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몇 년 전 대동법과 관련해서 필자가 쓴 책에 대한 서평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서평의 제목은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였다. 아마도 훌륭한 인격을 가진 선비가 민생을 위한 좋은 정책에 반대하는 것을 보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기사를 읽으며 생각해 보지만 분명한 이유가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이 책은 그에 대한 고민의 결과이다.
선한 의지가 나쁜 정치로 이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곤혹스런 일이다. 그런 경우가 그렇게 드물지도 않다. 이런 상황은 좁은 의미로서의 현실 정치 영역에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만나 보면 좋은 사람인데 그가 속한 조직 안에서의 역할이나, 그가 속한 조직 자체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우리는 흔히 본다.
이 문제는 현실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학문적인 문제이다. 그것도 큰 문제이다. 유학儒學의 핵심적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유학에서 지식인의 바람직한 삶은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요약된다. 수기의 목적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치인의 이상은 더 많은 사람에게 유익한 정치를 펼치는 것이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수기가 되면 치인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대개는 믿었다. 거의 대부분 지식인들이, 조정에 몸담아 치인할 기회를 얻지 못했기에, 그 믿음은 별다른 도전을 받지 않았다.
수기치인은 조선시대 지식인들만 가졌던 믿음도 아니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가 오래 전에 쓴 유명한 책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1932 역시 같은 문제의식에서 나왔다. 과연, 좋은 사람들이 좋은 정치도 하고 도덕적인 사회도 만들 수 있을까?
오늘날은 조선시대와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치인’의 기회를 갖는다. 굳이 자신이 직접 치인할 기회를 못 가져도, 주기적으로 이루어지는 투표와 엄청난 양의 정보를 통해서 수기와 치인 사이의 연관성을 살펴볼 수 있다. 선거 때마다 좋은 사람을 뽑고자 하는 노력은, 그렇게 뽑은 좋은 사람이 좋은 정치를 하리라는 믿음이 전제된다. 하지만 그런 믿음의 현실적인 증거는 빈약하다.
조선시대 당쟁은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하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 부정적인 측면에서 조명된다. 그러한 당쟁 이해는 대부분 정확하지도 적절하지도 않다. 이 책에서 우리는 그 시대가 지향한 가치와 그 시대의 정치제도 및 관행 속에서 그 시대의 정치협상인 당쟁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렇게 보는 것이 조선시대를 더 잘 이해하는 길이라 믿는다.
누구나 알듯이, 정치행위는 권력 획득을 목표로 한다. 갈등이 없을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런 면에서 당쟁은 보편적인 정치현상이다. 조선시대도 오늘날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이 책은 특히 임진왜란 이전의 선조宣祖 대를 조명했다. 이 시기는 이제까지 일반에게는 물론이고 연구자들에게도 뚜렷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필자는 이 시기가 섬세한 주목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에 대단히 ‘조선다운’ 정치적 갈등의 양상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선조 대는 정치의 시대였다. 이 시대는 정치세력의 다양성 면에서 넓은 스펙트럼을 가졌다. 흔히 선조 대를 당쟁이 ‘발생’한 시대라고 한다. 정확한 말은 아니다. 당쟁이 없던 시대가 어디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이 책에서 ‘동서분당’이 발생한 선조 8년1575부터 기축옥사가 일어나고 일단락된 선조 23년1590까지 15년간의 당쟁을 살펴본 것에는 이유가 있다.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이 시대만큼 정치에서 이상理想이 드높이 외쳐진 시대도 드물었다. 그럼에도 그 결과는 몹시 비극적이었다.
조선시대 당쟁에 대한 연구는 학계에서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식민지 시대 일본인 학자들은 당쟁을 조선인의 부정적 민족성을 드러내는 방편으로 사용했다. 반대로, 1970년대 이후 당쟁 연구는 조선왕조의 정치에 비록 신분적 제한이 있기는 했지만 근대적 정당정치의 성격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당쟁이라는 말 대신, ‘붕당정치’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 책은 이 두 가지 관점 중 어느 쪽이 타당한가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두 연구 경향 배후에 있는 의도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당쟁을 권력현상의 관점에서 접근했다. 하나 더 첨언한다면 그것이 정치적 이상의 이름으로, ‘공론公論’ 혹은 ‘국시國是’ 등의 이름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왜 도덕적, 정치적 이상에 대한 사림士林의 오랜 집단적 열망이 그들 중 누구도 원치 않았던 거대한 파국으로 귀결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훌륭한 개인의 인격과 무관하게, 그들의 진정성에 독립하여 작동하는 정치적 힘의 실체는 무엇이었나?
필자는 이 책에서 두 가지 목표를 가졌다. 첫째 목표는 이 시기에 갈등했던 정치적 입장들 각각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던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각자에게 각자의 정당성과 진정성이 있다고 상정했다. 둘째 목표는 당시 실제 상황이 어떤 것들이었고, 그것들의 객관적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상충했던 각자의 입장이 똑같이 정당했다고 말하고 끝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첫째 목표도 쉽지 않지만, 둘째 목표도 쉽지 않았다. 이 책이 서술한 시기는 사료가 몹시 빈약하고 더구나 부정확하기까지 하다. 사관史觀이 매년 정리해 보관하던 기초 사료가 임진왜란으로 모두 없어졌던 것이, 이 시기 『선조실록』이 빈약하고 부정확한 이유이다. 또 당쟁이 치열해지면서 사관의 객관성이 흔들렸다. 처음으로 ‘수정실록’이 나온 이유이다. 이 시기를 살피면서 가장 큰 문제는 실제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파악하는 것이었다.
