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랫줄
건너 아파트에 불빛이 하나 남아 있다
하늘도 잠시 쉬는 시간,
예서 제로 마음의 빨랫줄 늘이니
누구든 날아와
쉬었다 가라
산
귀신도 모르게 사랑을,
이진명 시인이 그렇게 건배사를 하자
위하여! 하고 우리는 목소리를 높였다
주저앉으며 자발머리없게 내가 중얼거렸다
귀신만 모르고 다 아네
그래도 그런 사랑 한번 하고 싶다
정말 세상 다 아는 사랑
아는 사랑 더 채울 곳이 없는 세상
빙산의 일각이란 무슨 소용인가
태양빛에 반짝이며
나 그 큰 산
다 녹이고 가고 싶네
묵은 별
조부는 비위가 약한 분이었다
69년인가 사람이 달나라에 갔다고 요란들일 때
마치 요즘 손전화 들고 다니는 거 못 보는 이처럼
쾅 하고 미닫이문에 찬바람 일으키며
저 광활한 우주에 비하면 달나라는 자부동 안이다
그깐 거 좀 갔다고
아마 조부는 당신이 노닐던 땅뙈기 잃은 양 싶었는지
며칠 더 오뉴월 고뿔에 시달렸는데
오늘 보길도 동백숲
까만 몽돌 위에 쏟아지는 별들 마주하다
나 또한 뭔가 우루루 잃어버리는 설움에
바닷물 휙 걸어 잠고 돌아눕는 물굽이
그깐 거 사람 하나 잃었다고 발걸음 하곤 아서라
조부는 황새걸음에 지금쯤 지구 반대편까지 서너바퀴는 돌아
땅속 깊은 곳 뜨거운 물 위를 겅중거릴 텐데
저간엔 아무 일 없다는 듯 오뉴월 묵은 별 하나
천릿길 만릿길 허공중에
사뭇 빛나다
부추꽃
실잠자리 한쌍이
부추잎에 겨우 자리를 잡고
남몰래 위아래로 몸서리치는 모양을
부석처럼 쭈그리고 앉아 보네
누군가 뒤통수를 쳐 돌아보니 인적은 없고
다시 돌아보는 사이 어쩌나 어머나
부추꽃은 피었네 하얀 꽃은 피었네
부추꽃만 피겠는가 우리 어머니
쑥국새 올 무렵 수줍은 해거름 안에
달고 붉은 부추김치도 피겠지
부추김치만 피겠나
자작자작 항아리 주둥이의 고춧물을 모두며
우리 철이 뽀얀 항아리엉덩이에 피던
고추 생각도 나겠지
고추 생각만 피겠나
멀건 앉은뱅이 하얀 포탄소리에 놀라
황해도 연백 어디라는 고향 생각도 피겠지
맵기도 하다
오뉴월 포탄연기만 피겠나 장독가를 맴돌던
실잠자리 꽁대에서 실낱처럼 흐르는
부추향도 피겠지 코끝도 붉어지겠지
때는 어느덧 흘러간 청춘이라네
그래도 좋아 잠자리 날개 같은 실웃음이 더위에 일고
하루는 즐겁게 몸을 떨기도 하겠지
천지간에 너울거리다 돌아앉는 것이
이 더위만이 아니라서 오늘은 저 위에서
누군가 또 어여쁜 듯 쇠눈을 껌뻑이다가
그려 그려 부추잎처럼 잠자리 허리처럼
연한 마음 입가에도 꽃은 피고 지겠지
그려 그려 출렁거리며 여름 한철은 가겠지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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