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일본인은 변경인이다
‘변경인’의 정신 구조
‘변경’이라는 개념을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정의하고 넘어가기로 합시다. 변경은 ‘중화’와 쌍을 이루는 개념으로, 그것은 화이華夷 질서의 우주관cosmology 안에서 비로소 의미를 띠기 시작합니다.
세계의 중심에 ‘중화 황제’가 존재하는데, 거기에서 ‘왕화王化’(임금의 덕으로 감화하는 일. 왕의 덕으로 세상이 나아지는 것 - 옮긴이)의 빛이 널리 만방으로 퍼져나갑니다. 가까운 곳은 왕화의 은택을 풍부하게 누리면서 ‘왕토’라고 불리며, 멀리 떨어진 곳은 왕화의 빛이 충분히 미치지 않는 변경입니다. 변경에는 중화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는 번국蕃國(오랑캐 나라)이 있지요. 그것이 바로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그보다 더 바깥쪽에는 왕화의 빛이 아예 닿지 않아 화외化外(불교에서 부처의 교화가 미치지 못하는 곳. 또는 봉건적 관념에서 임금의 교화가 미치지 못하는 곳-옮긴이)의 암흑이 퍼져 있어요. 중심에서 주변으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점점 더 문명적으로 ‘어둡게’ 되고 주민들도 (표기상으로) 금수에 가까워집니다. 그러한 동심원적 우주관으로 세계의 질서는 정해져 있습니다.
화이질서의 가치관은 나라 이름에도 나타나 있어요. 중화 왕조는 진秦, 한漢, 수隋, 당唐, 송宋, 명明, 청淸 등 어느 것이나 한 글자로 나타냅니다. 이에 비해 사위四圍의 번국은 흉노匈奴, 선비鮮卑, 동호東胡, 거란契丹, 돌궐突厥, 토번吐藩처럼 두 글자입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종奴, 천민卑, 오랭캐胡, 미개족藩 등 어느 모로 보나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뜻을 지닌 다채로운 한자를 끼워 맞춰놓았습니다.
발해渤海, 백제百濟, 신라新羅, 임나任那, 일본日本 같은 명칭은 특별히 폄하하는 뉘앙스를 띠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국명이 두 글자’라는 점에서 ‘오랑캐夷’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이질서의 위계를 갖고 따져보자면, 일본열도는 동쪽 오랑캐東夷 땅 중에서 가장 먼 곳에 해당하지요.
중화사상은 중국인 단독으로 품은 우주관은 아닙니다. 화이 중 ‘이夷’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나서서 그 우주관을 공유하고 자신을 ‘변경’에 위치시켜 이해하는 습관을 지녀야만 이 질서가 제대로 기능할 테니까요.
일본열도는 적어도 중화 황제가 보기에는 오랫동안 조공국이었어요. 조공국에서는 중국 황제에게 신하의 예를 차리고 그 대가로 ‘국왕’ 책봉을 받지요(‘책봉’이란 황제가 벼슬을 수여하는 것을 말해요). 조공국은 조선朝鮮, 류큐琉球, 베트남, 르손Luzon 섬, 샴Siam(태국의 옛 이름―옮긴이), 버마, 팔렘방Palembang까지 널리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전역에 걸쳐 있습니다.
일본열도의 주민들이 그들을 ‘동이’로 규정하는 우주관에 동의하는 데 서명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800년쯤 전에 있었던 일이에요. 열도의 어떤 왕이 중화 황제에게 영토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데 대한 공적 승인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황제로부터 번지蕃地(오랑캐가 사는 땅―옮긴이)의 자치령 지배자라는 봉작封爵을 받았어요. 그것이 바로 히미코卑弥呼라 불리는 여왕이랍니다.
역사서 『삼국지三國志』의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는 왜인倭人에 대한 이야기가 약 2천 자 정도 나옵니다. 야요이彌生 시대 후기의 정치적 상황을 기록한 것으로, ‘야마타이국邪馬台國’이라는 국명이 처음으로 나오는 사료입니다(아마도 ‘아마토’라는 국명을 전해 들은 위나라의 역사가가 한자로 소리를 표기할 때 화이질서의 명명 규칙에 따라 ‘야마邪馬’라는 글자를 붙였겠지요). 이에 따르면 기원 239년에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는 위제魏帝에게 조공을 바치고 ‘위친왜왕’이라는 칭호를 받아 정식으로 책봉을 받습니다.
