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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밤을 보낸 뒤에 d는 차가워졌다.
젖은 얼굴을 닦으려고 수건을 잡았다가 d는 그 사실을 알았다. 수요일 오후 아홉 시 직전이었다. 욕실 벽에 걸린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를 냈다. 비누 거품 섞인 물이 세면대에 고여 있었고 d는 맨발로 타일을 밟고 있었다. d가 조금 전에 잡았다가 흠칫 놀라 놓아버린 것, 그것은 평범한 수건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집에 있던 물건으로 d는 매일 아무 때나 그걸로 얼굴이며 목을 닦은 뒤 수건걸이에 도로 걸거나 빨래 바구니에 던져넣었다. 여러 번 빨아 말리길 반복한 탓에 좀 뻣뻣해지고 납작해진 아이보리색 면직물. 무늬도 이니셜도 없어 d로서는 다른 수건과 구별하기도 어려웠다. 그것의 온도가 매우 낯설었다. 체온을 가진 것처럼 온기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불을 켜지 않은 부엌을 향해 욕실 문이 열려 있었다. d는 컴컴한 부엌을 가로지르다가 식탁에 놓인 탁상 달력을 떨어뜨렸다. 바닥을 더듬어 그것을 주웠을 때 d는 표지까지 열세 장인 두꺼운 마분지와 좁은 간격으로 말린 스프링에서 온도를 느꼈다. 달력을 올려두고 식탁을 짚어보니 역시 미지근했다. 그 밖에도 더 있었다. 가구와 식기, 요리, 각종 손잡이 들. d는 서서히 그것을 눈치챘다. 공기보다는 싸늘해야 마땅한 사물들이 미묘한 생물처럼 미열을 품고 있었다. 그 미적지근한 온기를 참을 수 없어 d는 사물과의 접촉을 줄였다. 모든 것이 이렇게 될 수는 없으니 변한 것은 내 쪽이다. d는 생각했다.
내가 차가워졌다.
d의 아버지, 이승근은 한때 목수였다. 목공소에 붙은 다락방에서 이승근과 그의 아내 고경자, 그리고 d가 살았다. 목공소 구석에서 신발을 벗고 시멘트 계단을 세 개 올라가면 그들이 먹고 자는 데 사용하는 방이었다. 옷장과 낮은 책상 하나,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있었다. 조그만 부엌이 딸려 있었는데 그 공간엔 창이 없어 고경자가 국을 끓이거나 고기를 삶으면 냄새 밴 수증기가 방을 거쳐 목공소로 내려왔다. 목공소에 쌓인 목재들엔 국과 밥과 고춧가루가 섞인 반찬 냄새가 배어 있었고 세 식구가 사용하는 방엔 목공소에서 올라온 목재 냄새가 배어 있었다. d가 어릴 적엔 목공소에서 자란다는 이유로 나무에 관해 질문해오는 선생이나 동급생이 있었는데 d가 생각하기에 목공소를 채운 것은 목재였지 나무가 아니었다. 이미 톱이나 날에 썰렸고 이윽고 다시 썰린 뒤 못이나 아교에 붙들려 형태가 바뀔 예정인 널빤지들, 껍질이 벗겨진 토막과 막대 들이었고 그것들은 생긴 것부터 나무와 전혀 닮지 않았잖아. 목공소 옆에는 바랜 색종이와 먼지 쌓인 고무풍선을 파는 문구점이 있었고 거무스름하게 마른 고기를 진열장에 내버려두는 정육점이 있었다. 비좁고 후미진 그 가게들과 마찬가지로 목공소는 사계절 밤낮으로 어두컴컴했다. 톱밥은 늘 매운 냄새를 풍겼고 구석에 쌓인 오래된 목재들은 시큼하게 썩어가며 부풀었다.
