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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나 한 판 할까
공작 마리노 2세의 아들 베르나르도가 라치오 주의 도시 가에타의 추기경으로 임명된 것은, 서기 1000년까지 고작 3년밖에 남아 있지 않았을 때였다. 그가 동시대인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서기 1000년의 도래와 함께 세상이 끝나리라 믿고 있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신중했던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평시와 다를 바 없이 행동하자고 마음먹었다. 어쨌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최선의 선택이 될 테니까. 그런 생각으로 그는 서기 997년 메르코와 파사나라는 이름의 부부로부터 가릴리아노Garilgliano 강가에 있는 방앗간을 빌린다. 넓은 포도밭이 딸린 멋진 방앗간이었다. 그 임대계약서가 가에타에 있는 대성당Cattedrale dei Santi Erasmo e Marciano e di Santa Maria Assunta의 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 일정량의 곡식으로 임대료를 지불해야 한다고 규정한 이 계약서는 여러 조항들을 열거한 후에 “더불어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당신과 당신의 자손들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임대료로 피자 열두 판과 돼지고기 어깨 살 및 콩팥을 지불해야 하고, 부활절에도 이와 비슷하게 피자 열두 판과 닭 몇 마리를 지불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중세 라틴어식 표현, “피자 열두 판dupdecim pizze”이라는 말이다. 즉 계약서가 작성되었을 당시에 흔히 통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 말은 오늘날 우리가 쓰는 말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서기 997년에 가에타에서 피자가 과연 어떤 모양새를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아무것도 가미하지 않은 포카차focaccia와 비슷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우리 시대의 포카차와 얼마나 닮았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한, 이것이 ‘피자’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최초의 문서다. 이 이름을 다시 발견하려면 50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1570년으로 가야 한다. 바로 교황 피오 5세의 요리사 바르톨로메오 스카피가 자신의 요리책을 출판했던 해다. 정말로 교황이 피자를 즐겼는지, 아니면 추기경 중 누군가가 피자를 좋아했던 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요리사가 피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요리책에는 “여러 가지 식재료를 사용해서 만드는 둥근 빵, 즉 나폴리 사람들이 피자라고 부르는 것을 요리하기 위해서는”이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물론 피자의 역사가 가릴리아노 강가의 방앗간 임대계약서에 그 이름이 등장했던 시대보다 훨씬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분명하다. 고대 그리스인들 또한 얇고 넓게 펼친 밀가루 반죽을 익힌 뒤 다양한 식재료를 가미해서 먹는 습관이 있었으니 말이다. 한편 르네상스 시대의 탁월한 요리사이자 페라라의 에스테Este가문에서 궁정 집사로 활동했던 크리스토포로 다 메시스부고Cristoforo da messisbugo는 스카피보다 몇 년 앞선 1564년에 ‘피자 스폴리아타pizza sfogliata’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그가 언급한 이 ‘피자’가 최초의 피자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스폴리아타’라는 수식어 때문이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않고서는 이 음식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피자와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이 ‘스폴리아타’는 버터에 구워 설탕을 뿌려 먹는 음식이다. 우리가 먹는 피자와 공통점이 있다면 이름뿐, 그 모양은 사육제 기간에 즐겨 먹는 과자나 로마식 라자냐와 더 많이 닮은 것이 사실이다.
사실 스카피가 제안한 피자도 우리 시대의 피자집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이 피자는 먼저 절구에 아몬드나 잣, 신선한 무화과와 건포도 등을 집어넣어 잘 다지고 장미수를 부어 섞은 뒤에 달걀노른자와 설탕, 계피, 포도즙 등을 가미해서 반죽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버터 100그램 정도를 바른 틀에 반죽을 채워넣는데 두께가 손가락 마디로 하나 반이 넘지 않도록 한다”. 이 경우에도 분명한 것은 이 피자가 케이크에 더 가깝고 흔히 우리가 먹는 피자와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1500년대에는 피자가 후식용 케이크였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바로 1598년 존 플로리오가 편찬한 이탈리아어-영어 사전이다. 여기서 그는 ‘피자’라는 단어가 원래는 “충동적인 욕망”을 뜻했다고 소개한 뒤 “일종의 케이크나 파니노panino 혹은 웨이퍼”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어쨌든 스카피가 제안한 피자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모델이 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가 말하는 피자의 원산지가 나폴리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그의 피자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소금이나 설탕을 넣어 만들던 모든 케이크와 구별된다. 두 번째는 그의 피자 조리법이 르네상스 시대의 모든 음식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까다로웠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원하는 대로 식재료를 가미할 수 있는, 아주 간편한 개념의 음식이었다는 점이다. 스카피는 이렇게 말한다. “피자에는 다양한 종류의 식재료를 가미할 수 있다.” 물론 반죽에 생과일, 말린 과일과 달걀, 버터를 가미해서 만드는 복잡한 단계를 벗어나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우리는 밀가루와 효모를 사용하는 단순한 단계로 탈바꿈한 피자를 만나게 된다. 덧붙이자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피자가 탄생한 것은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이탈리아로 토마토가 수입된 뒤에야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피자 반죽에 과일을 곁들이는 일을 결코 이상하게 여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늘날 이탈리아에서 흔히 쓰이는 ‘무화과 피자는 아니지mica pizza e fichi’라는 속담은 한때 사람들이 피자와 무화과를 함께 먹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무화과 피자는 가난한 사람들이 화덕에 구운 둥그런 빵에 길거리 어디에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무화과를 얹어 먹던 음식이었다. 오늘날 이 속담은, 비싼 돈을 들여 음식을 준비했을 때 돈을 조금도 아끼지 않았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물론 교황에게 대접했다는 사실과는 분명히 모순되는 점이 있다. 하지만 교황도 그의 요리사도 나폴리와, 아니 아예 이탈리아 남부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교황에 오른 1566년 전까지만 해도 안토니오 기슬레리Antonio Ghisleri라 불리던 피오 5세는 북부 이탈리아 피에몬테 주, 알레산드리아 근교의 보스코 마렌고Bosco Marengo 출신이었다. 바르톨로메오 스카피 역시 북부 이탈리아 마조레 호수 근교 바레제의 관할 도시 루노 디 두멘차Runo di Dumenza에서 태어났다. 이 사실이 밝혀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1998년 산조르조 교구 성당의 복원 공사 당시 비문이 발견되면서 교황청의 수석 요리사가 유아세례를 받은 성당에 상당 액수의 돈을 기부했다는 사실과 함께 밝혀진 내용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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