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맛과 살맛
칼맛을 아는 자와 살맛을 아는 자가 만나서 싸웠다. 한바탕 격전을 치르고 나서 칼맛을 아는 자가 말했다. 내 살을 남김없이 바쳐도 아깝지 않은 맛이야. 인정! 그러자 살맛을 안다는 자가 대꾸했다. 내 칼이 제대로 임자를 만났군. 그 맛에 푹 빠져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 말이야. 그는 살에 담긴 칼을 빼지 않고 돌아갔다. 살과 칼은 서로를 맞물고 놓지 않았다. 마치 천생연분인 것처럼 각자의 집을 허물고 한 집에 붙어살았다. 칼집이 아니면 살집인 그 집에서.
갑오징어와 을오징어
둘은 일관된 앙숙이었다. 둘이 화해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제삼자가 나섰다. 제삼의 인물은 어느 편도 들 생각이 없었지만, 이쪽을 만나면 이쪽에서 저쪽을 만나면 저쪽에서 다른 말이 나오는 것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이쪽은 이쪽대로 옳은 말이고 저쪽은 저쪽대로 사정이 있었으니 둘 다의 말을 종합하면 어느 쪽도 만족할 만한 말을 들려줄 수 없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말이 너는 누구 편이냐? 둘 중 하나만 택하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지만 그는 일관되게 제삼자였다. 소주 한 병에 오징어 두 마리면 충분한 사람이었다.
짐과 집
짐이 많아서 이사 가기가 힘들다. 이 짐을 다 어찌해야 할지 가까운 사람들에게 요청했다. 가지고 있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가져가라고. 단 내게 꼭 필요한 물건들만 빼고. A가 와서 소파를 가지고 갔다. 나한테는 필요 없는 물건이다. B가 와서 티브이를 가지고 갔다. 이 또한 필요 없는 물건이다. C가 와서 냉장고를 짊어지고 갔다. 저 또한 필요가 없는 물건이다. D가 와서 책상과 의자와 책꽂이와 그리고 산더미 같은 책을 트럭에 싣고 갔다. 아까워해봤자 더는 필요가 없는 물건이다. 남아 있는 물건이 하루하루 줄어들수록 나의 고민도 하루하루 줄어들고 드디어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사할 수 있는 날이 다가왔다. 이삿날 친구들이 나의 이사를 돕겠다고 찾아왔다. 짐이라곤 나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으쌰으쌰 힘을 모아서 새집으로 나를 옮겨놨다. 나는 얌전히 새로 지은 집에 들어가서 누워 있다. 너무도 편안한 자세로 누워서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한다. 이 또한 내게 꼭 필요한 물건이었을까?
소식
그 소식이 여기까지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다.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이 거의 절명 직전인데도 그 소식은 멀리서 멀리서만 오고 있다. 그것이 언제 도착할까. 내가 죽고 난 뒤에? 내가 죽고 나서 도착하는 소식은 지금까지 달려왔던 길보다 더 먼 길을 눈앞에 두고 있다. 어쩌면 영영 도달하지 못할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이 다 죽어가는데도 소식은 어디까지 왔는지 기별조차 없다.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곳에서 한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거의 죽기 직전이다. 죽어서도 기다려야 하는 소식이 있다면 나는 어디에서 기다려야 할까. 알 수 없는 곳에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귓속에서 쩌렁쩌렁 울리지만 그것은 귓속의 일. 귓속에서만 들리는 일. 소식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내가 죽고 나서도 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죽고 나서도 도착하는 소식은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몰려오는 피로에 쓰러진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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