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줍는 이야기꽃
“또 씹는다. 또 씹어.”
캄캄한 거실에서 더듬더듬 텔레비전을 켜던 그가 쯧쯧 혀를 찬다. 아니 웃는다.
손대중으로 리모컨의 전원 버튼과 숫자를 차례차례 눌러 MBC-ESPN을 불러내자마자 퍼거슨 감독의 껍 씹는 화상이 제꺼덕 뜬 것이다. 허를 찌르듯 방에서 자다 나오는 그의 선 밤눈을 절묘하게 압도하고 남았다. 마음에도 없는 투정이 절로 나왔다.
초저녁부터 별렀던 맨체스터 더비다. 박지성의 출전 여부가 궁금해서도 놓쳐서는 안 될 경기였는데 쏟아지는 졸음에 까무룩 빠졌나 보다. 생각 따로 몸 따로 노는 늘그막 쪽잠이 날로 속수무책이다. 그러나 워낙 잠이 많은 안사람보다는 나은 편인가. 눈을 비비고 화면 상단에 찍힌 경기 시간을 얼른 확인한다. 전반 20분이 벌써 지났다. 그만하기 다행이다.
퍼거슨 감독은 하여간 씹는구나. 그에게는 그것도 구경감이다. 때로는 입춘 전후의 등 시린 야기夜氣를 차렵이불로 녹이며 프리미어리그를 보는 잔재미의 하나다.
잠시도 쉬지 않는 입놀림이 애초엔 마땅찮았다. 불콰한 노안에 되통스런 저작이 이만저만 당혹스러웠다. 오밤중에 일어나 시점視點이 아직 흐릿하기 때문에도,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은 알렉스 채프먼 퍼거슨 경의 조급한 모습이 민망했는데, 보아 버릇하는 동안에 차차 익숙해졌다.
본인이 밝힌 나름의 효험을 언젠가 듣기는 들은 것 같다. 껌을 씹으면 저절로 리듬이 생기고 혹종의 묘수마저 불시에 뇌리를 스친다는 말이 긴가민가 그럴싸했다.
그레이트브리튼의 다른 두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한 성질씩 한다는 스코틀랜드 출신 백전노장의 소탈한 일면이 가외의 흥미를 돋운 셈이다. 고독하고 초조한 승부사의 별난 엠블럼으로 굳어진 느낌이다.
그 정도는 실상 약과다. 미국 프로야구 쪽으로 눈을 돌리면 더더욱 호도깝스럽다. 감독은 더그아웃에서, 선수들은 타석이나 누상에서 껌을 질겅거리다 못해 소담한 풍선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능숙하게 부풀려 후끈 달아오른 시간을 익살스럽게 눅이러 든다.
축구장, 야구장에서 침인들 못 뱉으랴. 격전의 소용돌이를 뛰다가 생긴 경각의 여유를 침 뱉기로 가라앉히는 장면을 자주 목격한다. 입안에 고인 단내와 가쁜 숨을 일시에 밀어내려는 습관성 배출일 게다. 중계카메라가 즉각 잡아주지 않으면 몰랐을 침방울이 보매 보기에도 걸쭉하다.
진초록 잔디구장에 툭 떨어지는 한 점 타액에 관객들은 막상 본체만체 무심하다. 신경 쓸 사이 없이 게임에 몰입하기 때문인데, 그의 노류장화 관전법은 보통 구경꾼과 상당히 다르다. 별별 생각을 경기장 안팎으로 끌고 다닌다.
남 못지않게 혼자서 탄성을 지르고 무릎을 치기야 친다. 아군박지성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나 이영표의 토트넘 팀의 슛이 골대를 맞고 엔드라인으로 빗나가면 한숨을 내쉬고 들이쉰다. 이기면 좋고 지면 싫다.
하다가 엉뚱한 생각에 곧잘 빠진다. 터치라인의 이영표가 스로인 자세를 취하는 틈에 설기현은 왜 출전이 뜸한가 걱정한다.
부지런히 골을 좇다가 운동장 주변을 에워싼 키 낮은 광고판에 한눈을 파는 수도 있다. HYUNDAI, TOYOTA, HEINEKEN 등을 한참 눈여겨보고, 아시아급 경기 때만 등장하는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선전판을 희한하게 여긴다. 신문으로는 유일한 까닭이다.
첼시와 풀럼 선수들의 유니폼 앞자락에 선명한 SAMSUNG, LG는 하물며 놓치지 않는다. 안 보면 엄청난 스폰서 계약금이 아깝다는 듯이.
그의 안목은 이처럼 허술하고 제멋대로다. 게다가 할 줄 아는 운동이 하나도 없다. 배드민턴조차 못 치고 뒷산의 평행봉에도 매달린 일이 드물다. 몸을 만든답시고 헬스센터를 찾기는 고사하고 대중탕의 공짜배기 러닝머신에 오를 염을 안 낸다. 워낙 소질이 없어 막대기처럼 왔다 갔다 지내면서 부러지다 서다를 반복했다.