일본열도의 주민이 세계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사건은 변경의 자치구 지도자로서 위제의 승인을 받은 일입니다. 그 이전에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왜倭’의 국왕에게 ‘한왜노국왕漢倭奴國王’이라는 금인金印을 준 사실史實이 있습니다. 금인은 에도시대에 후쿠오카현福岡縣 시가志賀 섬에서 출토되었는데 기원 57년 때 것이라네요. “한漢의 속국인 왜, 나아가 일개 지방인 노국奴國의 국왕”이라는 봉작을 받은 왕에 대해 우리는 거의 아는 바가 없습니다.
일본열도에 민족의식이 언제 발생했는지에 대해 우리가 일단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땅에 최초의 정치 단위가 출현했을 때 그 지배자는 스스로를 극동의 번지를 지배하는 제후의 한 사람으로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일본열도의 정치의식은 변경인이라는 자의식에서 출발했다는 말이지요.
그 후 대륙과 교섭한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정치의식의 심화와 성숙을 보여주는 몇몇 에피소드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성덕태자聖德太子가 수隋나라 양제煬帝에게 친서를 보낸 ‘사건’입니다. 열도의 주민이 화이질서를 어떤 식으로 내면화했는지, 이 사건을 통해 엿볼 수 있어요.
이때 보낸 친서는 잘 알려져 있듯이 “해 뜨는 나라의 천자天子, 이 글을, 해 지는 나라의 천자에게 보내노라”는 문구로 시작합니다. ‘대등외교’를 지향한 이 글을 보고 수나라 사람들은 무례함을 느끼고 격노했다고 사서史書는 전합니다. 하지만 성덕태자에게 일부러 수나라를 도발해서 외교 관계를 위기에 몰아넣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선진적인 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견수사遺隋使(야마토 조정에서 수나라로 파견한 사절. 일본의 기록에 따르면 607, 608, 614년에 걸쳐 총 3회인데, 중국 측의 기록에는 600년에도 파견한 것으로 되어 있다―옮긴이)에는 다수의 유학생과 유학승을 동행시켰기 때문에 이미 저쪽과 이쪽의 민도民度의 차이는 충분히 알고 있었지요. 중국은 속국으로부터 조공을 받고 그 응답으로 은상恩賞을 하사하는 식으로만 주변 제국과 교통한다는 규칙도 외교적 의례라고 숙지했겠지요. 그래서 ‘대등’이라는 어조에는 그 나름의 ‘저의’가 있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게 뭘까요?
나는 이 대목에서 약간 위험한 사변을 펼쳐볼까 하는데요. 그것은 바로 상대방이 채용하는 외교적 의례를 모르는 척하는, 상당히 고도의 외교술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대가 채용하는 규칙을 모르는 척하면서 ‘실질만 취하는’ 것이 그 후에도 계속 이어져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 전통적인 일본의 외교전략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메이지유신明治維新 후, 신정부는 쓰시마 번주의 중개로 조선에 정체政體 변환을 고지하는 글을 보냈는데, 여기에 조선은 잘못된 글을 썼을 것이라고 무시했기 때문에 답장을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우리나라, 요즈음, 시세 일변하여, 정권은 오로지 황실에 속한다”는 문장에서 ‘황실’이라는 말이 예에 어긋난다고 본 것이죠. 조선은 태조 이성계李成桂 이래 5세기에 걸쳐 명, 청의 책봉을 받고 스스로를 ‘소중화’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자칭할 정도로 화이질서를 내면화했던 나라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황皇’은 청조 황제 이외에 존재하지 않아요. 어찌하여 조선에서 훨씬 떨어진 변경의 번지 지배자가 ‘천황’ 따위의 칭호를 쓸 수 있는가? 그들에게는 믿기 어려울 만큼 무례로 비쳤겠지요.
