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작시오를 짧게 다녀오다
지난해 9월 코르시카섬에서 이 주간 휴가를 보낼 때 파란색 시외버스를 타고 서해안을 따라 내려가 아작시오프랑스령 코르시카섬의 중심도시.를 다녀온 적이 있다. 나폴레옹 황제가 태어난 곳이라는 점 말고는 아는 바가 없는 그 도시를 살짝 둘러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름답고 화창한 날이었고, 잔잔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마레 샬포슈 광장의 야자수 가지가 살랑살랑 흔들렸으며, 항구에는 눈처럼 새하얀 유람선이 거대한 빙하처럼 누워 있었다. 나는 자유롭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골목길을 돌아다니다가 슈톨렌독일에서 기원한 크리스마스 빵. 길쭉하고 두툼하다. 모양의 컴컴한 동굴 같은 가정집 현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양철 우편함 위 낯선 주민들의 이름을 찬찬히 읽어보면서, 이런 석조 요새들 가운데 어딘가에서 삶이 다할 때까지 지나간 시간과 지나가는 시간을 연구하는 일에만 파묻혀 산다면 어떨까 상상해보았다. 하지만 우리 중 그 누구도 진실로 자기 안에만 틀어박혀 살 수는 없으며, 우리 모두는 언제나 크든 작든 의미 있는 일을 계획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에, 마지막 몇 해를 아무런 의무에도 매이지 않고 살고 싶다는 내 안에 떠오른 꿈 이미지는 벌써부터 오후를 뭐라도 하면서 보내야겠다는 욕망에 밀려나버렸다. 그리하여 어찌 된 영문인지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메모장과 연필, 입장권 한 장을 손에 들고 페슈 미술관 로비에 들어와 있었다.
조제프 페슈는 ─ 나중에 내 낡은 『블뢰 가이드북』을 찾아 읽은 바에 따르면 ─ 레티치아 보나파르트나폴레옹 1세의 모친.의 모친이 제노바 공화국에서 복무중이던 스위스인 장교와 재혼해 낳은 아들로, 나폴레옹의 이부異父 외삼촌이다. 그는 성직자로 첫걸음을 내디뎠을 때만 해도 아작시오에서 별 볼일 없는 성직에 몸담고 있었다. 하지만 조카의 명으로 리옹의 대주교와 교황청 전권대사의 자리에 오르면서 당대 가장 탐욕스러운 예술품 수집가로 변신했다. 때는 바야흐로 혁명의 시절, 미술 시장은 교회와 수도원과 성에서 가져오고, 망명 귀족들에게서 사들이고,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도시들에서 노획한 그림과 공예품들로 말 그대로 넘쳐나고 있었다.
페슈는 자신의 소장품으로 무려 유럽 미술사의 전 흐름을 면면히 펼쳐 보이겠다는 포부를 품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많은 그림을 소장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규모가 삼만 점에 달한다는 말이 있다. 1838년 페슈가 사망하자 유언집행자로 지정된 조제프 보나파르트는 갖가지 수완을 부린 끝에 아작시오에 특별히 미술관을 지었고, 이곳에는 코시모 투라의 성모마리아 그림과 보티첼리의 〈화환을 쓴 처녀〉, 피에르 프란체스코 치타디니의 〈터키 양탄자가 있는 정물〉, 스파디노의 〈앵무새와 정원의 과일〉, 티치아노의 〈장갑을 낀 청년의 초상〉을 비롯하여 훌륭한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그 가운데 그날 오후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던 작품은 17세기에 루카에서 살았고 작업한 피에트로 파올리니의 그림이었다. 화폭에는 좌측 끝에만 아주 짙은 고동색으로 바림질된 칠흑같은 바탕을 뒤로한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여인이 그려져 있다. 여인의 두 눈은 커다랗고 침울하며, 시커먼 드레스는 여인을 둘러싼 어둠과 좀처럼 구별되지 않아 사실 보이지는 않지만, 옷감의 구김과 주름이 하나하나 묘사되어 있다. 목에는 진주 목걸이를 걸고 있다. 오른팔로는 자신의 어린 딸을 보호하듯이 감싸안고 있으며, 아이는 그림 끝을 등지고 몸을 옆으로 돌린 채 어머니 앞에 서 있다. 금방 울음을 그친 듯 자못 엄숙한 아이의 얼굴은 조용히 저항하듯 감상자를 향하고 있다. 소녀는 홍벽색 드레스를 입고서, 전장에 나간 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함이든 우리의 사악한 눈길을 방어하기 위함이든 8센티미터 남짓한 병장 인형을 우리 쪽으로 들어 보이고 있는데 그 인형도 마찬가지로 붉은 옷차림이다. 