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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공지
아이디 21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
끊었다 다시 걸기를 벌써 여섯 번째. 씨엔톡 회원 열댓 명에게 홈페이지의 공지 사항을 확인시키기는 수월했다. 이 사람하고만 불통이다.
다른 회원과 달리 인적 사항은 물론 실명 기재도 안 된 사람이 전화까지 받지 않으니 쓸데없는 짓에 매달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러는 것 말고 장미가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실장도 아이디 21을 제대로 떠올리지 못하는 마당에 두 달 갓 넘은 보조가 상대를 막연하게 느끼는 거야 당연했다. 장미가 뭘 느끼든지 무슨 생각을 하든지 긴급 공지 안내는 사장이 시킨 일이었다.
회원들에게 빠짐없이 연락해. 아무도 헛걸음하지 않게.
21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했을 때 실장은 병뚜껑 따듯이 툭 뱉었다.
어쨌든 알려.
21이 사장에게 중요하다고 실장이 흘렸던 말을 장미는 기억했다. 그게 다른 회원들과는 월등히 차이가 나는 회비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도 눈치챘다. 영화를 보고 잡담까지 마치고 일어나며 십시일반 내게 돼 있는 회비를 21은 매번 계좌로 입금한다고 했다. 모임에는 거의 나오지도 않으면서 꼬박꼬박. 그것도 제법 많이. 그 정도면 21은 이쪽에서 최대한 예의를 갖춰야 할 고정 기부자인 셈이었다.
실장 쪽 분위기가 아무래도 조용히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실장은 아까부터 사진 문제로 손님과 신경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저도 모르게 그쪽을 흘끔거리면서도 장미는 내내 사장의 눈에 띄는 자리에서 통화에 집중하는 척했다. 사장이 또 무슨 일을 시킬지 몰라 대기하는 모양새였으나 시키는 일을 처리하느라 애쓰고 있다는 걸 보여 주려는 속내가 더 컸고 도무지 통화가 되지 않아 걱정이라는 듯 미간을 찡그리는 짓 역시 혹시라도 사장이 이쪽을 볼 때를 대비한 영악스러운 짓이었다. 실장이 붙잡힌 문제와 거리를 두기에도 긴급 공지 안내는 적당한 구실이었다.
이 정도면 21은 전화기 너머에 없다. 어쩌면 가짜. 장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인내심을 가지라는 듯 지루한 신호음 끝에는 ‘없는 번호’가 아니라 ‘나중에 다시 걸어 달라’는 멘트가 붙어 있었다.
다들 바쁜 틈에서 통화 버튼이나 재차 누르며 일하는 척 하는 게 처음에는 좀 재미있었는데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손톱을 잘근거리는 바람에 긁혀 떨어진 매니큐어가 앞니에 들러붙는 것도 찝찝했다. 싸구려 매니큐어. 진주가 좋은 걸 샀을 리 없다.
그녀 혹은 그가 전화를 받든 말든 장미로서는 관심 없었다. 사회복지회에서 갑자기 아기들을 데려온다는 연락에 사장이 정기 상영을 취소하고 사진 배경을 세팅하느라 정신없는 것도 마찬가지. 이것들은 사장 일이거나 이 사진관의 일인 것이다. 장미 머릿속에는 오로지 아기들이 오기 전에 여기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베이비 소품에 신경 좀 쓸걸.
아까부터 사장은 그게 걸리는 모양이었다.
사회복지회에서 아기 데려오는 일이 처음도 아닌데 허둥댈 만큼 사장이 예민해진 건 방송국의 연락 때문이었다.
입양 떠나는 아기 사진을 무료로 찍어 주는 사진관을 취재하고 싶다는 요청이 온 건 점심때가 훌쩍 넘어서였다. 방송국의 전화 한 통은 정기 모임을 간단히 제치고 시설 아기들을 갑자기 데려올 만큼 중요하거나 혹은 위력이 있었다. 뭘 잘 모르는 장미 눈에도 몇 시간 전에야 그런 요청을 한다는 건 상식 밖이었다. 분명히 방송국의 어떤 문제로 대타가 된 상황인데도 사장은 망설이지 않고 수락했다. 그는 곧바로 홈페이지에 씨엔톡 일정 변경을 공지하고 안내 전화를 돌리게 했다. ‘시설의 아기들 문제’라는 이유를 반드시 밝히라고도 했다. 갑작스러운 공지라 미처 보지 못하는 회원이 분명히 있을 테고 개개인에게 설명하는 태도가 여러모로 효과적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사장의 당부는 회원들을 쉽게 이해시켰다. 재량껏 내는 회비가 아무리 소액이라도 아동 보호시설에 ‘기부’된다는 사실에 일종의 자부심을 갖는 이들이라 별 이의가 없었다.
방송을 위해서 아기들마저 동원됐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장미의 좋지 않은 경험 탓이었다. 대개 시설에서 아기를 데려올 때는 이렇게 느닷없이 들이닥치지 않았다. 어차피 어디로든 떠나게 될 아기들이 미리 움직인다고 문제될 리 없겠지만. 따지고 보면 아기 사진을 찍어 주는 사진사에게 촬영 날짜야 오늘이든 보름 뒤든 별 차이는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미담 사례자로 사장은 적절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온갖 매체가 새삼스레 아동의 권리라든가 아이다운 삶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때, 아이들에게 마이크를 갖다 대거나 해맑은 표정을 클로즈업하기 좋은 5월이다.
