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정말 재미없는 학문인가?
01 철학에 대한 선입관 바꾸기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즈의 단편소설 『두 도시의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한 죄수가 오래 동안 감옥에서 복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긴 세월의 감옥생활을 통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옥생활에 익숙해집니다. 자신이 거처하는 좁은 공간이 조금도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안락함을 느낍니다.
이 감옥 안에 있으면 세상 걱정거리가 없어 좋습니다. 돈 때문에 신경 쓰지 않아 좋고, 자식 걱정 안 해 좋고, 아내 잔소리 들을 필요가 없어 좋 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과 행동에 신경 쓰지 않아 좋고 남의 눈치 볼 일 없고 채면 차릴 일이 없어 좋았습니다.
거처가 좀 누추하기는 하지만 주는 밥 먹고, 낮에는 시키는 일 하고, 밤 에는 자고 싶은 대로 자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감옥에서 별다른 불편함 없이 오히려 편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이와 같은 오랜 감옥생활 끝에 드디어 그는 복역기간이 다 되어 석방됩 니다. 그는 석방 후 자기 부모님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의 부모님은 아주 큰 저택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 저택에서의 첫날 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해 뒤척거렸습니다. 자기가 자는 방의 횡하니 터진 넓은 공간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 다. 고급 침대와 부드러운 이불이 조금도 편하지 않았습니다.
며칠 동안 잠을 설치다가 마침내 그는 넓은 자기 방 한 모퉁이에 벽돌을 쌓아 자기가 옛날 거처하던 감방만한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그는 그 좁은 공간 안에서 마음의 평안을 되찾고 안락한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했던 숨은 의도가 무엇일까요? 흔히 인간은 습관의 노예라고 합니다. 인간은 길들여지는 존재라는 거지요.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습관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평소 넓은 공간에 길들여진 사람은 넓은 공간이 편하지만 반대로 좁은 공간에 길들여진 사람은 좁 은 공간이 오히려 편한 것입니다. 이렇게 평소 길들여진 습관은 자기 도 모르는 사이 고착되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위력을 발휘합니다.
이렇게 고착된 습관 가운데 가장 고치기 힘든 것이 잘못된 ‘사고의 습관’입니다. 평소 부정적인 생각이 입력되어 있는 사람은 매사를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평소 인생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인생 을 항상 어둡게 봅니다. 평소 소극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무엇을 해 도 소극적인 자세로 나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잘못 고착되어 있는 생각을 편견 또는 선입관이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철학에 대해 이상한 편견이나 선입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철학은 어렵고 재미없는 학문이다.’ 또는 ‘철학 은 하늘의 뜬구름 잡는 이야기나 공리공론空理空論만을 일삼는 학문이다.’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철학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책만 봐도 골치가 아프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말입니다.
물체를 지배하는 법칙에 ‘관성의 법칙’이 있듯이 인간의 생각을 지배하는 법칙에는 ‘타성의 법칙’이 있나 봅니다. 인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타성적인 생각에 빠져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철학에 쉽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철학은 딱딱하고 어렵다.’는 잘못된 생각의 타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중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철학에 대한 이러한 편견과 선입관으로부터 벗어나기 만 한다면 우리는 철학을 정말 재미있게 그리고 가까이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02 나는 누구인가?
