프 로렌은 편안했으며, 프레피(미국 명문 사립고등학교 학생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스타일에 대한 페리 엘리스의 재해석은 젊었다. 밀라노에서 조르조 아르마니는 황제였으며, 체루티, 바질레, 미소니와 막스 마라의 부드러운 테일러링의 평화로움과 잔잔한 색상들은 이탈리아적이었다. 그러나 가장 볼만한 패션쇼가 열렸던 곳은 파리였다.
파리에서는 이브 생 로랑이 가장 밝게 빛났다. 그는 각 컬렉션에서 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멋진 작품들을 만들어 냈다. 다카다 겐조의 유쾌하고 젊은 스타일은 새로운 의상과 꿈의 세계를 열었다. 소니아 리키엘과 도로테 비스는 니트웨어의 시조가 되었다. 파블로Pablo와 델리아Delia는 회화적인 디자인으로 그 시대의 분위기를 대표했던 브라질 커플 디자이너였으며, 클로에에서는 칼 라거펠트 디자인의 로맨틱한 면을 볼 수 있었다. 런던에는 영국의 보물들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잔드라 로즈, 장 뮈어, 비바, 마거릿 호웰, 오시 클라크가 있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쿠튀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패션계에 활력을 주었던 크리스티앙 라크루아, 장 폴 고티에, 비비안 웨스트우드, 지아니 베르사체, 존 갈리아노, 알렉산더 맥퀸 같은 새로운 쿠튀리에들 덕택에 다시 한번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오늘날 패션은 학문의 하나로, 그리고 예술의 한 형태로 새로운 지위를 얻게 되었다. 패션은 쿠튀르에서든 혹은 하이 스트리트에서든 브랜드의 선택이 중요한 세계적인 거대 산업이다. 실제로 같은 디자이너의 이름이 양쪽 영역에 동시에 등장하기도 한다.
인터넷은 새로운 디지털 세계를 열었으며, 이 세계에서는 지구의 오지에서 산다고 할지라도 가장 훌륭한 최신 패션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트렌드를 알리는 일에 있어서는 블로거나 트위터 이용자들도 전문가들만큼이나 강한 광고 효과를 가지게 되어 무한경쟁으로 돌입했다.
다양하고 재미있는 특성을 지닌 패션 세계는 결코 지루하지 않으며, 진화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창의적인 재능과 혁신적인 아이디어에 의존해야 하는, 꼭 필요한 산업으로 남아 있다. 디오르와 발렌시아가가 1950년대에 확실한 믿음을 주었던 것처럼 재능 있는 새로운 디자이너들이 계속해서 신뢰를 회복시키고 있다.
준 마시
프롤로그
디오르와 뉴룩
“디오르를 보기 전에 옷을 산 사람들은 참 안됐군! 뉴룩이 모든 것을 변화시켰는데.”
_ 카멜 스노우, 『하퍼tm 바자』
1947년 2월 12일 아침, 파리의 빛은 희미했으며 공기는 차가웠다. 그 해는 1870년 이래로 유럽에서 가장 추운 겨울이었고, 도시는 여전히 전쟁으로 인한 물자 부족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연료는 거의 바닥났으며 전기 사용은 제한되었고, 거리는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18세기 말부터 세계 패션을 주도했던 파리 쿠튀르 무역은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프랑스 신문들은 파업 중이었고, 공식 스케줄 외에는 파리에 더 이상 머물고 싶어 하지 않았던 미국 바이어들은 유명 쿠튀르 하우스들과의 사업이 마무리되자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몽테뉴 가 30번지30 Avenue Montaigne 뜰 밖에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각진 어깨와 무릎 길이의 모피코트와 정교한 모자로 우아하게 차려입은 여성들은 소문이 무성하긴 했지만 거의 알려진 것이 없었던 크리스티앙 디오르Christian Dior의 첫 번째 패션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디오르 하우스의 모든 것은 완전히 새로웠는데, 첫 고객이 도착했을 때에야 비로소 건축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멋쟁이 실내장식가 빅토르 그랑피에르Victor Grandpierre는 고전적인 흰색과 연한 청회색으로 내부를 꾸몄다. 커다란 창문은 회색 새틴 커튼과 페스툰 블라인드(창문 가리개의 일종)로 대담하게 장식했다. 높은 천장에는 크리스털 샹들리에를 달았으며, 루이 14세 스타일의 의자는 흰색으로 칠하고 키가 큰 재떨이를 방 곳곳에 놓아 두었다. 방 가운데는 '빙그르르' 돌거나 적당한 포즈를 취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있었다.
그날 아침 파리에 남아 있던 사람들 중에는 미국판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의 존경 받는 편집장 카멜 스노우Carmel Snow와 『하퍼스 바자』의 프랑스 데스크 마리루이즈 부스케Marie-Louise Bousquet, 그리고 쿠튀르의 첫 임무를 위해 파리에 온 『하퍼스 바자』의 신입 에디터 어니스틴 카터Ernestine Carter가 있었다. 영국인 기자 재닛 아이언사이드Janet Ironside도 그곳에 있었으며, 프랑스 『보그Vogue』의 매니저이며 디오르의 오랜 친구인 미셸 드 브뤼노프Michel de Brunhoff도 있었다. 『피가로Figaro』의 알리스 샤반느Alice Chavanne와 제네비브 페로Genevieve Perreau뿐만 아니라 『자르댕 데 모드Jardin des Modes』의 폴 칼다그Paul Caldagues, 루시앙Lucien, 그리고 코제트 보겔Cosette Vogel 부부도 그곳에 있었다. 그들 모두 패션 역사상 가장 짜릿하며 잊히지 않을 순간을 목격할 찰나였다.