‘해가 뜨는 나라의 천자’와 ‘황실’의 사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일본과 조선에서 화이질서를 내면화한 정도가 꽤 다르다는 점입니다. 조선이 오랫동안 일본열도를 ‘만이蠻夷’라고 내려다본 까닭 중 하나는 일본인이 지나치게 ‘촌놈’인데다 화이질서의 올바른 예의를 모르고(혹은 모르는 척하고), 윗사람에 해당하는 조선에 대해 마땅한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시바 료타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조선은 쉽게 말해 중국에 있는 황제를 본가로 삼고 조선의 왕은 분가라는 예를 취했다. 지리적으로는 번蕃이지만 사상적으로는 유교이기 때문에 자신은 위대한 화華의 일부라는 사고방식이었다.
그만큼 조선의 유교는 화이의 차를 세우는 데 과민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이理’에 따르면 일본은 번국이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조선이라는 화에 조공을 바치러 오지 않는 것은 일본이 그만큼 무지했기 때문이라는 형식론이 성립한다.
조선은 예부터 스스로를 문명이라 칭하고 일본을 야만으로 간주했지만, 이것은 역사적 사실에 의거하여 이끌어낸 결론은 아닙니다. 왜구가 해안 지방을 침략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침공했기 때문에 그런 평가가 자리를 잡은 것이 아니라 우주론에 입각해서 보면 그렇게 된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일본열도가 화이질서 안에서 ‘번지’라는 범주에 들어가는 이상, 일본이 하는 모든 일에는 형식론적으로 ‘무지’하다는 꼬리표가 붙는다는 것이지요. 무슨 일을 해도 일본인의 행위는 무지하기 때문에 틀렸다. 이것은 화이질서라는 이데올로기에서 보면 자명한 결론입니다. 일본인도 그런 식으로 자기들 모습이 비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일본열도는 “왕화의 빛이 멀리 미치지 않는 변방의 땅”입니다. 그래서 중화 같은 ‘정식正式’에는 이런저런 번거로운 규칙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정보에 어둡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변명이 통했지요. 누구에게 하는 변명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르는 척’함으로써 이쪽 사정에 맞추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변경이 아니면 통하지 않는 이점으로 볼 수 있어요.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일본 국왕’이라 칭한 의례상의 ‘잘못’도 그런 문맥을 고려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일본 국왕’은 일본열도의 지배자라는 칭호니까 이치를 따지자면 천황가가 관리해야 할 관직이겠지요(천황이 스스로 그렇게 칭하느냐는 다른 문제지만). 하지만 아시카가 장군은 멋대로 자신을 그렇게 불렀어요. ‘정이征夷대장군’이라는 아시카가의 칭호는 위계상으로 볼 때 천황으로부터 군사력을 위탁받은 군인 관료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아시카가는 명나라와 조공무역을 하려고 ‘일본 국왕’이라는 상위 관료의 관명을 사칭한 것입니다. 천황의 하위 관료인 아시카가 장군이 ‘일본 국왕’을 ‘사칭’하여 명나라 황제에게 ‘신하의 예’를 갖춘 것은 천황에 대해서도, 명나라 황제에 대해서도 무례를 저지르는 일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어떤 회사 과장이 자기를 사장이라고 사칭하고 거래처에 가서 머리를 숙이고 영업하는 꼴이니까요. 예를 다한 것인지 바보 놀음을 한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 무렵 무로마치室町 막부 사람들이 어떤 의논을 한 끝에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짐작할 길은 없지만, “중화 황제에게 정중하게 신하의 예를 갖출 생각이 없다”는 태도만은 느낄 수 있어요.
도쿠가와 장군도 조선통신사에 대해(다시 말하면 간접적으로는 중화 황제에 대해) 처음에는 일본 국왕이라고 칭했다가 도중부터 ‘일본국 대군大君’으로 칭호를 바꾸었고, 그 후 다시 국왕으로 되돌아갔어요. 정체 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일본열도의 왕이 되었다가 하위 관료가 되는 등 직함을 이리저리 바꾸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해괴한 짓일 뿐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예의가 아닌 것 같지만, 일본인은 그런 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혹은 알면서도 일부러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지만요).
