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전후戰後
: 1950년대와 제네바 회담
판문점은 전쟁에서 평화로 가는 다리다. 판문점의 원래 이름인 ‘널문리’라는 지명도 다리에서 유래했다. 사천강에 널빤지 다리가 있어 널문리라 불렀다는 설도 있고, 옛날 임금이 강을 건너려는데 다리가 없자 마을 주민이 대문을 뜯어 다리를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조선 초기 중국 사신이 한양으로 가기 전 잠시 쉬는 주막이 이곳에 들어섰고, 이후 주막이 하나씩 늘어 주막 마을로 발전했다.
나그네가 쉬어가는 주막 마을이 전쟁을 쉬는 휴전협상의 장소로 변한 것은 우연이었다. 1951년 7월 휴전 회담이 처음 열린 장소는 이곳이 아니라 개성이다. 유엔군 측은 휴전협상이 금방 끝날 줄 알고, 당시 공산군 측의 점령지역인 개성에서 회담을 열자는 상대편 요구를 수용했다. 그러나 유엔군 입장에서 적진이나 다름없는 개성 회담은 불편했고 이동 과정의 안전이 위협받자 회담 장소를 남쪽으로 이동할 것을 요구했다. 그곳이 바로 널문리 주막 앞 콩밭으로, 1951년 10월 22일 임시 천막이 들어섰다. 이 순간부터 이곳은 전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중국 측이 ‘널문리 가게’를 한자로 표기한 판문점板門店으로 고쳐 부르면서 이름도 달라졌다. 평화로운 널문리는 사라지고, 분쟁의 공간인 판문점이 탄생했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의 목조건물 양쪽 입구로 휴전협정에 서명할 대표들이 입장했다. 동쪽 책상에는 유엔군 측 수석대표인 해리슨William K. Harrison 중장이 앉았고, 서쪽 책상에는 공산군 측 대표인 남일南日 대장이 앉았다. 서로 웃지도 않고 악수도 하지 않으며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작은 책상 하나가 그들 사이에 가로놓였다. 먼저 남일이 한국어·영어·중국어로 인쇄된 휴전협정 조문 각 3통씩 총 9통의 문서에 서명했다. 이어 해리슨이 서명했다. 12분 만에 어색한 만남이 끝났다. 그들은 서로 눈길을 피해 아무 말 없이 각자 입장한 곳으로 퇴장했다. 전쟁이 일어난 지 3년 1개월, 휴전 회담을 시작한 지 2년 반, 본회의 159회를 포함한 765번의 회담이 마침내 끝났다.
서명을 했지만 총성은 멈추지 않았다. 휴전협정은 서명 이후 12시간이 지나서야 효력이 발생했다. 1953년 7월 27일 밤 10시, 일제히 총과 대포 소리가 멈추고 시원한 여름 바람이 화약 냄새를 밀어냈다. 전선 양쪽의 병사들은 그동안 들을 수 없던 소리를 들었다. 여름밤의 풀벌레 소리였다. 기계음이 멈춘 허공을 자연의 소리가 채워갈 때 병사들은 비로소 이 지긋지긋한 전쟁에서 살아남았음을 실감했다.
그날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추었을 뿐이다. 휴전休戰은 ‘전쟁을 일시적으로 중단한다’는 의미다. 그날 판문점의 냉랭한 풍경이 협정의 내용을 반영했다. 전쟁이 잠시 중단되는 휴전은 전쟁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종전終戰과 달랐다. 전쟁에 대한 성찰도 없고, 평화 만들기의 의지도 없었다. 휴전은 단지 ‘뜨거운 전쟁烈戰’에서 ‘차가운 전쟁冷戰’으로의 전환을 의미했고, 판문점은 전후戰後에 펼쳐진 또다른 전쟁의 전방초소로 변했다.
판문점에서
제네바로
전세계적인 차원의 냉전은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크림반도의 흑해 연안 휴양지인 얄따Yalta에서 시작되었다. 미국의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소련의 스딸린Iosif V. Stalin, 영국의 처칠Winston Churchill은 전후 유럽 질서의 건설을 논의했고 독일에 대한 분할점령, 아시아 태평양에서 소련의 대일전對日戰 참전,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 인정, 유엔의 구성과 운영에 합의했다.
얄따의 정신은 ‘미소 협력으로 전후질서를 이끌자’는 것이었다. 얄따에서 루스벨트는 소련과의 협력을 중시했다. 아시아에서의 전쟁 종결을 위해 소련의 개입을 간절히 원했다. 실제로 일본의 입장에서 소련의 개입은 미국의 원자폭탄만큼 충격이 컸다. 냉전은 얄따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다. 얄따에서 미국과 소련은 서로 협력했지만, 협력의 결과로 세계는 갈라졌다. 소련군이 개입하면서 한반도는 분단되었고, 38선은 남북을 가르고 동아시아를 갈랐다. 얄따 회담 이후 영국은 밀려나고, 미국과 소련의 양극체제가 성립했다. 두달 후인 4월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망했고, 그로부터 세달 후인 7월 처칠이 총선 패배로 총리에서 물러났다. 얄따의 의도는 사라지고 결과만 남으면서, 세계는 냉전으로 갈라졌다.