방은 꽉 차서 북적거렸으며, 무대가 설치되고 관객들은 자리에 앉았고 시끄러웠던 수다도 수그러들었다.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커튼 뒤의 모델 대기실에서 친한 두 명의 동료(디오르는 그들을 '엄마'라고 부를 정도였다)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마담 마르게리트Mme Marguerite와 마담 브리카르Mme Bricard는 곧 시작 신호를 보냈다. 디오르의 오른팔이며 그가 가장 신뢰하던 동료인 마담 레이몽드Mme Raymonde는 대담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하퍼스 바자』의 어니스틴 카터는 이 행사를 이렇게 묘사했다.
“모델들이 살롱으로 들어갔다. 기울여 쓴 '모 에 나노Maud et Nano' 디자인의 모자는 턱 밑에서 베일로 묶여 있거나 그냥 중력에 저항하고 있었다. 샤넬이 포즈를 발명해 냈다면, 디오르는 아슬아슬하게 등을 뒤로 젖힌 걸음걸이를 만들어 냈는데, 이 걸음걸이는 종아리를 스치는 넓은 스커트를 입고 도는 모델을 도도하게 보이게 했다(놀랍게도 스커트 하나에 무려 약 7미터의 옷감이 사용된다). 놀라운 것은 스커트의 길이(바닥에 거의 붙어 있었다)뿐만이 아니라 개미허리의 자그마한 상체의 절제된 모습과 넓게 부풀어 오른 스커트의 우아함과의 대비, 그리고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는 어깨와 뒤쪽이 더 넓은 차분한 오픈 칼라의 대비였다.”
첫 컬렉션을 보았던 또 한 명의 목격자는 디오르의 액세서리 스튜디오를 운영했던 카르멘 바롱Carmen Baron이었다. 그녀는 “꽃과 같은 여성이 탄생했다. 아름다운 신발에 탬버린 모자를 쓰고, 모조 보석과 베일, 가느다란 허리, 넓은 힙. 디오르는 여성을 성스럽게 승화시켰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새로 등장한 여성적인 실루엣은 관능적이었으며 화려했고,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거부하기 힘들었다. 최고급 검은색 모직으로 만든 '코롤라Corolla'라는 이름의 우아한 애프터눈 드레스는 부드럽고 처진 어깨, 좁은 허리까지 이르는 단추들과 힙을 강조하며 폭포처럼 떨어지는 넓고 화려한 주름으로 되어 있었다. 치마 길이는 약 23센티미터나 길어졌다. 현재 뉴룩 앙상블의 아이콘이 된 '바Bar' 라고 불리는 테일러드 슈트는 어깨가 부드럽고 둥글며 높은 가슴선에서 작은 허리로 오면서 좁아지고, 몸에서부터 곡선으로 뻗어 나가 넓게 부푼 힙까지, 섄텅shantung 실크 원래의 색상으로 만든 재킷과 검은색 모직을 주름 잡은 스커트를 결합하였다. 모델들이 뽐내며 방을 걸어 다닐 때 약 18미터의 천은 소용돌이치고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가격은 믿기 어렵게도 59,000프랑(당시 평균 연봉이 이 옷 한 벌 가격의 1/3 정도였다)이었다. 그것은 대략 9,000유로(한화 약 1,300만 원)에 해당한다.
어니스틴 카터는 “각 쿠튀르 컬렉션의 마지막을 알리는 웨딩드레스에 쏟아지는 전통적인 박수갈채가 우레와 같이 크게 터져 나왔으며 몇몇 관객은 울고 있었고, 기자들의 찬사와 친구들의 키스 세례, 그리고 카메라 플래시를 위해 디자이너를 회색 커튼 밖으로 이끌어 내려는 관객들의 요청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디오르는 “마담 마르게리트와 마담 브리카르, 그리고 나는 탈의실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우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담 레이몽드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박수갈채가 기다리는 큰 살롱으로 우리를 내보내기 위해 왔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어떤 승리를 하더라도 가장 중요했던 그 순간에 느꼈던 감정을 다시는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영국인 디자이너이며 당시 파리에서 피에르 발맹Pierre Balmain의 일을 돕고 있던, 디오르의 친구 존 커배너John Cavanagh는 눈물을 흘렸다. “압도적인 안도감이었다. 작은 신발 끝에서부터 모자의 깃털까지 전체적인 아름다움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안도감. 그것은 여성의 인체에 대한 완전한 예찬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하퍼스 바자』의 편집장 카멜 스노우가 “친애하는 크리스티앙, 그것은 과히 혁명입니다. 당신의 의상은 완전히 새로운 룩이에요”라고 선언한 순간, 그 컬렉션은 '뉴룩New look'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론칭 후 10년이 지나 『타임Times』지는 이렇게 요약했다.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그 순간을 포착했다. 전후의 오트 쿠튀르는 심각한 침체기에 빠져 있었다. 패션의 중심지로 뉴욕이 파리를 대신하려 하고 있었지만, 1947년 2월 추운 겨울날에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놀랍게도 단 한 번의 멋진 컬렉션으로 전 세계를 사로잡고 하룻밤 만에 그의 이름을 알리며, 프랑스 쿠튀르의 명성을 회복했다.”
오늘날에는 뉴룩이 불러일으켰던 열광적인 현상을 상상하기는 어렵지만, 뉴룩이 패션계를 흥분하게 만들었음은 틀림없다. 디오르는 누구나 다 아는 인물이 되었으며, 라이벌인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와 함께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패션 디자이너가 되었다. 두 사람은 매우 다르지만, 그들 모두 전쟁 동안 궁핍함을 겪으면서 억눌려 왔던 패션에 대한 욕망을 촉발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쿠튀르를 부활시켰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패션에 열광하는 현상이 현대사회에서 하나의 영향력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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