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1 여기도 서울인가?
들어가며
앞서 여덟 장 사진 속의 풍경은 모두 서울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지역과 풍경이 왜 〈서울〉이라 불리고 있을까요? 도대체 〈서울〉이란 어떤 도시일까요?
서울에 대한 책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저는 서울을 테마로 하는 책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2017년 7월의 일입니다. 서울에 대한 책을 쓰기로 했을 때, 저는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서울에 대한 기록을 남기자는 것이죠.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저를 몰아내려 한 직장 내 일부 세력과의 싸움이 시작된 것은 2017년 3월이었습니다. 저의 삶의 지반이 참으로 쉽게 흔들리는 현실을 경험하면서, 제가 지금 서 있는 이곳을 휙 하고 떠날 수도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낀 몇 달간이었습니다. 서울이라는 공간을 언제든 쉽게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지난 몇십 년 동안 서울을 걸으며 생각하고 느껴 온 점을 더 늦기 전에 정리하자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무작정 서울을 걸어야겠다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에 많은 한국 사람들은 산을 오르지만 저는 서울을 걷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의 서울 걷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대부분은 저 혼자, 때로는 몇몇 지인들과 함께 서울 구석구석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명색이 서울에 대한 책을 쓰는 사람인데, 서울특별시 행정 구역에 들어와 있는 동서남북 끝은 밟아 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습니다.
그런데, 걷다 보니 점점 저의 답사가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여기도 서울인가? 어디까지 서울인가? 인위적으로 구획된 행정 구역인 서울특별시 안의 지역들을 걷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나? 나는 왜 우연히 탄생한 것일 뿐인 행정 구역 서울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걸까? 첫머리부터 조금 이야기가 딱딱해져서 죄송합니다만, 베네딕트 앤더슨이라는 미국 학자가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라는 책에서 쓴 이야기가 저의 의문에 답해 줍니다. 하나의 나라에 포함되어 있는 여러 지역은 처음부터 필연적으로 서로 간에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게 아니라, 우연한 이유에서 특정한 국가에 편입된 뒤에야 그 특정 국가의 내부에 존재하는 다른 지역들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게 됩니다. 비유하자면 금천구와 도봉구 주민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함께 서울특별시 안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우연히 함께 서울특별시에서 살다 보니 서로를 〈서울〉의 소속원으로 여기고 친근감을 느끼고 있다는 말입니다.
앤더슨은 자신이 가장 깊이 연구한 인도네시아의 사례를 듭니다. 네덜란드가 이곳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차지한 지역들을 〈인도네시아〉로 묶은 것은 인위적이고 우연한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인위적이고 우연한 행동은, 이제까지 없던 〈인도네시아〉 국민을 만들어 냈습니다. 〈인도네시아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처음으로 탄생한 것입니다. 인도네시아 지도를 보면, 중간 부분의 보르네오섬과 동쪽 끝의 뉴기니섬에 명백히 인공적인 직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이 두 개의 국경선은 네덜란드가 영국, 독일과 거래하면서 그어진 것입니다. 처음에 이들 국경선은 인공적인 구분선이었을 뿐이고, 보르네오섬과 뉴기니섬 주민들과는 상관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한반도 남북의 두 국가를 인공적으로 나누는 38선과 휴전선이 이제는 두 국가를 서로 자신과는 무관한 존재로 보게 만든 것처럼, 지금 이들 지역 주민들의 정체성을 지배하는 것은 보르네오섬 또는 뉴기니섬이라는 자연적인 지역이 아니라 인공적인 국경선에 의해 분리되어 있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파푸아뉴기니라는 국가입니다.