확실히 외국을 상대할 때 누가 국가 원수인지에 대해서는 막부 말기까지 일본인은 별로 개의치 않았어요(그럴 필요가 없었죠. 쇄국 상태였으니까요). 그러다가 막부 말기에 초슈번長州蕃이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을 상대로 한 시모노세키下關전쟁(1863~1864)이 일어납니다. 양이攘夷주의를 취했던 초슈번이 시모노세키에 있는 포대를 동원하여 항해 중인 외국 선박에 대포를 쏘자, 이에 화가 난 4개국이 해병대를 보내 포대를 점령해버린 사건입니다. 이때 양국의 강화 조건에는 배상금 3백만 달러가 포함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배상금 청구서가 초슈번이 아니라 도쿠가와 막부 앞으로 온 겁니다. 막부는 물론 이 배상금을 지불하고 싶지 않았지요. 하지만 형식적으로는 조정의 의뢰를 받은 막부가 ‘양이洋夷’를 공격하라고 명령한 것을 여러 번들이 이행했을 뿐이니까, 장군이 곧 국왕이라는 허구를 일관성 있게 밀고 나가려면 할 수 없이 배상금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막부가 절반을 지불하고 나머지는 메이지 정부가 분할 지불했다고 하는군요).
또한 1863년에는 사쓰마번薩摩蕃이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때 발생한 배상금 2만5천 파운드도 결국 막부가 대신 내주었어요. 이 전쟁의 원인은 다이묘 행렬을 방해한 영국 상인을 사쓰마번의 무사가 참살한 나마무기生麥사건(1862)이었는데, 이때의 배상금 10만 파운드도 막부가 냈습니다.
이 시기 막부가 ‘울며 겨자 먹기로 배상금을 지불했다’는 점이 참 재미있습니다. 정이대장군은 국왕이라고 칭하는 장점이 있을 때는(그럴 때가 실제로 있었지요. 대외무역을 독점했으니까요) ‘짭잘한 장사’였는데, 외상만 갚다 보니 ‘손해 보는 장사’가 되었어요. 그러자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는 간단하게 1867년에 정권을 조정에 돌려주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해버립니다. 우두머리의 이런 ‘가벼움’은 친왜위왕 이래 전해 내려오는 전통인지도 모르겠어요. 어차피 ‘동이’ 번국의 왕이 누구라고 한들, 상대가 일일이 신경을 쓰지도 않을 테니 누구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도 아무 상관없었겠지요. 중요한 것은 알맹이라는 말인데요(비슷한 일이 판적봉환版籍奉還 때도 일어납니다. 옛 번주들은 희희낙락하며 번주라는 칭호를 버리고 화족의 대열에 올라 수도에서 거주할 것을 선택했습니다. 한 나라를 꾸려나가야 할 정치적 책임을 벗어던지고 현금 수입의 보장에만 기뻐한 것이죠)
삐딱한 생각이긴 한데, 화이질서 안에서 동이라는 지위를 받아들임으로써 도리어 열도 주민은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재량을 획득했다고 볼 수는 없을까요? 조선은 ‘소중화’라는 명분으로 ‘본가의 정통’을 고집한 탓에 정치제도나 국풍문화에서 독창성을 발휘할 수 없었던 데 비해, 일본열도는 ‘왕화의 빛’이 닿지 않는 변경이기 때문에 거꾸로 지역 사정에 맞추어 제도와 문물을 가공하고 고안해내는 재량이 허용된 것이 아닐까요?(그렇다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 허용해온 것은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은 대륙의 율령제도(중국 수나라와 당나라 때의 법전―옮긴이)를 도입하면서 과거科擧와 환관宦官은 도입하지 않았습니다. 딱히 과거나 환관 제도의 타당성을 거듭 논의한 끝에 그렇게 한 게 아니라 어쩐지 ‘우리 가풍’에 맞지 않는 것 같으니까 그런 제도의 존재를 모르는 척했습니다. 아무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었으니까 말이지요.
