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오늘, 짧은 낮잠에서 깼을 때 ‘얼굴 없는 남자’가 앞에 있었다. 그는 내가 잠자던 소파 건너편 의자에 걸터앉아, 얼굴 없는 얼굴 위 가상의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키가 크고, 옷차림은 전에 봤을 때와 똑같았다. 챙 넓은 검은 모자를 눌러써 얼굴 없는 얼굴을 반쯤 가렸고, 지난번처럼 칙칙한 색깔의 긴 코트를 입었다.
“초상화를 부탁하려고 왔네.” 얼굴 없는 남자는 내가 완전히 잠이 깬 것을 확인하고 말했다. 낮은 목소리에 억양도 감정도 없었다. “그려주겠다고 약속했지. 기억하나?”
“기억합니다. 그때는 종이가 없어서 그릴 수가 없었지요.” 내가 말했다. 내 목소리도 마찬가지로 억양과 감정이 없었다. “대신 펭귄 부적을 드렸습니다.”
“그래, 여기 가져왔네.”
남자가 말하고는 오른팔을 똑바로 내밀었다. 매우 긴 팔이었다. 손에는 플라스틱 펭귄 인형을 쥐고 있었다. 휴대전화에 부적처럼 달려 있던 것이다. 그는 그것을 낮은 유리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딸깍, 작은 소리가 났다.
“이건 돌려주지. 자네에겐 이게 필요할 거야. 이 작은 펭귄이 부적처럼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줄 테니까. 대신 내 초상화를 그려줘야겠어.”
나는 당황했다. “하지만 갑자기 그러시면…… 저는 아직 얼굴 없는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목이 바싹 말랐다.
“자네가 뛰어난 초상화가라더군. 그리고 무슨 일에나 처음은 있는 법이지.” 얼굴 없는 남자가 말했다. 그러고는 웃었다. 아마도 웃은 것 같았다. 그 웃음소리 같은 것은 깊은 동굴 속에서 들려오는 공허한 바람소리와 비슷했다.
그가 얼굴을 반쯤 가린 검은 모자를 벗었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얼굴은 없고, 유백색 안개가 천천히 휘돌고 있었다.
나는 일어나 작업실에서 스케치북과 부드러운 연필을 가져왔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얼굴 없는 남자의 초상을 그리려 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무엇을 기점으로 삼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기 있는 것은 그저 무無였다. 아무것도 없는 것의 형상을 대체 어떻게 빚어낸단 말인가? 더욱이 무를 둘러싼 유백색 안개는 쉼없이 모습을 바꾸었다.
“서두르는 게 좋아. 나는 이곳에 그리 오래 머물 수 없어.” 얼굴 없는 남자가 말했다.
가슴속에서 심장이 메마른 소리를 냈다. 시간이 별로 없다. 서둘러야 한다. 하지만 연필을 쥔 손가락은 허공에 멈춘 채 도무지 움직일 줄 몰랐다. 마치 손목 아래쪽이 마비된 것처럼. 그의 말대로 내게는 지켜야 할 사람이 몇 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다. 그런데도 ‘얼굴 없는 남자’의 얼굴을 도저히 그릴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눈앞에 있는 안개의 움직임을 노려보았다. “미안하지만 시간이 다 됐어.” 잠시 후 얼굴 없는 남자가 말했다. 그리고 얼굴 없는 얼굴의 입에서 희뿌연 강안개 같은 입김을 크게 내뱉었다.
“기다려주세요. 조금만 있으면……”
남자가 검은 모자를 다시 눌러써 얼굴을 반쯤 가렸다. “언젠가 다시 찾아오지. 그때는 자네도 내 모습을 그릴 수 있을지 모르니까. 그때까지 이 펭귄 부적은 내가 보관하겠네.”
얼굴 없는 남자가 모습을 감추었다. 안개가 돌풍에 걷히듯이 순식간에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뒤에는 빈 의자와 유리테이블만 남았다. 유리테이블 위에 펭귄 부적은 없었다.
그저 짧은 꿈 같기도 했다. 하지만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만일 그게 꿈이라면 내가 사는 이 세계가 모조리 꿈이라는 뜻일 테니까.
언젠가 무의 초상을 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화가가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을 완성했던 것처럼. 하지만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1
혹시 표면이 뿌옇다면
그해 5월부터 이듬해 초까지 나는 좁은 골짜기 어귀 근처 산 위에 살았다. 여름이면 골짜기 안쪽에 쉴새없이 비가 내렸지만 바깥쪽은 대개 맑았다. 바다에서 남서풍이 불어오는 까닭이다. 바람에 실려온 습한 구름이 골짜기 사이로 들어와 산의 경사면을 오르며 비를 뿌리는 것이다. 집이 마침 그 경계에 서 있어서 앞쪽은 맑은데 뒤뜰에는 세찬 비가 내리는 일도 제법 있었다. 처음에는 신기했지만, 익숙해지니 오히려 당연하게 여겨졌다.
