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읽기 1
압록강에서
북한만 바라보지
말자!
통일 관련 답사의 단골 코스, 압록강
1992년 한․중 수교 전후부터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는 임진각 통일전망대, 판문점, DMZ에 이어 한국의 다양한 단체와 모임이 기획한 “통일” 관련 답사의 단골 코스가 되었다. 답사 일정을 대체로 살펴보면, 단둥(단둥)—지안(집안)—백두산—옌지(연길)—투먼(도문)—팡촨(방천) 코스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이런 여정을 접할 때마다 안타깝게 생각하는 점이 있다. 이를테면 두만강을 빼고 압록강만을 답사한다고 해도 편도 1,0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3박 4일 또는 4박 5일의 짧은 일정으로 소화해내야 한다. 그렇다면 한 지역에서 반나절 이상 머물기 쉽지 않다.
단둥 답사도 마찬가지다. 단둥 일정은 신의주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압록강단교 방문”과 “압록강에서 유람선 타기”, 그리고 북한 섬인 “황금평을 버스로 바라보기”가 전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답사 지역이 중국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시선은 강 건너 북한에 고정되어 있다. 그렇다보니 그들의 여행후기는 “휴전선 너머 북한을 바라보기”와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
광복과 분단 70년, 압록강에서 반복되는 북한만 바라보기
단둥에 갈 때마다 나는 압록강단교, 유람선, 황금평 근처에 이르면 한국에서 온 여러 단체, 연구원, 언론인들이 북한을 바라보면서 “단절과 분단”을 이야기하고 “미래의 통일과 교류”를 고민하는 모습을 보았다. 특히 2015년 광복과 분단 70년을 기념하기 위해 “평화통일기행”을 다녀온 모습과 내용을 뉴스와 인터넷 블로그 등을 통해서 자주 접하였다.
그 가운데 지난 20여 년 동안 보인 단둥 답사 코스의 전형적인 모습과 한국사람들의 일반적인 시선이 압축되어 있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중앙일보》가 주최한 “평화 오디세이: 평화를 향한 성찰과 소통의 오디세이… 한국 대표지성 31인의 5박 6일 동행”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를 보도한 2015년 7월 6일자 《중앙일보》 기사는 단둥과 신의주의 대조되는 야경 사진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국경은 철조망이다. 장벽이요 단절이다. 접경지역은 동면, 죽음의 땅이 된다.
황금평을 바라보고는 이렇게 썼다.
북․중 경제 협력의 상징인 경제특구로 지정된 지 5년째다. 하지만 변변한 건물 하나 없다. 짓다 만 청사 건물 주위로 농민들이 논밭을 부치고 있을 뿐이다.
유람선에서의 소회는 이렇다.
중국의 개방과 북한의 폐쇄가 상황을 역전시켰다. 지금 단둥은 경제적으로 신의주를 지배하고 있다. 단둥에선 강변을 따라 고층건물이 높이 경쟁을 하는 반면 신의주의 주택은 낡고 공장은 멈춰 있다. 유람선에서 볼 수 있는 지역은 신의주에서도 부촌이다.
《중앙일보》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단둥을 떠나 지안으로 향한다.
단절의 접경이 아닌 교류의 접경을 찾아서 온 단둥에서도 답을 찾는 데 한계가 있었다.
코끼리 뒷다리만 만지고 코끼리를 그릴 수는 없다
《중앙일보》 기사에서 보이는 숱한 오류와 편견은 앞으로 설명할 것이다. 예를 들어, 그들의 시각에는 압록강의 국경을 단절의 국경선으로 보는 무지가 곳곳에 엿보인다. 그들의 견해에는 황금평 너머 단둥의 신시가지에서 5년 넘게 북․중 경제협력이 실천되고 있다는 내용 등이 빠져 있다. 그런데 숱한 오류 속에서도 맞는 말이 하나쯤은 있었다. 단둥에 가서 압록강 너머 신의주만 보면 평화와 교류의 답을 찾는 데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소설가 김훈은 《중앙일보》 2015년 7월 6일자 신문에 유람선 위에서 신의주를 망원경으로 보고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한번 생각을 해보자. 아무리 망원경으로 본다 하더라도 평지에서 나름 북한의 제2의 도시라 일컬어지는 강 건너 신의주를 본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망원경으로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바라볼 때에 더 잘 보이지 않을까? 더군다나 신의주의 압록강변에는 주로 군부대나 항만시설이 들어서 있고, 최근 몇 년 사이에 부쩍 자란 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압록강단교와 유람선 위에서는 낡은 어선과 건물 들이 주를 이룬 신의주만이 보일 뿐 신의주의 깊숙한 곳까지 보기는 어렵다. 이러고서 신의주와 북한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생활의 느낌이 나지 않는다.”고 언급한 소설가 김훈에게 단둥의 20층 전후 높이의 호텔과 아파트 옥상에서 망원경이 아닌 맨눈으로도 확인되는 신의주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최근 2~3년 사이에 신의주에서는 약 15층 높이 이상으로 보이는 10여 동의 아파트단지가 건설되고 있다. 이런 장면은 압록강단교와 유람선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중․조 국경은 휴전선이 아니다.