세상이 온통 아이들에게 아양을 떨어 대는 것 같은 이때 입양의 어떤 장면을 카메라에 담겠다는 의도는 시청자들에게 제법 진지한 인상을 남길 수 있을지 모른다. 관계자들의 역할을 주목하게 만들 테니 방송사 측도 사회복지회 입장에서도 더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건 동네 사진관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장에게도 거절할 수 없는 요청이 분명했다. 자존심 같은 정기 모임을 간단히 취소할 만큼 그에게 방송국 카메라는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이번 상영 작품이 사장의 선택이 아니라 어떤 회원이 고심 끝에 적극 추천했던 다큐 영화라고 해도 말이다.
드러내지 않았을 뿐 사장은 영화를 전공하고도 물려받은 사진관에 매어 버린 자기 처지를 마뜩찮아 하는 사람이었다. 사진관 작업은 주로 오 선생 일이고 여기서 제대로 고정 수입을 챙기는 사람도 그였다. 사장은 대외적인 활동에 더 적극적이었다. 복지관이나 백화점 문화센터 수업이라든지 주부 사진 동호회 같은 것들. 최근에는 주말마다 학생들과 시설 아이들을 찾아가 성장을 기록해 주는 모임 하나를 더 시작했다.
그가 대외 활동에 적극적일 수 있는 건 성실한 오 선생과 오래됐을망정 제법 널찍한 이 사진관이 그의 소유인 덕분이었다. 영화 모임 씨엔톡은 광고를 하지 않아도 알음알음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만큼 알려진 편이었다. 매달 한 번씩 카메라 장비를 한쪽으로 치우고서 회원들과 영화를 보고 담소를 나누는 일에 사장은 자부심을 가진 편이었고 어울리는 게 좋은 사람들 덕에 모임은 고정 회원들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영화가 어떤 의미든 지금은 적당한 구실로 밀려났고 그는 방송국 취재 요청에 허둥대는 처지였다.
길 건너 포토 스튜디오와 모든 면에서 다르게 인식되어야 하는 건 사장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입양되는 아기 사진을 무료로 찍어 주는 일도 사진관 입구 한쪽을 가득 메우고 있는 국내 입양 홍보물 전단지도 그의 어떤 소신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십시일반 들어오는 회비를 기부하는 일도 이미지 전략인 셈이었다. 정작 그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실장이 그의 아기를 낙태했다는 사실은 출장 기사뿐 아니라 장미까지 눈치를 챈 비밀이었다. 그건 사장의 지역 활동이나 사회적 참여를 위선으로 깎아내리기에 충분한 빌미였다. 그러고도 그들은 여전히 연인 사이다. 장미가 여기서 잡일을 할 수 있게 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손님 메이크업은 물론 우는 아기들 치다꺼리에 웨딩 스냅 촬영 때 짐까지 들던 여자가 배짱 좋게 허드렛일을 거부한 덕에.
실장이 보조 업무자를 구하는 전단지를 붙일 때 장미가 이 앞을 지나갔던 건 어쩌면 행운이었다. ‘사진을 좋아하는 분. 취약계층 우선시 함’. 취약계층. 그건 장미를 위해 붙은 조건 같았다. 장미는 이제껏 카메라나 사진에 대해서 특별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얼마라도 벌어야 할 처지였을 뿐이다. 몇 번 필름 카메라 수업 시간에 들어가 본 적이 있어서 형편 때문에 꿈을 포기한 청소년쯤으로 연기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취약계층임을 보여 주는 건 다른 문제였다. 돈 없고 의지할 데 없는 불쌍한 사람이 취약계층이라면 자신이 딱 맞춤 적임자였음에도 장미는 시조일관 사장의 눈을 피했을 만큼 취약한 자신을 증명하기가 어려웠다.
손가락의 거스러미를 잡아떼며 간신히 부모 동의서도 가족관계증명서도 가져올 수 없다고 했다. 사장의 대답이 더 늦어졌으면 뛰쳐나가고 말았을 것이다. 왜 하필 그때 겨드랑이가 뻐근해지며 왼쪽 가슴이 젖어 버렸는지, 가슴의 압박 붕대가 젖기 전에 대답을 들엉서 다행이었다.
장미는 그렇게 사진관 보조가 됐다. 근로 계약서를 쓰지 않는 대신 최저 시급에 턱없이 모자라는 돈을 받기로 하고. 사장이 무슨 생각으로 받아들였는지 장미로서는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더없는 일자리였다. 그러나 사장이 보조의 월급봉투를 실장 앞에 함부로 툭 던졌을 때 취약계층이라는 게 배려가 아닌 언제든 함부로 잘려 나갈 취약한 계층임을 깨달아야만 했다. 사장과 실장 사이의 불안한 기류에 사진관 보조의 밥질이 달려 있는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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