철학은 그렇게 어려운 학문이 아닙니다. 철학의 우선적인 과제나 목적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얻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독백과도 같이 ‘나란 어떤 사람일까’ ‘나란 대체 뭐야’라고 스스로 묻습니다. 평소 우리는 나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강한 회의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간단한 질문 같지만 사실은 매우 깊은 뜻을 지닌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 속에는 나라는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가?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인가? 내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는 무엇인가? 등과 같은 깊은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이란 무슨 난삽한 문제를 가지고 까다로운 논쟁을 벌이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은 나 자신에 관한 이와 같은 진지한 물음과 대답을 통해 나 자신을 올바로 알고 자신의 올바른 인생관人生觀을 확립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네 자신을 알라.” 는 말은 철학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네 자신을 알라는 말을 철학에서는 자기인식自己認識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정보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실로 엄청난 지식을 소유하고 있 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지 못한다면 그 지식은 사상누각砂上樓閣과 같은 공허한 지식이 되고 말 것 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지식이야말로 누구를 위한 지식이며 무엇을 위한 지식인지를 알 수 없는 지식을 위한 지식에 그치고 말 것이기 때 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천하를 얻고도 네 생명을 잃으면 무엇에 유익 하겠느냐”는 성경 구절과도 같이 “온 지식을 얻고도 네 자신에 대한 지식을 얻지 못하면 무엇에 유익하겠느냐”라는 물음을 자기인식을 위해 새삼 던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자기 자신을 찾아 자기 자신이 될 줄 아는 일이다.”라고 강조한 것도 바로 철학에 있어서 자기인식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흔히 현대를 가리켜 자기상실自己喪失의 시대라고 합니다. 현대인 들은 모두가 자기의 본래적인 고유한 모습을 잃어버리고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자기의 개성도 취향도, 자기의 생각도 판단도 모두 잃어버리고 유행과 여론에 휩쓸리고 집단과 대중 속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대 실존철학에서는 자기를 망각하고 대중의 물결 속에 떠밀려 살 아가는 이러한 인간을 평균인平均人이라고 말합니다. 현대사회에는 실 존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평균인들만이 거리를 메우고 있습니다. 자기 를 집단 속에 숨기고 익명匿名의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은 거지요. 현대 인들에게 자기인식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아는 것처럼 생각합니 다. 그러나 자기가 자신을 올바로 알고 정확하게 평가한다는 것은 결 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과연 자신의 인격, 자신의 능력, 자신 의 지식, 자신의 도덕성 등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 모두가 자신에 대한 무지無知로 인해 자기기만自己欺瞞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실제로는 그런 인간이 아닌데 자신의 진면목을 바로 보지 못하고 허황된 착각에 빠져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 리는 올바른 자기인식을 위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주의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철학의 목적은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의 허구적인 모습을 찾아내어 이를 무너뜨리는 데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거짓되고 가식적인 모습 을 직시하고 이를 냉철하게 비판하여 진실된 자신의 모습을 되찾는 것 이 곧 철학의 목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올바른 대답을 얻기 위하여 끊 임없이 자기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것,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속에 있는 모든 위선적인 것을 버리고 자기의 가장 진실하고도 본래적 인 모습을 발견하는 것, 즉 참된 자기발견과 자기회복自己回復을 추구하 는 일이야말로 철학의 중요한 과제와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03 이 세계와 우주는 어떤 존재인가?
철학의 또 하나의 관심은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계가 어떤 존재인 가를 올바로 인식하는 일입니다. 물론 이 경우 세계라 함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우주로서의 세계를 말합니다. 우리가 눈을 들어 시야를 광막 한 대우주로 향했을 때 지금까지 상식적으로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우주의 신비와 마주치게 됩니다.
적막한 어둠 속에서 밤하늘에 빛나는 저 무수한 별들을 주의 깊게 응시해 보십시오. 수백억 개가 넘는 별들로 이루어진 은하계와, 그러 한 은하계가 다시 수백억 개가 모여 형성된 대우주의 광대한 공간 속 에서 마치 하나의 티끌과 같이 보이는 태양계는 무엇이며 그 속에서 다시 하나의 점만도 못한 이 지구는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나올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가 얼마나 장엄하고 신비로운 존재인가를 한 번 살펴봅시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천체가 달입니다.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는 광속光速으로 1초 정도의 거리입니다. 광속이란 1초에 30만 km를 갈 수 있는 빛의 속도를 말합니다.
광속으로 지구에서 태양까지는 약 8분 정도 걸립니다. 그러니 달 보다는 태양이 훨씬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지요. 지구의 지름은 12,800km입니다. 광속으로 달리면 약 0.04초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태양계의 지름은 약 40조km, 광속으로 약 4년이 걸립니다. 그러니 태양계가 얼마나 광대한 공간이라는 것과 이에 비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얼마나 작은 공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거대한 태양계 가 은하계의 핵을 중심으로 30만 년에 한 바퀴씩 돌고 있습니다. 마치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1년에 한 바퀴씩 돌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양계도 은하계에 비교하면 그 크기가 미미한 점만 도 못합니다. 이 우주 안에는 수백억 개의 은하계가 있는데 크기가 각 각 다릅니다. 은하계의 크기는 지름이 보통 약 10-20만 광년이고 큰 은하계는 600만 광년에 이르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 지름이 4광년에 불과한 태양계의 크기를 이러한 은하계의 크기와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북두칠성 바로 남쪽에 사냥개자리라고 부르는 엽견좌가 있습니다. 주로 초여름에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자리입니다. 그런데 지구 에서 엽견좌까지의 거리는 100만 광년에 이릅니다.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은하계 가운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안드로메다 은하계는 지구에서 200만 광년의 거리에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안드로메다 별빛을 보았다면 그 별빛은 지금부터 200만 년 전에 발산된 빛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비하지 않습니까?