단둥에 오면 사람들은 압록강에서 북한을 바라보며 휴전선의 이미지만을 떠올린다. 그리고 남과 북 사이에 놓여 있는 휴전선과 압록강 위의 중․조 국경은 성격과 특징이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중․조 국경은 휴전선이 아니다. 그러나 압록강에 간 한국의 여행객과 답사객들은 단절과 분단의 휴전선 이미지만으로 압록강과 중․조 국경지역을 이야기한다.
서울대학교 송호근 교수가 그 전형적인 예다. 그는 압록강단교를 걸으면서 휴전선의 이미지로 압록강을 바라본다.
지금은 막힌 강, 헐벗은 강, 초라한 능선만 드러낸 불임不姙의 강이 되었다. 분단 70년 동안 그랬고, 광복 70주년을 맞는 오늘도 그러하다. 간도 이편에서 바라본 저 강은 오랫동안 건널 수 없는 강, 국경이었다. _《중앙일보》 2015년 7월 13일자
일단 사실관계부터 틀렸다. 그가 말한 “오랫동안” 압록강이 한국사람이 건널 수 없는 강이 된 것은 아니다. 비록 한때이지만 한국사람도 건널 수 있는 강이었다가 중단되었다는 말이 사실이다. 그것도 대북제재의 일환으로 남북 간 교역과 교류를 중단한 2010년 이른바 5․24 조치 이후이다. 또한 그가 압록강을 바라본 2015년 지금도 한국에서 출발한 한국 물건은 압록강을 건너 이틀이면 북한 평양에 도착한다. 신의주는 하루면 충분하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최소한 압록강은 그가 말한 “막힌 강”과 “불임의 강”은 아니다.
소설가 김훈도 마찬가지다. 그는 《중앙일보》 2015년 7월 9일자에 “월경 이탈자를 막기 위해 철조망이 처져 있고” 혹은 “이 강가에서 지금 중국 공안들이 월경한 북한사람들을 잡으려고 풀숲을 뒤지고 있다.”고 쓰고 있지만, 중․조 국경지역의 철조망은 휴전선처럼 끝없이 이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다면 이러한 발언은 틀리거나 부분적인 사실뿐임을 알 수 있다.
중․조 국경에서 철조망 사이마다 열려 있는 공간은 수없이 많다. 그곳을 이용해 중국사람은 철조망 너머에서 농사도 짓고 빨래도 하고 북한사람과 삶을 공유한다. 또한 중국 국경지역에는 탈북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단둥에는 합법적으로 거주하는 북한사람이 2만여 명 넘게 존재한다. 두만강 지역의 중국 국경 도시에도 탈북자가 아닌 북한사람이 증가하고 있다. 편견에 차서 전체를 보지 못하고 일부분만 보고 돌아온 뒤, “분단은 일상의 질서와 정서로 고착된 것이 아닌가 하는 위기감을 안고 돌아왔다.”(《중앙일보》 2015년 7월 6일자)는 김훈의 글에 안타까움이 남는 이유다.
두만강변과 압록강변 즉 중․조 국경지역은 우리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곳이다. 단둥시내를 걷다보면, 눈으로 보고 경험을 하면서 북한의 변화와 교류의 실상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장소와 공간이 곳곳에 있다. 또 남북 교류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북한 사람을 쉽게 목격할 수 있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은 길을 걸어갈 수도 있다.
그곳에는 북한사람, 북한화교, 조선족과 더불어 20년 넘게 압록강과 국경에 기대어 살고 있는 한국사람도 있다. 하지만 송호근과 김훈, 그리고 답사 일행은 압록강 건너편에서 신의주의 극히 일부분 이미지만을 보고 북한 사회를 진단한다. 그리고 중국 국경지역에서 벌어지는 삶의 현장을 들여다보지 않고서 그들이 보고자 한 것만 본 다음에 휴전선의 시각으로 단절과 분단을 이야기하고 있다.
