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의 화석
- 에피다우로스 고대 그리스 극장
아크로폴리스의 첫인상 ─ 안개 낀 새벽의 아테네 풍경은 마치 신화 속 미로 같다. 아테네공항에서 숙소로 들어가는 짧은 순간에 만난 몇몇 그리스인의 얼굴이 그리스 고전에 나오는 인물과 겹친다. 그들은 분명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구름Nephelai』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나, 소포클레스Sophocles의 『엘렉트라Electra』에 등장하는 ‘엘렉트라’였다.
그리스의 7월은 정말 가마솥 같다. 플라톤이 “비옥하고 부드러운 흙은 사라지고, 골격만 남아 있는 말라비틀어진 육체의 뼈와 같다.”라고 비유했던가. 그리스는 대형 산불과 폭염으로 남은 산림마저 다 타들어가고 있다. 희생자가 생기면서 시름도 깊어진다. 그런 이 땅에 모처럼 비가 내린다.
아테네 중심부에 있는 아크로폴리스Acropolis에 오르면 검은 매년 6-8월 그리스 헤로데스아티쿠스오데온에서 열리는 아테네 축제와 함께, 그리스 축제의 백미는 단연 에피다우로스 고대 극장에서의 축제이다. 에피다우로스는 건축물이라기보다 자연에 순응되어가는 둥지 같다. 2,500여 년 전 그 시간의 빛이 완연한 곳이다. 낙조에 이어 암적색의 빛깔이 세상을 덮을 시각이 되면, 둥지 같은 극장 안이 열기로 들썩인다. 먹구름을 배경으로 문명의 아이콘,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이 보인다. 파르테논은 낙조 아래에서 인간의 살빛을 띠고 있다. 신전 기둥에는 무수한 인류의 낙서들이 무늬처럼 새겨져 있다.
그 옆으로는 제우스Zeus 신전과 에렉테이온Erechtheion 신전이, 그 아래로는 헤로데스아티쿠스음악당Herodes Atticus Odeon과 디오니소스극장Theatre of Dionysus이 물안개에 젖어 있다. 도시 지평선 너머로 섬광이 스치고, 곧이어 천둥이 미지의 안개를 뚫고 저 멀리 희미한 끝점에 있을 에게 해의 수평선까지 이어지는 여음을 남긴다. 도시는 자동차 경적음과 군중 소리로 요란하다. 많은 사람들이 우산도 없이 자욱한 안개가 깔린 거리에서 광장으로 흩어졌다 다시 무리 짓고, 건물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다. 순간 불길한 비명이 들린다. 그때 에렉테이온 신전에서 애잔한 플루트 소리가 들려온다. 알토의 음색은 주변 공기를 우울하게 드러눕힌다. 높은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아테네의 풍경, 비극에 등장한 듯 우비를 입은 코러스와 이를 지켜보는 관광객들. 파르테논 신전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돌면 보이는 것들이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언덕의 모든 것은 그렇게 연극적이다.
세상의 풍경을 담은 장소 ─ 어떠한 풍경이든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단 하나의 장소,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장소를 테아트론theatron이라고 불렀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바라보는 풍경처럼 전망 좋은 장소를 말한다. 테아트론은 세상의 모든 풍경을 담고 있다. 가까운 내 이웃의 존재뿐 아니라 자연의 고유한 빛이, 하늘뿐 아니라 장소와 이름이 있다. 그리고 언어와 시간과 인간의 삶이자 죽음 그 자체인 이야기가 있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남동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디오니소스극장이 보인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돌덩어리 몇 개뿐이지만, 그 폐허에는 언어보다 오래된 땅과 행위에 대한 기억이 있다. 지금도 서서히 언덕의 퇴적물처럼 흘러내리고 있는 이곳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지, 나는 극장을 향해 묻는다.