이승근은 솜씨가 별로 없는 목수였다. 고객들이 목공소로 찾아와 항의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하는 고객이 많았으므로 고객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는 친절과 불안과 비굴함이 섞여 있었다. 예상된 상황이 벌어지면 품삯을 깎으려는 수작이라고 고객을 비난했다. 인간들 참 뻔하고 뻔뻔하다고 이승근은 불평했지만 d가 보기에도 아버지의 목공은 볼품없었다. 아버지가 만들어내는 것들은 정확하지 않았으며 안정적이지도 않았고 실용적이지도 아름답지도 기발하지도 심지어 기괴하지도 않았다. d는 그가 고객에게 왜 사실을 말하지 않는지, 목공소를 찾아온 고객에게 자신은 솜씨가 없다고 왜 고백하지 않는지, 그것을 제대로 말하지 않고 같은 상황을 왜 거듭해 겪는지를 의아하게 여겼다. 이승근은 d를 때리지 않았고 아내가 만든 음식을 불평하지 않고 남김없이 먹었으며 술이나 경마에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지만 자기 목공으로 세 사람이 먹고산다는 말을 끊임없이 했다. 그것이 얼마나 신성한 일인가도. 마끼다, 히타치, 렉슨, 보쉬의 전동기구들, 끌과 망치와 대패, 접는 톱과 실톱. 이승근이 그것을 사용해 목재를 절삭하고 구멍을 내고 깎아내고 문지르는 소리는 d에겐 세계의 배음背音이었다. 작업 공간과 주거 공간이 제대로 분리되어 있지 않아 d는 방에서 밥을 먹고 낮잠을 자고 텔레비전을 보고 숙제를 하는 동안 그 소리를 들었다. d가 특별히 끔찍하게 여겼던 것은 톱날의 회전으로 목재를 자르는 절삭기들이 내는 소리였다. 작업이 없는 순간에 목공소는 적막했지만, 어느 순간 그 소리가 시작되면, 어느 날에나 틀림없이 시작되고는 했는데, d는 어두운 방에서 연필을 쉬고 숙제를 하거나 낙서를 하면서, 귀가 빨개진 채로 생각했다. 나는 저 회전의 댓가로 먹고 산다 아름답지 않고 솔직하지도 않은 목공의 댓가로, 은반처럼 돌아가는 톱날에 자신의 조그만 손가락을 올려보는 광경을 상상해보기도 하며 d는 기다렸다. 톱날이 아버지의 피로 흥건해진 채 멈추는 순간을. 아버지가 자신의 신성함을 그만 멈추고 목공소가 마침내 고요해질 순간을. 그런 순간에 관한 상상들은 d를 부끄럽게 만들곤 했고 죄책감을 느끼게 했으며 갑작스럽게 치솟는 분노로 아버지를 노려보거나 비슷한 정도의 환멸로 그를 외면하게 만들었다. d에게는 신성한 것이 없었다. 자주 귀를 붉혔고 잡음을 들었다. 쪼개진 목재를 잡아뜯는 듯한 소리, 쇠로 만든 종이를 찢는 듯한 소리일 때도 있었고 보푸라기들이 작은 뭉치로 귓속을 구르는 것처럼 부스럭거리는 소리일 때도 있었다. 고요한 장소에 있을 때 d는 별로 말하지 않는 어른으로 자랐고 많은 말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다시 말해 d에게는 세계가, 이미 너무 시끄러웠다.
dd를 만난 이후로는 dd가 d의 신성한 것이 되었다. dd는 d에게 계속되어야 하는 말, 처음 만난 상태 그대로, 온전해야 하는 몸이었다. d는 dd를 만나 자신의 노동이 신성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을 가진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으며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여길 수 있는 마음으로도 인간은 서글퍼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d를 이따금 성가시게 했던 세계의 잡음들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행복해지자고 d는 생각했다. 더 행복해지자. 그들이 공유하는 생활의 부족함, 남루함, 고단함, 그럼에도 주고받을 수 있는 미소, 공감할 수 있는 유머와 슬픔, 서로의 뼈마디를 감각할 수 있는 손깍지, 쓰다듬을 수 있는 따뜻한 뒤통수, 어깨를 주무르고, 작고 평범한 색을 띠고 있는 귀를 손으로 감싸고, 따뜻한 목에 입술을 대고, 추운 날엔 외투를 입는 것을 서로 거들며, dd의 행복과 더불어, 행복해지자.