전후체제와 동북아 질서
동아시아의 냉전은 유럽과 다르다. 유럽의 냉전이 미소 양극체제였다면, 동아시아의 냉전은 처음부터 미국·중국·소련 삼극 대결체제였다. 미국의 우선적인 목표는 ‘공산중국’의 봉쇄였다. 미국이 동남아시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동북아시아에서 한국·미국·일본 남방 삼각체제를 강화하려는 목적도 마찬가지였다.
동북아 지역의 냉전은 ‘샌프란시스코 체제’로 모습을 드러냈다. 1차 샌프란시스코 평화회의는 1945년 4월에 열렸지만, 일반적으로 샌프란시스코 체제라고 부르는 것은 2차 평화회의 이후부터다. 1951년 9월 4일부터 8일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2차 회의에서는 연합국 48개국 대표와 일본 대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가 평화조약Treaty of Peace with Japan을 체결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맺어질 때 한국은 전쟁 중이었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치르며 일본의 역할을 재평가했고, 태평양전쟁의 법적·정치적 책임을 완화했다. 한국전쟁으로 일본은 태평양전쟁의 패전국에서 동아시아 반공전선의 배후지로 변신했다. 동아시아의 냉전은 1945년에서 1949년 사이 중국의 국공내전을 겪으며 빚어졌고,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가속화되었으며,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통해 구조화되었다.
냉전이 동북아를 덮었지만, 지역을 바라보는 시각은 국가별로 혹은 국가 내부적으로도 달랐다. 미국 내부에서도 동북아 지역전략에 대한 입장 차이가 발생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에 벌어진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과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의 갈등은 동북아 지역전략의 차이 때문이었다. 트루먼은 한국전쟁이 한반도를 벗어나 동북아 지역으로 확대되는 것을 반대했다. 3차대전을 걱정한 이 입장을 ‘제한전쟁론’이라 부른다. 그러나 극동군사령관으로 한국전쟁을 지휘했던 맥아더는 대통령의 제한전쟁론에 반대하며 ‘확전론’을 주장했다. 중공군의 배후 거점을 전략 폭격하자는 장군의 주장은 장 제스蔣介石의 ‘본토수복’이라든지 이승만李承晩의 ‘북진통일’과 어울렸다. 한마디로 반공전선을 동북아 지역 전체로 확대하자는 주장이었다.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고 싶었던 장군의 야망은 성공하지 못했다. 대통령은 장군을 경질했다. 장군은 의회의 청문회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라는 군가의 가사를 자신의 어록으로 유행시켰지만, 중공근의 참전을 예상하지 못한 전략적 실수, 전쟁의 현실과 거리가 있는 근거 없는 낙관, 대통령선거에 나서겠다는 정치적 욕심이 드러나면서 대중의 관심에서 사라져갔다. 동북아 지역전략을 바라보는 대통령과 장군의 대결에서 대통령이 이겼다.
그러나 한국전쟁 과정에서 형성된 미국 국민의 중국에 대한 적대적 인식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미국과 중국은 한국전쟁의 직접 교전 당사국이었다. 미국이 동북아에서 일본의 정치·경제적 역할을 재평가한 이유도 ‘공산중국’의 존재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한국전쟁의 전후처리 과정에서 한국·미국·일본 삼각체제가 제도화되었고, 이는 미국의 동북아 동맹전략의 기초였다.
동북아 냉전의 다른 한 축은 북한·중국·소련의 북방 삼각체제다.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만주’라는 공간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고 1932년 만주국을 세웠을 때, 만주 지역은 국가를 뛰어넘는 초국가적 공간으로 변했다. 1930년대 ‘동북경제권’은 일본·조선·중국이 결합된 경제공동체였다. 정치·군사적으로 조선과 중국은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 공동투쟁을 펼쳤다. 김일성金日成, 최용건崔庸健, 김책金策 등이 참여한 ‘동북항일연군’은 공식적으로 중국공산당의 지휘를 받았지만, 중국과 조선의 연합부대였다. 당시의 경험은 한국전쟁과 이후 전후질서에서 중요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사회주의권 내부적으로 동북아 지역전략의 차이도 존재했다. 동북아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는 1951년부터 시작된 휴전협상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휴전협상 과정에서 공산 측 내부의 삼각관계, 즉 북한·중국·소련의 입장은 달랐다. 소련의 스딸린은 아시아에서 미국의 발목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휴전을 반대했다. 한반도에서 전쟁을 계속하며 미국의 발목을 잡는 것이 유럽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중국 역시 휴전의 필요성에 공감했지만 다수의 국민당 출신 포로들이 중국으로의 송환을 거부하고 대만으로 가겠다고 하자, 포로 송환 협상에 소극적으로 나왔다. 북한은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사라지고 폭격 피해가 늘자 즉각적인 휴전을 원했다. 이해관계의 차이는 1950년대 중소 분쟁과 북방 삼각체제의 갈등을 예고했다.
제네바로 가는 길
한국전쟁 이후 형성된 한반도의 아주 긴 ‘냉전’은 비극적인 ‘열전’이 남긴 상처였다. 전쟁의 상처가 너무 깊었기에 상대에 대한 증오가 컸다. 전후의 한반도는 냉전의 길을 향해 질주했지만, 한번쯤은 갈림길에 서기도 했다. 휴전협정 4조 60항은 압도적인 적대의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나룻배였고, 냉전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샛길이었다. 조항의 내용은 ‘한반도로부터 외국군의 철수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고위 정치회담을 휴전조약이 효력을 발생한 뒤 3개월 내에 개최할 것을 권고한다’는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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