나는 두 사람의 초상화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고 그림 안에 간직되어 있는,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인생의 만 가지 불행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미술관을 나서기 전 나폴레옹 기념품과 예배용 성물 수집품을 전시해놓은 지하로도 내려가보았다. 그곳에는 나폴레옹의 두상과 이니셜로 장식한 편지칼, 인장과 주머니칼, 담배 상자와 코담배 상자, 일가친척과 여러 후손의 미니아튀르, 실루엣 작품과 초벌구이 메달, 이집트 원정 장면이 그려진 타조알, 파엔차에서 만든 화려한 접시, 도자기 찻잔, 석고 흉상, 설화석고 인형, 단봉낙타 혹에 올라앉은 나폴레옹 청동상, 유리종을 뒤집어쓴 나폴레옹 청동 등신상, 붉은색 가선이 둘리고 놋쇠단추 열두 개가 달린, 좀먹은 연미복풍 제복 상의가 있었다. 안내문에는 “이 근위대 대령 제복은 나폴레옹 1세가 착용했던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 밖에 구경할 만한 것으로는 활석과 상아를 깎아 만들어 나란히 늘어놓은 황제 조각상들이 있었는데, 황제를 예의 그 포즈로 보여주는 이 조각상들은 약 10센티미터 크기에서 시작해 하얀 맹점에 이를 때까지, 어쩌면 인류사가 소멸해가는 소실점일 그 점 말고는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점점 작아졌다. 이런 미니아튀르 가운데 하나는 퇴위한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네섬 암벽 위에 앉아 있던 때의 모습이다. 완두콩 남짓한 크기의 나폴레옹은 망토를 걸치고 삼중 고깔모자를 쓴 채, 실제로 그가 유배되었던 섬에서 가져온 응회암 조각들로 봉우리를 쌓고 그 위에 세워놓은 소형 의자에 기마 자세로 앉아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먼 곳을 내다보고 있다. 그가 그곳, 그 적막한 대서양 한복판에서 평안치는 않았으리라. 분명 지난날 인생의 흥분을 그리워했을 터, 설상가상으로 고립무원의 처지인 자신을 여전히 측근에서 보필하던 소수의 충신들조차 신뢰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사정 정도는 페슈 미술관을 관람한 날 『코르스마탱』에 실린 기사를 보면 짐작할 수 있었는데, 기사에 따르면 르네 모리라는 교수가 황제의 머리털 몇 가닥을 FBI 실험실에서 조사한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심의 여지 없이 규명했다고 주장했다 한다.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네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1817년부터 1821년 사이 서서히 비소에 중독되었는데, 범인은 황제의 연인이자 그의 아이를 가지기도 했던 알빈 부인으로, 부인이 나폴레옹의 측근인 몽톨롱 백작을 사주해서 벌인 일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나폴레옹 신화는 지극히 터무니없지만 어쨌든 논박할 수 없는 사실들에 근거한 이야기들을 양산해왔다. 예컨대 카프카도 그런 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1911년 11월 11일 루돌피눔 극장에서 ‘나폴레옹의 전설’을 주제로 열린 학회에 참석하게 됐는데, 그 자리에서 배가 볼록 나온 다부진 체형에 알퐁스 도데처럼 뻣뻣한 곱슬머리가 어수선히 휘날리면서도 두피에 딱 달라붙은 리슈팽이란 반백의 남자가 주장하기를, 예전에는 해마다 나폴레옹의 묘를 열어 도열한 상이군인들이 방부처리된 황제를 지나가며 알현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황제의 얼굴이 이미 상당히 부패되고 연녹색으로 변한 탓에 그뒤로는 연례적인 개관 의식을 폐지했다고 한다. 카프카에 따르면 리슈팽은 아프리카에서 복무한 종조부를 위해서 지휘관이 친히 묘를 개장하라 한 덕분에, 종조부의 품에 안겨 죽은 황제를 알현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한다. 그건 그렇고 그 학회는 ─ 카프카가 이어 기록하기를 ─ 천 년이 지나도 자기 주검에 티끌 하나라도 의식이 남아 있다면 나폴레옹의 명성을 좇겠노라는 발표자의 맹세로 폐회했다고 한다.
