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 한 젊은이가 내가 낸 광고를 보고 찾아와 사무실 문턱에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여름이라 사무실 문이 열려 있었다.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창백하리만치 말쑥하고, 가련하리만치 점잖고, 구제불능으로 쓸쓸한 그 모습이! 그가 바틀비였다.
그의 자격 조건들에 관해 몇 마디 나눈 뒤 나는 그를 고용했다. 그렇게 두드러지게 조용한 풍모를 가진 사람을 내 필사원단(團)의 일원으로 둘 수 있어서 기뻤다. 나는 그의 그런 면이 터키의 변덕스런 성질과 니퍼스의 불같은 성질에 유익한 영향을 미치리라 생각했다.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사무실은 젖빛유리 접문을 사이에 두고 둘로 나뉘어 있었다. 한쪽은 필경사들이 사용했고 다른 한쪽은 내가 사용했다. 나는 기분에 따라 접문을 활짝 열어놓거나 닫아놓았다. 바틀비에게는 접문 옆 구석 자리를 주기로 결정했다. 내가 있는 쪽이었다. 자잘하게 해야 할 일을 생각해서 쉽게 부를 수 있는 곳에 이 조용한 청년을 두고자 함이었다. 나는 그의 책상을 방의 측벽에 난 작은 창문 가까이에 놓았다. 원래는 그 창을 내다보면 옆으로 더러운 뒤뜰과 벽돌이 보였지만 잇따른 건축으로 인해 현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빛만 약간 새어 들어올 뿐이었다. 창문에서 옆 건물의 벽까지는 삼 피트도 되지 않았고, 마치 돔의 아주 작은 틈으로 새어 들어오듯 빛이 멀리 위에서 두 고층 건물 사이로 내리 비쳤다. 나는 조금 더 만족스런 배치를 위해 높은 초록색 칸막이를 구했다. 그러면 바틀비가 내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으면서도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프라이버시와 사회성이 함께 어우러졌다.
바틀비는 처음에는 놀라운 분량을 필사했다. 마치 오랫동안 필사에 굶주린 것처럼 문서로 실컷 배를 채우는 듯했다. 소화하기 위해 잠시 멈추는 법도 없었다. 낮에는 햇빛 아래, 밤에는 촛불을 밝히고 계속 필사했다. 그가 쾌활한 모습으로 열심히 일했다면 나는 그의 근면함에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필사했다.
필경사가 하는 일 중 자신이 쓴 필사본의 정확도를 한 자 한 자 검증하는 것은 당연히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한 사무실에 필경사가 둘 이상이면, 한 사람이 필사본을 소리 내어 읽는 동안 다른 한 사람은 원본을 맡는 방식으로, 검증하는 일을 서로 거든다. 매우 따분하고, 넌더리나고, 권태로운 일이다. 쾌활하고 낙천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전적으로 견딜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쉽게 헤아릴 수 있다. 이를테면 혈기 왕성한 시인 바이런이 바틀비와 함께 앉아 법률문서를, 가령 꼬불꼬불한 글씨로 빽빽한 법률문서 오백 장을 기꺼운 마음으로 검증했으리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로서는 믿지 못할 말인 것이다.
간혹 일을 서둘러야 할 경우 나는 간략한 문서를 검증하는 작업에 터키나 니퍼스를 부르고 내가 직접 거드는 버릇이 있었다. 내가 바틀비를 칸막이 뒤편 편리한 위치에 둔 것은 그런 자잘한 경우에 그의 품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사흘째 되던 날인가에 있었던 일이다. 바틀비가 자신의 필사를 검증할 필요가 생기기 전이었다. 나는 처리해야 할 작은 일을 마무리하려 급히 서두르다가 불쑥 바틀비를 불렀다. 급한 나머지, 그리고 당연히 즉각적으로 응할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에 나는 책상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원본을 내려다보며, 필사본을 든 오른손을 다소 신경질적으로 옆으로 뻗었다. 바틀비가 그의 은둔처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낚아채어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일에 돌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 자세로 앉아, 나는 그를 부르며 용건이 무엇인지 빠르게 말해주었다. 나와 함께 적은 양의 문서를 검증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틀비가 그의 은둔처에서 나오지 않고 매우 상냥하면서 단호한 목소리로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을지, 아니 당황했을지 한번 상상해보라.
나는 충격받은 감각기관들을 추스르며 잠시 완벽한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곧 내가 뭘 잘못 들었거나, 바틀비가 내 말뜻을 완전히 잘못 알아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어조로 요구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만큼 분명한 어조로 그 전과 같은 대답이 되돌아왔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안 하는 편을 택하다니.”
나는 크게 흥분하여 일어나 성큼성큼 방을 가로지르며 그의 대답을 되풀이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 머리가 어떻게 됐나? 여기 이 서류의 검증을 도와주게. 자, 여기 있네.”