단둥에서의 남북 교류는 20년 넘게 현재진행형
2004년 여름, 중국의 최대 국경도시 단둥에서 마주친 현장 내용은 인류학 박사 논문을 준비하기 위해서 연구지역을 찾던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당시 나는 한국의 기사와 논문 들만을 읽고 중국의 동북 3성에는 탈북자만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며칠 머문 민박집의 조선족 사장님은 자신이 고용한 파출부 아줌마의 사연을 이야기해주었다.
손님에게 삼시세끼를 해주는 저 사람의 고향이 어디인지 아세요? 말투가 다르죠! 그녀는 통행증을 이용해 압록강을 건너온, 그러니까 국경을 넘어왔고 고향은 신의주입니다. 저희 집에서 3개월째 일하고 있는데, 다음 달에 모은 돈을 가지고 이런저런 물건을 구입해서 다시 신의주에 갈 예정입니다. 남쪽에서 알고 있는 탈북자와는 다른 사람이죠.
순간 레드콤플렉스에 두려운 눈빛을 한 나를 보고 그는 연이어 아들이 다니는 학교 이야기를 해주었다.
중국 학교에 가보세요. 같은 반에 조선(북한), 한국, 조선(북한) 화교, 조선족 아이들이 중국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참 다문화가정의 아이들도 있죠! 이렇게 어울려 살기 시작한 것이 1992년 한․중 수교 전후부터입니다. 그런데 북한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고 단둥에서는 한국사람보다 북한사람이 더 부자가 많습니다.
제가 조선(북한)을 좋게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조선(북한)의 엘리트 무역일꾼들이고 그들의 자녀이니까 당연하죠. 앞으로 이곳을 공부한다고 하니까, 제가 한마디 하죠! 편견 없이 바라보세요! 단둥은 그런 곳입니다.
2년 동안 그의 이야기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고 2006년 가을, 나는 본격적으로 인류학의 참여관찰을 하기 위해 단둥에 일 년 넘게 살 삶의 터전을 잡았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위의 두 사례가 가능한 이유와 의미를 알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이런 초심을 가진지도 세월이 흘러 어느덧 10여 년 전의 일이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단둥에서 남북 교류의 이야기보따리를 수도 없이 듣고 있다.
이와는 달리 단둥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시각은 그동안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10년 5․24 조치 이후, 한국 사회는 남북 관계가 개성공단을 제외하고 대부분 단절되었다고 말한다. 남북의 일상적인 만남은 미래의 일로 치부하는 이야기들이 넘친다.
다시 찾은 2015년 3월의 단둥은 1992년, 2004년, 2010년과 비교해보아도 남북의 만남의 현장과 사례 들은 여전했다. 국경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국사람들의 술자리에서는 대북 사업파트너로 자주 만나는 북한 주재원 아들의 단둥 생활, 그러니까 그의 빠른 중국어 실력 향상을 놓고 덕담이 오갔다.
이른 아침, 단둥역 광장에는 여전히 평양행 국제기차를 기다리는 수많은 북한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북한사람을 만난 조선족은 한국에서 하루 전에 구입한 의약품과 단둥의 한국 식당에서 주문한 도시락을 건네주고 있었다. 평양행 국제기차에 탑승하는 누군가를 배웅하러 나온 한국사람 A를 우연히 만났다. 우리는 기차역을 빠져나와 대북사업 15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
소파에 앉자마자 그는 가슴속에 간직했던 답답함을 털어놓는다.
단둥만큼 한국의 매스컴에 많이 나오는 외국 도시도 없다. 또 단둥만큼 왜곡되는 도시도 없다. 왜 한국 사회는 단둥에서 남북만남이 20년이 넘게 진행되고 있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까!
사람들의 일상적인 만남이 매일 이루어지고 그 속에서 통일이 미래가 아니고 현재임을 보여주는 것이 단둥인데! 왜 단둥에 와서 북한만 바라보고 단절만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 단둥에는 북한사람도 있고 한국사람도 있다.
그의 말에는 그동안 “한국 사회가 단둥을 어떻게 바라보았고 단둥에서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에 대한 성찰의 내용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나는 감히 “압록강(단둥)에서 북한(신의주)만 바라보지 말자!”고 제안을 한다. 이는 좁게는 단둥과 신의주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작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