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일의 과거
우디 앨런Woody Allen이 스탠드업 코미디언(혼자 공연하는 코미디언-역자 주)으로 일하던 시절에 즐겨 하던 농담이 있다. 그의 농담은 자기 아파트 내의 모든 기기를 한 자리에 불러 모아 놓고 앞으로 처신을 잘하라고 요구하는 등, 기계적인 대상들과의 걱정스러운 관계에 관해 쓴 초현실적인 논문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은 우리와 기술의 관계를 아주 간단히 그리고 멋지게 풍자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앨런이 오늘날 그와 관련된 논문을 쓴다면 아마 토스터나 시계 겸용 라디오 대신 아이폰이나 핏비트에 대한 언급이 나올 것이다.
앨런의 농담은 이런 식으로 끝난다. “이야기의 결말은 이렇다. 아버지가 해고당하신 날,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에서 요만한 크기의 작은 기계를 투입했는데, 그게 아버지가 해온 모든 일을 대신 한다고 한다. 그것도 훨씬 더 잘. 특히 더 맥 빠지게 하는 건, 우리 어머니도 달려나가 그걸 사 오셨다는 것이다.”
이런 주제에 대해 친구나 가족 또는 동료들과 얘기할 때마다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사람들이 일의 본질이 변화하고 있는 것에 분노한다는 것이다. 가슴 벅찬 기술 발전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황홀해 한다. 무인 자동차나 자가복제 3D 프린터 또는 가정에 전기를 공급하는 재충전 태양 전지의 가능성에 대해 말할 땐 흥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 인간이 하고 있는 많은 일을 대신하게 될 로봇이나 인공지능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면, 곧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렇다. 그들은 그런 변화들로 인해 자신이, 특히 자기 자식들이 수입을 거둬 이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사는 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닌가 걱정하는 것인데, 그들의 걱정은 사실 그보다 훨씬 근원적이다. 누군가 “이봐, 중국에는 24시간 안에 한 블록의 땅 위에 집 열 채를 출력해 놓을 수 있는 새로운 3D 프린터가 있대”라고 말한다면(그런데 실제 그런 프린터가 있다), 우린 경탄하면서 동시에 경악하게 된다. 달로 날아가거나 복권에 당첨되길 바라는 우리 마음의 일부는 이렇게 생각한다. ‘멋지군! 정말 흥분되는데.’ 그러나 우리 마음의 다른 일부, 그러니까 담보 대출금을 갚아나갈 생각을 하고 또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일부는, 우리 자신의 기술적 노후화와 사회적 의미의 축소를 뜻하는 이 불길한 징조들 앞에서 눈앞이 캄캄해진다. 우디 앨런이 그랬듯, 우리는 일자리를 잃게 되고 ‘요만한 크기’의 기계에 철저히 밀려나게 되는 걸 두려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술과 일의 관계를 인식하는 방식에는 모순이 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로봇이나 그 유사한 기술들의 발전으로 밀려나는 걸 두려워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생길 것으로 보이는 시간 외 노동에 찌들어 사는 걸 기꺼이 감수하려 한다. 우리는 이메일 같은, 아니 더 꼭 집어 말하자면 스마트폰 같은 기술 때문에 일과 우리의 나머지 삶이 뒤섞이는 걸 아주 싫어한다. 현재 많은 근로자가 이전 세대보다 훨씬 더 많은 탄력적 근무 시간을 이용하고 있으며, 이는 종종 기술 발전의 많은 혜택 가운데 하나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그 ‘혜택’을 누려본 사람이라면 그 혜택에는 어두운 면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주머니 속 휴대폰 때문에 ‘늘 접속된 상태’이니 말이다. 우리는 일주일에 며칠씩 집에서 일하기도 하는데, 이는 곧 밤늦게는 물론이고 가끔은 자다가도 이메일이나 문자에 답해야 한다는 걸 뜻한다. 인텔에서 일의 미래에 대한 연구를 하는 수석 엔지니어 멜리사 그레그Melissa Gregg는 이 주제와 관련해 명쾌한 글들을 써왔다. 자신의 저서 『일의 친밀감Work’s Intimacy』에서 그녀는 기술이 어떻게 사람들을 일에 더 심취하게 하는지를 이렇게 적고 있다.
“오늘날 인간이 만들어낸 많은 문화적 유산들 가운데 컴퓨터나 네트워크화된 장치들은 가족 관계에서부터 무역, 심지어 데이트 관행에 이르는 온갖 사회적 변화를 보여주는 신축성 있는 지수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온라인 연결로 인해 일에 대한 중산층의 심취가 극대화되는 것보다 더 분명하면서도 정치적 논쟁과 거리가 먼 것은 없다.”
여기에서 심취라는 말을 쓴 것은 아주 적절한데, 그건 심취라는 말이 우리와 일의 관계 그리고 우리와 기술의 관계가 가진 강박적인 특성을 제대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직장에서 퇴물 취급받으며 밀려나게 된다는 두려움 외에 기술 덕에 재택근무를 할 수 있게 되면서 더 열심히 더 오래 일해야 한다는 걱정까지 떠안게 되는데, 그것이 왜 일이 어디에나 존재하고 무거운 화젯거리가 되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학자이자 작가인 마크 데이비스(Mark Davis)는 〈가디언the Guardian〉지에 실린 한 기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몇 해 전만 해도 모든 사람이 스포츠나 부동산 가격 얘기를 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요즘엔 오직 한 가지, 즉 일 얘기뿐이다.”