d와 dd는 양천구 목2동 505번지 B02호에 살았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는 거리가 있는 동네로 이십여 년 된 빌라와 단독주택 들이 모인 곳이었다. 말하자면 양천구의 가장자리로, 정류장이 있는 대로에서 길을 건너면 강서구였다. 집들은 대체로 붉은색이었고 낮고 낡은 담에 둘러싸여 있었다. B02호의 문은 크고 두꺼웠으며 사람의 얼굴 높이에 불투명한 유리가 끼워진 창이 있었다. 녹슨 문턱을 넘으면 발바닥에서 발목 정도의 낙차로 지면보다 낮은 현관이 있었고 거실과 부엌과 욕실과 방이 있었는데 순서대로 모든 공간이 열차처럼 일렬로 이어져 있었다. 편의에 따라 B라고 칭하기는 합니다마는 이 정도 깊이는 반지하라고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사실 1층입니다? 부동산 중개인이 사실을 묻고 확인하듯 말했으나 집 자체가 미묘한 경사에 자리를 잡고 있어 가장 바깥쪽인 현관에서 가장 안쪽인 방으로 들어갈수록 지하로 완만하게 들어가는 구조였다. 방에는 옆으로 긴 창이 나 있었는데 창의 높이가 지면이었으므로 그쪽은 이미 반지하였다. 그러나 결국엔 지층이라는 핸디캡이 적용되지 않은 월세로 결정되었다. dd와 d가 그 방을 얻기로 결정한 이유는 각자의 직장에서 정확히 중간에 위치한 동네였고 다른 방들이 그 방보다 훨씬 비쌌기 때문이었다. 임대인인 김귀자는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르는 노인이었다. 그녀는 매월 집세를 입금받을 계좌를 알려달라는 중개인의 요구에 난처해하며 자신에게 직접 주면 된다고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자기가 문을 두드리면…… 문을 열고 손만 내밀어서 이 할미한테…… 주기만 하면 돼, 라고 말하며 손바닥을 위로 해 손을 내밀어 보였다. 작고 흰 손이었다. d는 자신의 얼굴 앞으로 불쑥 다가온 그것을 보고 놀랐다. 노인의 얼굴이 d에게 낯익었고 익숙했다. 기괴한 방법으로 집세를 지불하는 방법을 일러주며 비굴하게 웃는 그 얼굴이. d는 언짢고 불쾌했지만 그 방을 얻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 방을 얻었다. dd는 방을 얻을 때 채광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 집은 그 점에서 dd가 원하는 바에 별로 근접하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잘 적응했다. 잠을 자고 먹고 씻고 출근 준비를 하고 퇴근해 돌아오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고양이를 기르고 싶어하고 다육식물이 담긴 작은 화분을 모으고 그 밖에 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해 사고 싶은 외투와 d가 작업장에서 신을 부츠의 방수에 관해 말하고 d를 만지고 늦잠을 자고 고지서를 걱정하거나 이따금 불편하기도 하며 크게 바라거나 크게 비관하는 일 없이 그 집에 잘 적응해 살았다. 들뜬 벽지나 낡아서 도금이 벗겨진 손잡이에 손을 베이는 일이 잦았고 기묘하게도 일요일에, 일요일만 되면, 욕실 천장 한구석에서 흙탕물이 타일의 골을 따라 흘러내렸으며 보일러를 사용하지 않는 계절에는 눅눅해진 이불 위에서 등이 차가워진 채로 잠을 깨게 되는 방이었다. 그 방으로 돌아오다가 dd는 죽었다.
내동댕이쳐졌다.
d는 그것을 반복해 생각했다. 많은 것을 생각했는데 마지막엔 늘 그것을 생각했다. 내동댕이쳐졌지. 그 많은 사람이 타고 있던 버스에서. 정교하고도 무자비한 핀셋이 집어 내던진 것처럼 오로지 dd만, dd만 바깥으로. 충돌의 결과, 우리가 매일 오가던 딱딱한 도로 위로.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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