이러한 국제관계가 드러내는 미묘한 (아마도 무의식적인) ‘불성실함’은 어쩌면 변경이 부릴 수 있는 솜씨 중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머나먼 곳에 ‘세계의 중심’이 있다고 가정하고 스스로의 위치를 변경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우주론적으로 심리적 안정을 우선 확보하는 한편, 열등한 지위를 무기로 삼아 자기 형편에 맞게 마음대로 해나가는 거죠. 이렇게 겉으로는 복종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딴 마음을 먹는 성격이야말로 변경인 멘탈리티의 두드러진 특징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주론적 열등함’을 오히려 무기로 삼아 이익 추구에 전념한다는 생존전략인 셈인데요. 이것은 1945년 일본이 패전한 뒤 일본인이 채택하여 역사적 성공을 거둔 예가 아닐까요?
헌법 9조와 자위대의 ‘모순’에 대해 일본인이 채용한 ‘사고 정지’는 그러한 교활한 지혜 중 하나겠지요. 헌법 9조도 자위대도 미국이 전후 일본에 ‘강요한’ 것입니다. 헌법 9조는 일본을 군사적으로 무력화시키기 위해, 자위대는 일본을 군사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요. 다시 말해 둘 다 미국의 국익을 위한 것이었지요. 그러니까 헌법 9조와 자위대는 미국의 국책으로 볼 때 전혀 모순이 없습니다. “군사적으로 무해하면서 유용한 나라가 되어라”라는 명령, 즉 일본은 미국의 군사적 속국이 되어라, 이것이 이 두 가지 제도의 정치적 의미니까요.
누가 보더라도 의미가 뚜렷한 메시지를 일본인은 모순적인 메시지로 무리하게 해석해냈습니다. 헌법 9조와 자위대가 양립할 리는 없다고, 개헌파도 호헌파도 서로 목을 조를 듯한 기세로 격론을 펼쳤지요. 이 두 제도 사이에 모순이 전혀 없다고 이야기하는 정치가는 내가 아는 한 한 사람도 없습니다. 미국의 합리적이고 수미일관한 대일정책을 ‘모순적’이라고 주장하는 교묘한 무지에 의해 일본인은 전후 65년에 걸쳐 ‘미국의 군사적 속국’이라는 트라우마적 사실을 의식적으로 표면화하는 것을 피해왔습니다.
나는 이것이 정치적으로 교활한 재주라고 봅니다. 이것은 우발적이고 단발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해가 뜨는 곳의 천자’가 존재한 이래 변경인으로서 ‘일부러 모르는 체’ 연출해온 것을 변주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비핵 3원칙’도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일본 정부는 “핵무기를 제조하지 않는다, 갖추지 않는다, 갖고 들어오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웠습니다. 그런데 미국 군함은 이를 무시하고 핵무기를 갖춘 채 일본의 항만으로 들어왔어요. 일본 정부는 그것을 “입항 전에 핵무기만 내려놓았다”는 식으로, 상식적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설명으로 살짝 피해갔습니다. 정치가도 관료도 미디어도 한결같이 핵무기를 ‘갖고 들어왔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쇠를 한 것이죠. “미국만 좋으라고 속아주는 멍청한 나라”인 척함으로써 비핵 3원칙과 미국의 핵무기 소지 사이의 ‘모순’을 호도했습니다. 보통은 이런 짓을 하지 않지요(아니, 가능하지 않지요). 어떤 독립국이 “다른 나라에 속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는 척함으로써 번잡스런 사태를 피하고 보는” 기교를 부리겠어요? 그러나 일본은 그것이 가능한 나라입니다.
비무장중립론도 그렇습니다. 비무장을 국시國是로 삼아 살아남은 나라는 역사상 존재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런 비현실적인 정략政略이 일본 국내에서는 일정한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세간의 상식을 모른다’는 무지로부터 현실적 이익을 실제로 뽑아내고 있으니까요(전후 65년 동안 우리나라의 군인이 타국 영토에서 외국인을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틀림없이 일본에 유형무형의 이익을 가져다주었어요). ‘비현실’을 교묘하게 이용한 ‘현실주의’, ‘무지’를 가장한 ‘교활한 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국민이 일본인 말고 또 있기나 할까요?