산에서 흘러내린 비듬한 지세를 이용해 만든 고대 그리스 극장은 지중해 연안으로 퍼져 나갔다. 그 옛날에는 지금 남아 있는 것보다 많은 테아트론이 존재했다. 유적이나 역사적 암시를 통해 밝혀진 것만 대략 40여 개라고 한다. 도시 여행 중에 만나는 그 장소는 매우 경이롭게 다가온다. 어떤 극장은 요새처럼 높은 구릉 위에서 도시와 평야, 강과 바다를 굽어보며 세상을 마주하고 있고, 어떤 극장은 쓸쓸히 모래언덕에 묻혀가고 있다. 고대 극장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장소였다. 고대인들에게 극장은 유일한 휴식처였지만, 거주민의 10분의 1도 수용치 못해 모두가 원하는 공연을 관람할 수는 없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극장 주변은 관중으로 장사진을 이뤘고, 축제가 열리면 시민들의 일상 공간이 되었다. 특히 아크로폴리스 주변의 정돈된 모습은 고단한 삶과 대조를 이뤘다. 고대인들은 축제가 있고 없음을 막론하고 하루 종일 극장 주변을 서성였고, 낮은 무대를 바라봤고, 그 아래 자신들이 사는 마을의 풍광까지 받아들였다. 멀리 에게 해까지 뻗어 있는 세상을 배경으로 극적 사건을 영입했고, 그 이야기를 자신의 운명에 연결시키기도 했다. 공연이 밤까지 이어질 때면 먼 산은 흐려지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소리에 고단했던 하루가 달콤했을 것이다.
기적의 성역, 에피다우로스 ─ 헬레닉 축제Hellenic Festival의 백미는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의 성역으로 알려진 작은 도시, 에피다우로스에서 벌어지는 공연이다. 그곳에 고대 그리스 극장의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극장은 건축물이라기보다 자연에 순응되어가는 둥지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랜 세월 두터운 흙속에 묻혀 있다가 1880년경이 되어서야 세상에 존재를 드러냈으니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죽은 자를 살려내고, 자신이 죽은 뒤에는 신이 되었다는 아스클레피오스의 놀라운 영험 때문이었을까. 그 뒤로 1950-1960년대에 체계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했고, 대규모의 복원 끝에 나타난 것이 오늘의 모습이다. 에피다우로스 고대 극장에는 2,500여 년 전, 그 시간의 빛이 완연하다. 극장 주변에서는 아직도 육상경기장과 병원, 온천, 고대 음악당의 잔해를 볼 수 있다. 이곳은 병든 사람들이 모여들어 육체적인 치료뿐 아니라 운동과 이완, 그리고 연극과 음악적 치유를 통해 마음을 다스렸던 힐링 센터였다. 유네스코는 1988년에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극장 입구, 파라도스parados에는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긴 줄이 만들어져 있다. 파라도스를 통해 극장에 들어서면 광대한 풍경이 펼쳐진다. 극장은 건축가 폴리클레이토스 2세Polycleitos the Younger가 설계했고, 기원전 4세기 말엽에서 기원전 2세기 중반에 두 단계에 걸쳐 지었다고 한다. 극장은 무대 건물인 스케네skene와 공연 공간인 오케스트라orchestra, 객석인 테아트론으로 이루어졌다. 원형의 오케스트라 한가운데에는 작은 제단thymele이 있다. 관람석은 55열로, 1만 4천 명을 수용할 수 있다. 평민석은 흰 석회암이, 앞줄의 귀족석은 붉은 석회암이 표식이 되어 구역을 나눈다. 물론 헬레니즘 시기에 생긴 구분이다. 무대의 지름은 20미터, 무대 주위에는 폭이 2미터인 배수장치가 있다. 무대에서 객석의 맨 뒤까지는 114미터에 이르고, 객석에는 앞의 36열과 뒤의 19열 사이로 통로가 가로지른다. 오케스트라 가장자리에 세워진 스케네는 땅속으로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 있다. 원래 이 위치는 오케스트라의 보조 공간으로만 사용되었으나 소포클레스 이후로 연극 형식이 발전하면서 연극의 주요 ‘장면’이나 ‘장소’를 표현하는 구조물이 되었다. 스케네는 건축적 의미뿐 아니라, 또 다른 세상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스케노그라피아skenographia적 공간이다. 고대 초기까지 오케스트라는 춤을 추거나 연기를 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스케네가 건축적으로 변모하면서 점차 오케스트라와 병용되었고, 이후 오케스트라는 사건과 인물의 중심이자 코러스가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이런 구조로 오케스트라는 관객과 배우가 어느 곳에서나 그 원호에 접경되는 극장의 중심이 된다.