그렇다면 무어냐. 남들 다 자는 시간에 홀로 앉아 야행성 관객 노릇으로 청승을 떠는 이유가 무엇이냐 물으면 할 말이 없다. 실로 난감하지만 딴은 질문 자체가 덜떨어진 우문이다. 똑떨어지게 설명할 수는 없어도 자기가 자기를 길들여 재미를 보거나 죽을 쑤는 일이 세상에는 참 많기 때문이다.
그걸 버릇이라 이른들 무방하다. 버릇도 오래가면 제2의 천성으로 자리 잡는 상례를 떠나 누군가의 생활에 막강한 영향을 끼친다. 형체가 모호한 짓거리를 일상에 버무려 특정인의 생활을 제도화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타인에게 여차저차 설명하기는 힘들다.
우선 보자. 그가 야밤의 거실에 어슬렁어슬렁 나앉는 시간은 대강 새벽 2시 전후다. 때맞춰 벌떡 잠자리를 털고 일어서지 못한다. 얼추 그렇다 이건데, 오늘은 같은 도시에 연고를 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맨체스터 시티 라이벌전이 밤 10시에 벌어져 예외로 쳐야겠다.
부스스 일어난 그는 당장 눈이 부시든가 칠흑의 안도감을 왕창 깰까 두려워서도 거실의 불을 켜지 않는다. 오래 끼고 지낸, 엉덩이가 안반짝처럼 빵빵한 구닥다리 텔레비전을 LCD 수상기로 개비한 후로는 더 점등을 꺼린다. 슈퍼슬림 브라운관이 내쏘는 빛만으로도 가벼운 운신엔 불편하지 않은 까닭에 불을 밝힐 필요가 없다. 귀신이 다 된 엄지를 시켜 채널 버튼을 누를 적마다 제꺽제꺽 바뀌는 오색 동영상이 덜 가신 잠기를 다양하게 휙휙 쫓는다. 직사각형 바탕화면의 쪽빛이 그리고 눈에 서늘하다. 청출어람 푼수로 한 해가 다른 전자 기기의 편의를 좇아 단계적으로 늙기를 잘했다는 망령된 생각마저 때때로 겹친다.
아무런들 대순가. 호젓한 기분이 오붓해서 좋다. 가슴은 바삭바삭 가랑잎이 돼 눈이 먼저 디지털 화상의 호사에 끌려 서반구西半球의 일등 축구를 반긴다.
그러나 장마다 망둥이 날까. 생각은 생각대로 경기장을 힐금거리며 딴살림을 차리는 날이 실은 더 많다. 집 안이나 바깥이 어둠으로 내통하고 소리가 없어 주위가 한층 요요할수록 별별 잡념이 꾸역꾸역 덜미를 누른다.
이처럼 자기 자신조차 마음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오락가락 변덕을 어찌 간단히 설명한단 말인가. 못한다. 노년에 들면 마음이 너그럽고 사리 분별에도 밝다고들 하던데 믿을 것이 못 된다. 도리어 갈팡질팡 줏대 없이 구는 수가 많다. 남을 신뢰하지 못하는 만큼 자신의 언행에 미리 핑계를 대고 알리바이성 변명을 준비하기 일쑤다. 누가 뒤를 밟을세라 조심하며 은근짜를 찾아가는 푼수로 소심하되 입으로는 경륜과 원만함을 구가하지 말란 법 없다.
때문에 그는 빠르고 명쾌한 승부의 세계를 바친다. 아니다. 긍·부정을 떠나 그냥 관심이 깊다. 낄 자리가 도무지 없어 낮에는 있으나 마나 희미한 반달처럼 허공에 둥 떴다가 밤이면 도깨비감투를 쓴 양 활개를 친다. 거실을 유영遊泳하며 긴장, 감동, 탄식의 순간순간을 즐긴다.
말에 물린 상늙은이의 엉뚱한 역정을 상기시킨다. 사람들의 입담에 대한 새삼스런 혐오는 그의 평소 대화에 부사와 형용사가 현저히 빠진 낌새로도 어림할 수 있다. 생각이 그만큼 빈약한 증좌리라. 대신 찾아드는 지난날의 회상은 또 연대순이 아니다. 심술까지 사납다. 더께 앉은 세월 중에서 괜찮은 놈 위주로 재음미하거나 베끼려 들면 반드시 언짢은 기억이 선수를 쳐 대뜸 훼방을 놓는다. 틀림없이 딴죽을 건다. 방귀길 나자 보리 양식 떨어지는 격으로 입맛이 쓰다. 아무나 ‘생각하는 갈대’ 노릇을 마음먹기 어렵다.