반대로 어떤 이유에서 거국일치의 노력이 필요할 때는 “세간의 상식을 모르는 촌놈인 채 있는 것이 좋다는 말이야?”, “세계 표준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잖아?” 하는 언사를 채용합니다. 예외 없이 채용하지요. 그런 공갈이 유효한 것은 자기들이 세계 표준에 못 미친다는 것에 대해서 일본 국민 전원이 인식을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인이 사용하는 ‘책임 회피의 말’과 ‘격문檄文’은 결론만 다를 뿐, 첫머리는 똑같습니다.
일본에서는 ‘화이질서 주변의 변경이니까’라는 전제에 입각해서 그때마다 이쪽 사정에 따라 전혀 다른 정반대의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변경인이라는 것’은 일본인 전원에게 공통적 전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우주관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버금가는 스케일을 가진 다른 우주관을 대치시킬 수밖에 없는데, 실제로 일본인은 동아시아 전역을 아우를 만한 자율적 우주론을 갖고 있지 않거든요. 과거에도 현재에도 일본인은 한 번도 자율적 우주론을 가진 적이 없어요(그리고 앞으로도 가질 수 없어요).
물론 그것은 일본인이 “우리나라야말로 세계의 중심”이라는 과대망상에 빠진 적이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몇 번이나 있었지요). 하지만 그런 행세는 늘 중화사상을 역전시키는 형태로만 이루어졌어요. “일본이 빛의 중심이고 중국이나 조선은 몽매한 번국”이라는 식으로 화이질서의 도식을 뒤엎었을 뿐입니다. 중심에서 ‘황화皇化’의 빛이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간다는 서사의 구조는 그것을 그대로 복제한 것입니다. 열도 주민은 신공神攻황후의 ‘삼한三韓 정벌’에서 중일전쟁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반도나 대륙을 침공했습니다. 그렇다고 열도 주민이 중화사상과 힘겨루기를 할 수 있는 독창적인 우주론을 창출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그 모든 일은 화이질서 우주관의 내부적 사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길 안내’를 앞세워 명나라를 쳐들어가서 멸망시키자는 장대한 뜻을 품었습니다. 커다란 선단船團을 조직해서 대륙을 침공하고 ‘드넓은 벌판에서 사슴을 쫓는’ 그림은 분명 스케일이 큰 구상입니다. 하지만 도요토미의 생각은 명나라를 무너뜨린 다음 베이징에서 후양성後陽成 천황을 맞이하여 거기에 정복 왕조를 세우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렇다면 이 전략 자체는 몽골족이나 여진족, 만주족이 행한 바와 다를 바 없어요. 변경인이 중앙을 제패하는 일은 역사상 몇 번이나 반복하여 일어났습니다. 변경의 번족이 중화에 침입하여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여 화이질서를 재생시킨다는 과정이야말로 화이질서의 동적 구조 그 자체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 토벌에 성공했다고 해도 거기에는 ‘일본족’의 새로운 왕조가 세워질 뿐, 화이질서의 우주론 자체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만약 변경인이 참으로 중화사상을 초극하여 화이질서의 주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그것은 중심과 주변의 서사와는 다른 서사를 창조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그 서사가 딱히 독창성에 가득 찬 것일 필요는 없어요. ‘대등한 파트너와 손잡은 연합이나 동맹’이라도 좋고, ‘강령을 공유하는 집단의 느슨한 연합’도 괜찮고,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에 의한 통합과 구제의 서사’라도 좋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류 역사상 집단의 통합에 실제로 쓰인 서사라면 무엇이라도 상관없어요. 여하튼 ‘중심과 변경’ 이외의 서사에 따라 일본인의 세계전략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열도 주민이 깊이 내면화한 ‘변경인의 멘탈리티’는 해제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결국 그렇게 못했습니다. 중심과 주변의 서사가 아닌 어떤 서사로 우리나라의 기원과 소명을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기회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본문 1장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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