곧 시작할 <메데이아Medeia>의 무대는 원형의 오케스트라에 거대한 구조물을 세워 객석을 향해 도전적으로 돌출되어 있다. 특이하게도 무대 한가운데에 반원형의 오케스트라 피트orchestra pit가 있고, 그 뒤로 검은 계단이 숲을 향해 설계되었다. 관객들은 석회암으로 된 객석을 조심스럽게 올라간다. 원호 끝점에 올라 바라보는 전체 풍경은 UFO가 내려앉을 듯 신비롭다. 어둑해지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성역 주변은 2,000년이 넘도록 아득한데, 오목한 그릇 모양을 한 객석은 관객들의 열기로 부글거린다. 객석은 이미 만석이다.
지중해 연안에 밤이 내린다. 낙조에 이어 암적색의 빛깔이 세상을 덮을 시각이 되자 객석은 또 한 번 열기로 들썩인다. 객석은 아직 한낮을 달군 빛의 온기로 따뜻하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입장한다. 오케스트라의 조율음은 언제나 외부의 풍경을 따뜻하게 감싼다. 무대장치 뒤에 있는 숲이 암막이 되어 극장을 에워싸고 객석은 아늑해진다. 하늘은 벌써 까마득히 먼 곳에서부터 은하가 동터온다. 일순 극장의 조명이 꺼진다. 짧은 정적 뒤에 이어지는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비극. 이날의 <메데이아>는 원작을 오페라로 바꾼 루이지 케루비니Luigi Cherubini의 <메데이아>이다. 서곡 신포니아sinfonia가 흘러나온다. ‘메데이아’가 등장하자 주변의 숲 속 풀벌레 소리가 자욱한 안개음이 되었다가 뚝 끊긴다. 폭발하는 분노와 격양된 감정을 효과적으로 잘 이용한 메데이아 역의 메조소프라노 안나 카테리나 안토나치Anna Caterina Antonacci가 노래하기 시작한다.
전염성 강한 공기 ─ 신비롭게도 어느 객석에서나 소리는 시각만큼 부드럽게 들려온다. 오케스트라의 미세한 악기 소리까지 객석에 온전히 전달된다. 오케스트라의 음악이 부드럽게 여과되는 반면, 소프라노의 음색은 청명하게 관객의 귓가에 꽂힌다. 수세기에 걸쳐 여러 공학자들이 이 극장의 비밀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했다. 그 비밀은 석회암에 있다느니, 객석 밑에 설치된 배수관이 공명을 일으킨다느니 하는 말들이 무성했다. 또 어떤 학자는 26도로 기울어진 객석의 각도 때문이라고도 했다. 정확한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으나 에피다우로스 극장에는 전염성 강한 공기가 있다. 이를테면 중위도 지역 표층 공기의 압력차로 발생하는 바람과 에게 해에서 불어오는 바람 등의 지형적 특성이 그 전염성 물질일 수도 있겠다. 일부 과학자들은 이 같은 현상을 ‘시각적 음향virtual pitch’이라고 이야기한다. 즉 무대와 객석 사이에서 맴도는 음향이 시각적으로 복구될 만큼 정확한 파동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가설일 뿐이다. 나는 불현듯이 바람의 신 아네모이Anemoi가 떠올랐다. 아네모이가 여름에는 남풍을, 겨울에는 북풍을 그려 인간을 미혹에 빠트리듯, 전염성 강한 바람으로 관객에게 동기를 제공하고 반응을 이끌어낸다. 9시에 시작한 공연은 1시가 가까워지자 절정에 이른다. 마침내 메데이아는 자신과 이아손 사이에서 낳은 두 아이를 검은 계단에서 찢어버리고, 단발마와 같은 열창 뒤에 하늘로 사라진다. 대단원이다. “브라보! 브라보!” 기립한 관객들은 한동안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다. 뜨거운 7월, 불가사의한 고대 유적에서 인간의 영혼을 뒤흔드는 뜨거운 공기가 극장을 맴돌다 사라진다.
공연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매우 어둡고 낯설다. 하지만 극장의 불빛이 밤하늘 너머에 잔상을 남긴다. 알 수 없는 푸른 색감이 시야 전체에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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