내가 그에게 서류를 들이밀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나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아무 생각 없는 듯 태연했고, 회색 눈은 흐릿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동요해서 생긴 주름살 한 줄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태도에 최소한의 불안, 분노, 성급함, 무례함이 있었다면, 다시 말해 정상적으로 인간다운 데가 있었다면, 나는 필시 그를 난폭하게 사무실 밖으로 내쫓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더라도 실제로는 소석고로 만든 창백한 키케로 흉상을 내친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나는 잠시 그를 응시하며 서 있었다. 그는 쓰던 것을 계속 써나갔다. 나는 곧 내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야.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좋을까? 하지만 업무가 나를 재촉했다. 나는 이 문제를 다음에 한가할 때 처리하기로 하고 일단은 잊기로 했다. 그리고 다른 방에서 니퍼스를 불러 신속하게 문서를 검증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바틀비가 긴 문서 네 부를 끝냈다. 내가 출정한 형평법 고등법원에서 일주일간 취한 진술을 네 부로 필사하는 일이었다. 그 문서들의 검증이 필요해졌다. 중요한 소송이었으며 고도의 정확성이 요구됐다. 나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옆방에서 터키와 니퍼스, 진저 너트를 불렀다. 사원 넷이 필사본을 하나씩 맡으면 원본은 내가 읽을 참이었다. 따라서 터키, 니퍼스, 진저 너트가 각자 손에 서류를 들고 일렬로 의자에 앉자 나는 바틀비를 이 재미있는 그룹에 끼도록 불렀다.
“바틀비! 어서! 내가 기다리고 있네.”
카펫이 없는 바닥에 그의 의자 다리가 천천히 끌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곧 그가 자신의 은둔처 입구에 모습을 드러내고 섰다. 그가 온화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죠?”
내가 급하게 말했다.
“필사본, 필사본. 우리가 필사본들을 검증할 참이네. 자, 여기 있네.”
나는 그에게 네 번째 필사본을 내밀었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칸막이 뒤로 조용히 사라졌다.
나는 종렬로 앉아 있는 사원들의 상석에 잠시 소금 기둥이 되어 서 있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나는 칸막이 쪽으로 진격했다. 그리고 그에게 그런 터무니없는 행동에 대한 이유를 요구했다.
“왜 거부하는 거지?”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나는 곧바로 엄청나게 성을 냈을 것이다. 그가 뭐라고 더 말하든 모두 비웃고, 면전에서 그를 굴욕적으로 떠밀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틀비에게는 이상하게 나의 성질을 누그러뜨릴 뿐 아니라, 놀랄 만큼 나의 마음을 움직이고 당혹스럽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그가 알아듣도록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검증하려는 이것들은 자네가 쓴 필사본들이네. 자네로서는 수고를 더는 일이야. 한 번에 필사본 네 부를 검증하게 되니 말일세. 이건 상례야. 필사원들은 모두 자신의 필사본 검증을 도울 의무가 있네. 그렇지 않은가? 말을 안 할 셈인가? 대답 좀 해보게!”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그가 플루트 소리 같은 음색으로 대답했다. 내가 말하는 동안 그는 내가 하는 모든 말을 신중히 숙고하는 듯했다. 말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저항할 수 없이 당연한 그 결론을 부정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보다 우위에 있는 중요한 사정 때문에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럼 자네는 내 요구에, 상례와 상식에 의거한 요구에 응하지 않기로 했다는 건가?”
그는 간결하게 그 점에서는 내 판단이 옳다고 인정했다. 그렇다. 그의 결정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었다.
(본문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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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허먼 멜빌 Herman Melville 1819~91
뉴욕에서 태어났다. 그가 열두 살 때 부유한 무역상이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죽자 가세가 급격히 기운다. 학교를 그만두고 가게 점원, 은행원, 농장 일꾼, 교사 등을 전전하나 변변한 일자리를 얻지 못하자 무역선과 포경선, 군함을 타고 남태평양 여기저기를 떠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타이피』(1846) 『오무』(1847) 같은 해양모험소설을 발표해 호평을 받으며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문명 비평과 사회 풍자를 담은 실험작 『마르디』(1849)를 발표하면서 평론가들에게 냉대받고 책 판매도 부진해 생활고에 시달린다. 그의 최고작이자 미국 현대문학의 걸작으로 꼽히는 『모비 딕』(1851) 또한 그가 죽을 때까지 초판 삼천 부도 채 팔지 못했을 만큼 외면받는다. 절망과 분노 속에서 은둔하면서도 그는 자신이 속한 시대와의 갈등 그리고 창작의 고뇌를 담은 『피어』(1852) 「필경사 바틀비」(1853) 등의 뛰어난 중단편과 장편, 그리고 방대한 시편을 발표한다. 상징이 풍부한 작품들로 미국 사회와 서구 문명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과 비판의식을 보여준 허먼 멜빌은 1920년대에 이르러 재평가되면서 오늘날 19세기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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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소개
하비에르 사발라 Javier Zabala
1962년 스페인 레온에서 태어났다. 원래 수의학과 법학을 전공했으나 오비에도 예술학교에 들어가 그래픽디자인과 일러스트를 다시 공부했다. 스페인뿐 아니라 스위스, 이탈리아, 미국, 중국 등 각국의 출판물에 그림을 싣고 있다. 2005년 볼로냐아동도서전에서 『돈키호테』가 볼로냐 라가치상 픽션 부문 우수상을 받았고, 같은 해 『꼬마 병사 살로몬』이 스페인 문화부가 수여하는 프레미오 나시오날 데 일루스트라시온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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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공진호
뉴욕시립대학에서 영문학과 창작을 공부했다. 뉴욕에서의 오랜 직장 생활을 뒤로하고 현재 서울과 뉴욕에서 번역과 창작에 힘쓰고 있다. 옮긴 책으로 『드니로의 게임』 『교수들』 『돈을 다시 생각한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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