이처럼 오늘날의 인간 존재와 일상생활에서 차지하는 일의 중요성이 워낙 분명해, 우리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생각한 적이 거의 없지만 실은 그런 과정이 필요하다. 일이라는 것이 우리가 하는 다른 모든 것들과 어느 정도 뒤얽혀 있는지를 명확히 하지 못할 경우, 로봇 공학과 인공 지능, 각종 애플리케이션, 정보 기술 등이 일이 의미하는 것 또는 일자리를 갖는다는 것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상황에서, 우리는 절대 그 엄청난 변화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학자 캐시 위크스Kathi Weeks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 문제를 명쾌하게 요약했다.
“오늘날 일이란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핵심으로…… 대부분의 사람이 의식주를 손에 넣는 방법이고…… 사회적 신분을 기르는 기본적인 수단이기도 하며, 또 대부분의 사람이 의료보험과 퇴직수당을 받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그녀는 이런 중요한 말도 덧붙였다.
“일은 소득과 자본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잘 훈련된 개인, 통치하기 쉬운 국민, 훌륭한 시민, 책임감 있는 가족 구성원도 만들어낸다.”
일의 이런 측면, 그러니까 사람들을 관리하기 쉬운 시민들로 바꿔놓는 측면이야말로 아마 유급 노동의 가장 당연시되는 측면인지도 모른다. 거의 논의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말하자면 정부나 기업들이 계속 일이 우리 삶의 핵심이라고 주장하고, 또 이른바 사회 엘리트층이 ‘탈 노동’ 후의 미래를 아주 두려워하는 데는 이런 숨겨진 동기가 있는 것이다. 일이 없는 세상은 통치하기 쉬운 국민을 만들기가 더 어려운 세상이기 때문이다.
일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이런 기능들을 하는 데는 그럴 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가 말하는 ‘일’과 ‘노동’의 차이를 알 필요가 있다. 이 구분은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사용하는 것으로, 그녀가 쓴 책 『인간 조건The Human Condition』의 핵심 개념이기도 하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일과 노동의 근본적인 차이는 이렇다. 먼저 ‘노동’은 우리가 한 인간으로서 삶의 정상적인 과정에서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하는 것이다. 그런 활동들은 모두 필요에 의해 행해지며, 삶을 지속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따라서 노동은 우리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는 노예 상태와 흡사하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 조건』에서 고대 그리스 시민들이 노예들을 활용해 어떻게 노동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졌는지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녀의 말을 들어보자.
“고대 사회에서 노동과 일은 노예들이나 하는 짓이어서 경멸의 대상이었다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현대 역사학자들의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대인들은 다른 방법을 모색해봤으며, 결국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는 모든 직업이 갖고 있는 천한 속성 때문에 노예를 소유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노동은 인간을 동물 같은 행동의 영역 속에 밀어 넣는 것이며, 그래서 그리스 시민들은 인간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동을 포기하고, 이를 노예들에게 넘긴 것이다. 그리스 문명은 그야말로 노동을 배제한 삶의 형태였던 것이다. 또한 노예들에게는 노동을 하지 않을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노예가 된다는 건 인간 이하의 미개한 인간이 되는 거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이런 관점에서의 노동은 사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며 공적인 삶의 일부가 아니었다. 공적인 삶에 참여하는 것은 시민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소명이었고, 그래서 노동은 공적인 영역에서 배제되었다.
이와 관련된 얘기들은 일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정의를 살펴본 뒤 좀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니, 머릿속에 잘 기억해두길 바란다.
일은 무엇보다 먼저 인간의 활동이다. 일은 노동처럼 자연 속에서의 생물학적이고 동물적인 필요성에 의해 행해지지 않는다. 사실 일은 인간의 욕망과 계획이라는 이름 아래 의식적으로 자연을 변화시킨다. 그런 계획과 의도가 포함되었기 때문에, 일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활동이며, 시민 즉, 자유인(고대의 시민들은 남자들뿐이었다. 절대 잊지 말라)이 온전한 시민권과 인간적인 성취를 추구하려고 행해지는 활동이다. 일은 또 공적인 활동이라는 점에서 노동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자연과는 별개로, 우리가 세대를 이어 계속 공존할 수 있는 공동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일 그 자체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지만, 일이 만들어 내는 것들은 정치적인 삶에 필요한 전제 조건들을 제공해준다.
일과 노동 간의 이 같은 차이를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여러 면에서 우리가 21세기에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노동을 피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서의 노예 제도에 찬성하지 않을 뿐 아니라, 노동 그 자체를 옛날처럼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물리적인 환경 자체가 워낙 많이 변해,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일과 노동은 상당 부분 그 경계가 희미해졌다. 그래서 우리는 적어도 어느 정도 노예 제도의 성격을 갖고 있는 일을 나름대로 자긍심을 갖고 하고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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