주위 산허리에는 도막난 구름이 낮게 걸렸다. 바람이 불면 구름 자투리가 과거에서 길을 잃고 들어와 옛 기억을 찾아 헤매는 넋처럼 산줄기를 흐물흐물 떠돌았다. 가랑눈 같은 새하얀 빗줄기가 소리 없이 바람에 나부끼기도 했다. 늘 바람이 부는 덕에 에어컨 없이도 여름을 쾌적하게 날 수 있었다.
건물이 작고 낡은 반면 마당은 자못 넓었다. 관리를 하지 않았더니 초록빛 잡초가 무성해지고 어느 날부터 고양이 가족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는데, 정원사를 불러 풀을 베어내자 어딘가로 가버렸다.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리라. 세 마리 새끼를 거느린 줄무늬 암코양이였다. 까칠한 인상에, 사는 게 녹록지 않다는 듯 야위어 있었다.
집은 산머리에 있어서 남서향 테라스로 나오면 잡목림 사이로 바다가 살짝 엿보였다. 대야에 받은 세숫물 정도의 바다. 광대한 태평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이다. 아는 부동산업자 말로는 설령 그 정도라도 바다가 보이느냐 아니냐에 따라 땅값이 크게 달라진다는데, 사실 나는 바다가 보이건 보이지 않건 상관없었다. 멀리서 보면 그 조각 바다는 칙칙한 납덩어리 같기만 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바다를 보고 싶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오히려 주위의 산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골짜기 맞은편의 산은 계절과 날씨에 따라 생생하게 표정을 바꾼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당시 나와 아내는 일단 결혼생활의 끝을 본 상태였고 이혼서류에 정식으로 도장도 찍었지만, 그후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 다시 합치게 되었다.
무엇 하나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당사자인 나조차 인과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든 그 경위를 굳이 요약하자면 ‘원상 복귀’라는 흔해빠진 표현에 다다를 것이다. 그 두 번의 결혼생활(전기와 후기라고 해두자) 사이에는 약 아홉 달이라는 시간이 험준한 지협에 뚫린 운하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아홉 달 남짓 ─ 이 시간이 이별의 기간으로 길었는지 짧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영원에 가까웠던 것 같기도 하고, 의외로 순식간에 흘러간 것 같기도 하다. 인상은 그날그날 바뀐다. 종종 사진을 찍을 때 실제 크기를 가늠할 셈으로 피사체 옆에 담뱃갑 따위를 놔두곤 하는데, 내 기억의 영상에 놓인 담뱃갑은 기분에 따라 멋대로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 같다. 아마도 사물이나 현상이 쉼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혹은 그에 대항하듯이, 내 기억 속에서는 고정불변이어야 할 잣대마저 움직이고 변화하는 모양이다.
물론 모든 기억이 아무렇게나 이동해서 멋대로 수축하거나 확장하는 것은 아니다. 내 인생은 기본적으로 평온하고 모순 없이, 대체로 이치에 맞게 기능해왔다. 다만 이 아홉 달여에 한해서는 도무지 설명할 길 없는 혼란에 빠졌다는 이야기다. 그 기간은 내게 여러 의미에서 예외였고, 평범하다고는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고요한 바다 한복판을 헤엄치던 중 느닷없이 정체불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사람 같았다.
이 시기에 일어난 일을 떠올릴 때(그렇다, 나는 지금 몇 년 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그 모든 일의 무게와 거리, 연관성이 왕왕 흔들리고 불확실해지는 것도, 또한 잠깐 눈을 돌린 사이 논리의 순서가 순식간에 뒤집혀버리는 것도 그런 까닭이리라.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해, 능력이 허락하는 한 조리 있고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갈 생각이다. 아니면 어차피 헛된 시도일지라도 나름대로 쌓아 본 가설의 잣대를 결사적으로 붙들어볼 작정이다. 기운이 다한 조난자가 우연히 떠내려온 나무토막에 매달리는 것처럼.
그 집으로 옮기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저렴한 중고차를 찾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몰던 차는 수명이 다해 폐차했기 때문에 새로 구해야 했다. 지방 도시, 더욱이 산 위에서 혼자 살려면 매일 장보는 데만도 차가 필수다. 오다와라 시 교외의 도요타 중고차센터에서 무척 싸게 나온 코롤라 왜건을 발견했다. 영업사원은 파우더블루라고 했지만 병든 사람의 낯빛처럼 초췌한 색깔이었다. 주행거리는 3만 6천 킬로미터지만 사고 경력이 있어서 가격은 상당히 낮았다. 시승해보니 브레이크와 타이어에는 문제가 없는 듯했다. 고속도로를 자주 탈 것도 아니어서 그 정도면 충분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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