인도네시아와 서울을 비교하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1914년의 군면 통폐합, 1936년의 행정 구역 개정, 그리고 1963년의 행정 구역 개편 등을 통한 서울의 지리적 변화·팽창과 인구 증가는 전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규모와 속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이라는 지역의 정체성, 〈서울 시민〉이라는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은 아직도 완전히 정착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1963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편입된 도봉구, 노원구, 중랑구, 송파구, 강동구, 강남구, 서초구, 금천구, 관악구, 구로구, 강서구, 양천구 등이 그렇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1914년 군면 통폐합이란 조선 총독부령 제111호 〈도의 위치 관할 구역 변경 및 부군의 명칭 위치 관할 구역 변경에 관한 규정〉에 의하여 대대적인 행정 구역 개편이 이루어진 것을 가리킵니다. 1936년의 행정 구역 개정이란 〈조선 총독부 경기도 고시 제32호 정동리의 명칭 및 구역 중 개정〉에 의해 경성부 주변의 경기도 일부 지역이 대거 경성부에 편입된 것을 가리킵니다. 1963년 행정 구역 개편이란 〈법률 제1172호 서울특별시 도군구의 관할 구역 변경에 관한 법률〉에 의해 서울 주변의 경기도 일부 지역이 대거 서울특별시에 편입된 것을 말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영등포에서 나서 줄곧 살아 온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영등포로 상징되는 서울 서남부의 바깥으로는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비슷한 무렵에 고려 대학교에서 만난 어떤 학생은, 태어나서 줄곧 강남에서 살았고 한강 넘어 강북에 와본 건 대학에 입학하면서 처음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두 사례는 모두 극단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1936년에 경성에 편입된 영등포 지역의 주민, 그리고 1963년에 서울에 편입된 지금의 강남 지역 주민이 여전히 심리적·생활적으로 서로 별다른 교류를 맺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줍니다. 하지만, 이렇게 넓은 서울특별시의 동북쪽 도봉동 시민과 서남쪽 시흥동 사람 모두, 자신들을 서울 사람으로 인식합니다. 나아가 의정부시, 남양주시, 구리시, 하남시, 성남시, 과천시, 안양시, 군포시, 광명시, 시흥시, 인천시, 부천시, 김포시, 고양시, 파주시와 같이 서울특별시 주변에 자리한 경기도의 도시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사람들 역시, 스스로를 경기도민이라기보다는 확대된 서울특별시의 시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대문 안〉만 진짜 서울인가?
한국학을 연구하는 어느 외국인 지인이 예전에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강남은 서울이 아닙니다. 사대문 안이 진짜 서울입니다〉라고.
이 지인이 말하는 〈사대문 안〉이란, 조선 시대 식으로 말하면 한양 도성 밖 10리까지의 이른바 성저십리城底十里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지인의 말을 듣고 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1914년, 1936년, 1963년에 행정 구역이 확대되면서 새로이 서울이라 불리게 된 지역들은, 〈진짜 서울〉이 아닌 게 아니라, 거대한 서울의 일부로서의 정체성을 여전히 만들고 있는 중이라고 말입니다. 그 지역의 주민들은 행정 구역 개편을 통해 서울에 편입된 지 백여 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대문 안〉의 옛 한양 경성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한 결과, 자신들은 〈진짜 서울〉에 살지 않는다는 열등감과 소외감을 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지역을 서울의 정체성 속에 편입시키려는 움직임 역시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서울 역사 박물관에서 2009년에 발행한 『시흥 행궁』이라는 책은, 금천구 시흥동에 있던 조선 정조 대의 시흥 행궁의 위치를 찾아내고, 이를 서울 역사의 일부로서 새로이 자리매김하려는 시도입니다. 1963년 행정 구역 대개편을 통해 경기도 시흥군 시흥리가 서울 영등포구 시흥동으로 바뀐 지 40여 년이 흐른 뒤입니다. 다음에 일부를 인용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할 때 주로 사대문 안팎의 역사와 문화 유적에만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오늘날 서울에 행정적으로 편입되었던 양주, 광주, 시흥, 양천, 김포, 고양의 역사는 주변 지역의 역사가 되어 버리곤 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가 우리의 터전인 서울을 총체적으로 조망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 이번 조사 대상 유적인 시흥 행궁도 그 가운데 하나로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해 멸실된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 위치에 대해서도 정확한 문헌 자료를 확인할 수 없었으며, 금천구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어렴풋이 추정할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 시흥이 서울의 영역에 편입되고 그 중심지가 서울의 1개 동으로 변하면서부터 그 위상은 크게 바뀌게 됩니다. 정조 임금이 하사한 시흥이라는 이름은 경기도 시흥시에 넘겨주고, 시흥의 상징과도 같았던 시흥로와 시흥 행궁은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또한 시흥동 은행나무라는 자연 지명만이 시흥 행궁의 자취를 대변해 줄 뿐이었습니다. 이번 조사는 시흥 행궁의 원래 위치를 복원하고 그 원형에 대한 추적을 주된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은 주변사에 머물렀던 단위 지역사를 서울의 역사로 끌어들이는 과정이라고 생각되며, 이와 같은 연구 성과가 하나하나 집약될 때 올바른 서울의 역사가 정립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강조는 인용자)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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