요새는 또 구청에서 마련한 컴퓨터 교실에도 다닌다. 격일제였다. 90분씩 한 달이면 초급반을 떼고 중급반으로 올라간다고 했는데 수업 시간을 오전 오후로 나눈 명목상의 구분이 그러할 뿐, 장소도 강사도 같았다. 무보수로 봉사하지 싶은 중년 부인 혼자서 두 반을 맡아 가르쳤다.
수강생 수준은 여러 층이었다. 완전 초짜에 이메일로 신문을 뒤적이는 사람이 엇섞여 적절한 기준을 대중하기 힘들어보였다. 그러나 심심소일의 한 기능을 내려받는 계제로 괜찮을 것 같았다. 강사 또한 수강생들을 미리 안심시켰다. 여러분이 갖고 계신 교본의 범위 내에서만 초·중급 차등을 두겠으니 수준껏 공부하시라고.
교본까지 거저 주는 무료 강좌는 처음부터 노년을 대상으로 삼았다. 정보화 교육이 뒤진 이들을 위한 자치단체의 대민봉사 차원이기 때문에 분위기가 얼뜨고 느슨했다.
아무런들 교실은 교실이다. 초급반에 든 첫날, 그는 문간의 신발장 앞에서 슬며시 입을 벙긋거렸다. 어린 시절의 학급 풍경이 눈에 삼삼, 닁큼 고개를 디민 탓이다.
나이키 운동화에 배불뚝이 신사화, 앙증맞은 숙녀화에 굽 낮은 하이힐 등으로 층층이 그들먹한 신발장은 고리탑탑한 발가락 땀내를 하마 풍길 둥 말 둥 어지러웠다.
먼지마저 뒤섞인 것 같은 취기臭氣를 분명히 맡았다기보다는 지레짐작의 억지 예단인지 모른다. 학습된 조건반사가 깐에 요망을 떤 감이 없지 않았는데, 덕분에 맛본 옛 교실의 까마득한 연상이 나쁘지 않았다.
무얼 보면 무얼 안다는 격언이 많거늘, 신발을 보면 그 사람을 안다는 말은 왜 없을까.
웬만한 정서가 말라비틀어진 지경에 덧없는 잡념이 누추하지만, 물은 흘러도 여울은 여울대로 있는 통념의 근거가 그런 것 아니던가. 신기한 느낌이 좀처럼 드문 나이일수록 기시감旣視感의 반가움에 감응하는 수가 많고, 한 바가지 마중물로 깊은 샘물을 퍼올리는 펌프질이 덩달아 손쉬운 것이다. 잊고 지낸 신발주머니에 책가방의 추체험이 싫지 않을밖에 없다.
뿐인가. 수업이 진행되면서 터져 나온 ‘선생님’ 소리가 서슴없었다.
“선생님. 마우스를 더블클릭하는 게 어려워요.”
“따닥 하고 재빨리 누르세요. 따~닥 하는 식으로 눌러 사이가 뜨면 안 돼요.”
“선생님! 시프트의 요령은요. 동시에 두 손가락을 놀리기가……”
“댁에서 자꾸 연습해보세요. 모든 일이 그렇듯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묻고 대답하는 품이 제법이었다. 학생과 교사로 어울린 마당이 엔간히 예사로웠는데 갑작스레 입에 담는 ‘선생님’ 소리가 영 스스럽거나 느끼했던 것도 사실이다. 사무적으로 꺽지지 않되 입술에 머물다 만 임시변통의 회고 취향 또한 구성없었다.
딸 같고 며느리 같은 강사를 낮잡기는커녕 피차간에 만남이 낯설어 그러는 것만이 아닐 게다. 몸의 일부로 구실하던 연장도 헛간에 내내 처박아두면 지레 삭거나 녹이 슬 듯, 특정 단어도 오래 안 쓰면 곰팡이가 피어 어눌해지기 쉽다.
아무튼 그의 귀에는 인생 종장에 그렁저렁 연착륙한 학생들의 ‘선생님’ 소리가 어설프고 간지러웠다.
일부러 치기를 부린다고 믿었다. 거추없이 천방지축을 놀던 생의 초년을 내친김에 와락 끌어당긴 폭인데 그토록 숫기 좋은 사람은 막상 적었다.
말이 헤픈 돌출족 따로, 도도하게 입을 꽉 다문 무언파 따로였다. 책상 위에 놓인 앞앞의 컴퓨터에 정신을 파는 이가 훨씬 많았다.
그들은 강사의 지시에 따라 프로그램을 열고 파일 복사와 인터넷 연결과 전자우편 읽기 흉내를 조심조심 냈다. 왼쪽 버튼을 누른 상태에서 마우스를 죽죽 끄는 문서 작성 드래그의 재미에 정신을 팔고,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 장단에 애를 태웠다. 빠른 사람 빠르고 느린 사람 느린 모양이 들쭉날쭉 어수선한 속에서, 죽어서도 학생 신위(神位)로 남을 자신들의 학생 신분이 대견한 듯 모니터를 열심히 응시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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