이 책에서 필자는 끊임없이 변주되면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을 경험적 사실로 정리하고, 그것에 적절한 정치적 합의를 부여하려 했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늘 현실을 파악하는 방식이다. 전통적 구분에 따르면 전자는 정치사의 영역이고, 후자는 정치사상이나 철학의 영역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 실제적 이해를 위해서는 사건과 그 의미를 분리할 수 없다. 현실에서 발생하는 사건과 그 의미는 동시에 파악될 수밖에 없다.
독자에 따라서는 이 책의 서술이 너무 상세하다고 느낄 수도 있고, 반대로 너무 소략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적절한 의미를 추출하기에는 경험적 사실의 집적이 부족하다고 볼 수도 있고, 대략적 흐름만을 파악하려는 독자에게는 현재 수준도 이미 필요 이상으로 번쇄할 수 있다. 어떤 쪽이든 필자는 경험적 사실들과 그 사실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연결해 보려 노력했다.
전사前史
기묘사화
어떤 시대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대개는 그 앞 시대부터 이해해야 한다. 선조대 당쟁도 다르지 않아서 기묘사화1519에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선조 대 당쟁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이황, 조식, 이준경, 백인걸 같은 제일 연장자급 인물들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적 경험이 바로 기묘사화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20세 전후에 겪은 기묘사화는 그들 생애 전체를 규정해 버린 원초적 경험이다.
반정을 통해서 중종재위 1506~1544은 갑자기 왕이 되었다. 그는 즉위 당시 19세였고, 반정 과정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다. 반정공신들에 떠밀려 말 그대로 갑자기 왕으로 추대되었다. 때문에 즉위 직후 그는 국왕의 권위와 힘을 전혀 갖기 못했다. 심지어 아내와도 강제로 헤어져야 했다. 즉위 전, 그는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 그의 부인 신씨慎氏의 아버지가 연산군의 처남이자 반정 당시 좌의정이었다. 반정공신들의 강요로 신씨는 폐비가 되었다.
하지만 재위 8년쯤 되었을 때 조정 상황에 변화가 왔다. 반정의 중심인물들이 차례로 사망했던 것이다. 그에 따라 중종에게 자신의 정치를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먼저 자기 사람들을 만드는 것이었다. ‘도학정치道學政治’라는 새로운 정치를 주장하며 조정에 진출하기 시작한 신진사류가 중종의 눈에 들어왔다.
조광조1482~1519를 대표로 하는 신진사류가 조정에서 활동한 기간은 길지 않다. 대략 중종 10년1515부터 14년1519까지 4년 남짓한 기간이다. 이 기간도 그들의 온전한 활동 기간은 아니었다. 중종이 이들에게 확실한 지지를 나타낸 것은 중종 12년1517 이후였다. 이들은 젊었고 하급관료에 불과했다. 하지만 주로 언관직에 있으면서 차차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언관言官은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을 말하는데, 직급은 낮아도 늘 왕과 대면하는 직책이었다. 신분적으로는 관료였지만 지식인으로 대접받고 스스로도 그런 정체성을 가질 수 있었다. 때문에 이 직책은 명예스럽게 여겨졌고 실제로 그 존재감도 높았다.
신진사류 언관들의 주요 공격 대상은 반정공신계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집권세력의 중추를 이루었다. 신진사류가 주장한 도학 정치의 논리는 군자소인론君子小人論이다. 정치가 올바르게 되려면 임금이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여, 소인은 내치고 군자와 정치를 해야 한다고 그들은 굳게 믿었다. 군자는 스스로 수양[修己]하여 덕이 있는 사람이고, 소인은 그렇지 못한 사람이다. 바르게 다스리려면 수기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신진사류의 공격을 받은 공신계 훈구대신은 쉽게 반격에 나서지 못했다. 신진사류의 말을 수긍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중종의 마음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발은 심하게 일어났다. 이들의 불만을 잘 표현한 말은, 신진사류가 “자기들과 견해가 같은 자는 선인善人이라고 하고 다른 자는 악인惡人이라고 한다.”는 말이었다. 신진사류의 주장이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말이다. 이들 입장에서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고, 또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신진사류의 정치적 이상은 쉽게 부정할 수 없지만, 그것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무리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중종과 신진사류의 관계는 오래지 않아 중종에게도 점차 부담스러운 것이 되었다. 신진사류의 정치적 요구가 중종이 상정했던 수준을 지나치고 있었다. 신진사류에게 일방적으로 공격받던 훈구대신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결국 중종의 암묵적 동의를 얻어 신진사류를 몰아냈다. 그 몰아내는 과정이 격렬했는데, 그것이 기묘사화이다.
기묘사화로 피해를 입은 신진사류를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 부른다. 대표적 인물이 조광조이고, 그 외 김정金淨과 기준奇遵, 한충韓忠, 김식金湜 등을 들 수 있다. 조광조는 능주綾州현 전남 화순에 귀양 갔다가 곧 사약을 받아 죽었고, 나머지도 귀양 갔다가 일부는 사형을 당했거나 자살했다. 그들 대개 30대 초중반이었다. 이들 외에도 그들을 옹호하던 우의정 안당安瑭과 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 형제 등 고위 관직자들이 조정에서 쫓겨났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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