페슈 추기경의 미술관을 나와서는 한동안 레티치아 광장의 석조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곳은 광장이라기보다 고층 건물들 틈에 위치한 아담한 나무정원에 가까웠는데, 유칼립투스와 협죽도, 순상엽 야자수와 월계수, 도금양이 도심 한복판에 오아시스를 이루고 있었다. 정원은 철제 울타리를 경계로 골목길과 분리되어 있고, 골목길 저편에는 하얗게 칠해진 보나파르트 생가 전면이 도드라져 있었다. 프랑스 공화국 깃발을 위에 매단 정문에는 방문객들의 행렬이 제법 꾸준히 이어졌다. 네덜란드인, 독일인, 벨기에인, 프랑스인, 오스트리아인, 이탈리아인, 그리고 한번은 아주 고상한 노령의 일본인 단체가 들어갔다. 그들 대부분은 다시 흩어졌다. 마침내 내가 그 건물에 들어섰을 때에는 어느새 오후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어스름한 로비는 텅 비어 있었다. 매표원 자리도 비어 있는 듯했는데, 계산대 바로 앞에 서서 진열된 그림엽서를 집으려고 손을 뻗자 그제야 계산대 뒤에 젖혀진 사무용 검은 가죽의자에 한 여성이 앉아 있는, 아니 거의 누워 있다시피 한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를 보려면 부득이하게 계산대 너머를 굽어볼 수밖에 없었는데, 오래 서 있어서 쉬려 했는지 살짝 졸기도 한 모양인 보나파르트 생가의 매표원을 굽어보았던 것은 몇 년이 지나도 가끔씩 떠오르는, 기이하게 길게 늘어진 그런 순간들에 속했다. 매표원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상당히 풍채가 좋은 부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부인이 오페라 무대에서 자기 인생의 드라마에 지쳐, 〈나를 죽게 하소서〉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오페라 〈아리아드네〉의 아리아.나 그 밖의 피날레 아리아를 부르는 광경이 떠올랐다. 그런데 부인의 외양이 디바를 연상하게 한다는 사실보다 훨씬 인상적이었던 점은, 부인을 유심히 뜯어봤을 때에야 알아차릴 수 있었고 눈여겨볼수록 놀랍기 짝이 없었는데, 바로 부인이 문지기로 일하는 이 생가의 주인, 즉 프랑스 황제와 경악스러우리만치 닮았다는 점이다.
부인의 동그란 얼굴형은 황제와 영락없이 똑같았고, 눈도 똑같이 커다랗고 툭 불거져 있었으며, 똑같은 노란 잿빛 머리칼이 삐죽한 술처럼 이마에 드리워져 있었다. 부인은 내게 입장권을 건네주면서 내 시선이 자신한테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는 사실을 눈치채고는 관대한 미소를 보내더니 사뭇 유혹적인 목소리로 관람 공간은 삼층부터 시작된다고 말했다. 나는 검은 대리석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계단 맨 위에서 또다른 숙녀가 나를 맞아주었을 때 적잖이 당황하고 말았다. 그 여인 또한 외관상 나폴레옹의 가계에 속해 있는 듯 보였고, 그게 아니라도 마세나 장군이나 마크 장군 같은 그밖의 전설적인 프랑스 사령관을 연상시켰는데, 이는 내가 나폴레옹의 가문을 예전부터 난쟁이 영웅 일족으로 상상해왔던 탓일 게다.
말하자면 그 계단 맨 꼭대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여인 또한 눈에 띄게 땅딸막한 체구의 소유자였고, 그 체형은 짧은 목과 허리에 채 미치지 않는 똥짤막한 팔로 인해 더욱 강조되었다. 여기에 더해 그는 프랑스 삼색기 색에 맞춰, 파란 치마와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붉은 허리띠로 몸통을 감싸고 있었다. 놋쇠로 번쩍이는 허리띠의 기세등등한 버클은 그야말로 군인다운 기운을 발했다. 내가 계단을 마저 올라서자 사령관은 몸을 살짝 돌려 비켜서더니 봉주르 무슈라고 인사했다. 그러면서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살짝 지어 보였는데 꼭 자신이 내가 감히 짐작도 못할 만큼 굉장히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언질을 주는 듯했다. 나는 과거에서 온 이 두 묵중한 사절과의 묘한 만남으로 얼마간 당황하여 한동안 이 관람실 저 관람실을 갈팡지팡하다가 이층으로 내려갔고 다시 삼층으로 올라왔다. 그제야 방 안 가구와 전시품이 차츰 이것저것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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