1990년 미국의 저명한 과학 잡지인 ‘저널 사이언스’에 당시 새로 발 견된 은하계가 소개 되었는데 과학자들은 이름을 ‘아벨Abel 2029’라 불 렀습니다. 그런데 이 새로 발견된 은하계는 크기가 우리 은하계의 약 60배라고 합니다. 우리 은하계의 지름이 10만 광년인데 비해 이 은하 계의 지름은 600만 광년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 은하계가 1990년에 발 견되었으니까 그때까지 우리는 이 은하계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다는 거지요.
그러나 이러한 은하계가 우주 전체는 아닙니다. 이러한 은하계들이 다시 천억 개 가까이 모여 대우주大宇宙를 형성합니다. 대우주의 지름은 약 150억 광년으로 추정됩니다. 은하계의 지름이 고작 10-20만 광 년인데 비해 대우주의 지름이 150억 광년이라면 은하계 또한 대우주 안에서는 하나의 점만도 못한 미미한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러한 대우주가 존재전체일까요? 아닙니다. 방금 말한 이 대우주란 지금까지 과학자들에 의해 최첨단 망원경을 통해 아주 어 렴풋이 파악된 존재전체의 한 모습일 뿐입니다.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나 미국 애팔로치아 산맥에 있는 미 공군 우주사령부의 최첨단 전파망 원경을 통해 아주 어렴풋이 과학자들에 의해 관측된 공간일 뿐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대우주의 한계를 넘어 인간의 경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는 무엇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흔히 인간의 시야에 포착되지 않는 이런 절대공간을 ‘무한無限의 세계’라고 부릅니다. 철학에서는 이러한 세계를 형이상학적 세계, 또는 초월적 세계라고 부르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형이상학적 세계, 초월적 세계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의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무한한 우주 공간에서 천천만만의 천체들이 일정한 궤도를 그리며 조화롭게 운행하도록 하는 자연의 질서와 법칙은 무엇이며 그 존재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이러한 우주가 스스로 팽창하고 생성소멸하는 것일 까요?
이 우주는 신비 자체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시야를 멀리 내다보면 우리의 상식과 과학의 한계를 넘는 무한의 세계가 신비의 베일에 가려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무한의 세계에 대한 의문에 대답을 주고자 하는 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즉 과학적 인식의 한계가 끝나는 곳에 바로 철학적 탐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철학은 상식이나 과학이 침묵하는 이와 같은 물음들에 대한 의문을 풀어나가고자 합니다. 인간이 몸담고 있는 이 세계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를, 그 존재론적 근거는 무엇인가를, 그리고 이 세계는 우리와 어떤 관계를 가지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가를 탐구해 나가는 것이 철학의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세계인식世界人識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철학의 중요한 과제가 자기인식과 세계인식이라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름 아닌 인생관人生觀과 세계관世界觀을 확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생관이란 인간과 인생을 보는 종합적인 견해를 말합니다. 즉 인간존재 자체에 대한, 인생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삶의 근본적인 태도와 목적 등에 대한 통일적이고도 체계적인 대답이 곧 그 사람의 인생관을 이루는 것입니다.
또한 세계관이란 세계를 보는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견해를 말합니다. 이 세계는 무한한가 유한한가? 세계의 존재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 세계를 움직이는 자연법칙은 무엇인가? 초월적인 신은 존재하는가? 등에 대한 통일적이고 체계적인 대답이 바로 그 사람의 세계관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철학을 탐구하는 이유나 목적은 바로 자신의 올바른 인생관과 세계관을 확립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한 번은 생선장수가 꽃을 파는 친구에게 놀러갔습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기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늦어 친구 집에서 하루 밤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자는 방이 온통 각종 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방 안은 꽃향기로 진동했습니다. 그 방에서 자는 생선장수는 꽃 냄새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는 밖에 나가 자신의 생선 바구니를 방에 가져와 비린내 나는 바구니를 머리맡에 놓고서야 비로 소 코를 골며 잠을 잤다고 합니다.
그렇지요. 지금까지 꽃향기에 익숙한 사람은 꽃 냄새가 좋고 생선 냄새에 익숙한 사람은 생선 냄새가 편하고 좋은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철학에 익숙하지 않아 막연히 철학은 딱딱하고 어렵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을 멀리한 것이지요. 그러나 철학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편견만 바꾼다면 철학을 얼마든지 친숙하게 가까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