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소설가는 포용적인 인종인가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라고 하면 처음부터 얘기의 범위가 너무 넓어질 것 같아서 우선은 소설가라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편이 더 구체적이고 실제로 눈에 보이기도 하고, 비교적 얘기가 술술 풀려나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가 본 바를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소설가 대부분은─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원만한 인격과 공정한 시야를 지녔다고 하기는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또한 보아하니, 그리 큰 소리로 할 얘기는 아니지만, 칭찬하기 힘든 특수한 성향이며 기묘한 생활 습관이며 행동 양식을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작가는(대략 92퍼센트일 거라고 나는 예상하는데) 그걸 실제로 입 밖에 내느냐 마느냐는 제쳐두고, ‘내가 하는 일, 내가 쓰는 글이 가장 올바르다.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고 다른 작가들은 많든 적든 모두 틀려먹었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생각에 준하여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이런 자들과 친구나 이웃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극히 조심스럽게 표현해서, 그리 많지 않은 거 아닐까요.
작가들끼리 돈독한 우정을 쌓고 있다는 말이 이따금 들려오는데 나는 그런 얘기를 들으면 대체적으로 ‘깜빡 속지 말아야 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이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친밀한 관계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을걸, 이라고 말이죠. 작가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인종이고 역시 자존심이나 경쟁의식이 강한 사람이 많아요. 작가들끼리 붙여놓으면 잘 풀리는 경우보다 잘 풀리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나 자신도 몇 번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잘 알려진 사례지만, 1922년에 파리의 어느 디너파티에서 마르셀 프루스트와 제임스 조이스가 동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은 바로 옆자리에 있었는데도 끝까지 거의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주위에서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두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나눌 것인가, 마른침을 삼키며 지켜봤지만 완전히 허탕을 쳤습니다. 서로 자부심 같은 게 강했던 것이겠지요. 뭐, 흔한 얘기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직업에서의 영역 배타성이라는 점에 관해서 말하자면─쉽게 말해 ‘내 구역’ 의식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렇다는 얘기인데─소설가만큼 넓은 마음을 갖고 포용력을 보이는 인종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건 소설가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장점 중의 하나가 아닐까라고 나는 늘 생각합니다.
좀 더 알기 쉽게 구체적으로 설명해볼까요.
예를 들어 어느 소설가가 노래를 잘해 가수로 데뷔했다고 합시다. 혹은 그림에 소질이 있어 화가로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고 합시다. 그 작가는 거의 틀림없이 여기저기서 적지 않은 저항을 겪고 야유와 비웃음도 뒤집어쓰게 될 것입니다. ‘괜히 우쭐해서 아무 데나 끼어든다’ ‘아마추어 취미 수준, 이름을 내걸 만한 기능도 재능도 없다’라는 말들이 틀림없이 나올 것이고, 프로 가수와 화가에게서는 냉랭한 대접을 받지 않을까요. 어쩌면 은근한 따돌림 정도는 당할 수도 있습니다. 최소한 여기저기서 ‘네에, 잘 오셨습니다’ 하고 따뜻한 환영을 받는 일은 거의 없을 겁니다. 만일 있다고 해도 그건 지극히 한정된 장소, 지극히 한정된 분들의 환영이겠지요.
나는 소설을 쓰는 한편으로 지금까지 삼십여 년 동안 적극적으로 영미 문학 번역을 해왔지만, 처음 한동안은(혹은 지금도 그런지 모르지만) 반발이 상당히 심했습니다. ‘번역이란 아마추어가 손댈 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다’ ‘소설가가 번역이라니, 민폐 끼치는 취미다’라는 식으로 여기저기서 말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언더그라운드』라는 책을 썼을 때는 논픽션 전문 작가들에게서 대체로 혹독한 비판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논픽션 작성법을 모른다’ ‘눈물을 구걸하는 값싼 글’ ‘재미 삼아 하는 짓’ 등등 다양한 비판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나는 이른바 장르적 ‘논픽션’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 나름대로 생각하는, 문자 그대로 ‘비非픽션’이라고 할까, 요컨대 ‘픽션이 아닌 작품’을 써보려고 했던 것인데, 결과적으로 아마 ‘논픽션’이라는 ‘성역’의 파수꾼 호랑이들의 꼬리를 밟아버린 모양입니다.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건 알지도 못했고, 애초에 논픽션에 ‘고유한 작성법’이 있다는 건 생각해본 적도 없어서 처음에는 상당히 당황스러웠습니다.
그처럼 어떤 일이든 전문이 아닌 쪽에 손을 대면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일단 달가운 얼굴은 하지 않습니다. 백혈구가 체내의 이물질을 배제하려고 하듯이 접근을 거부하려고 듭니다. 그래도 위축되지 않고 끈질기게 하다 보면 나중에는 차츰 ‘에이, 어쩔 수 없이’라는 식으로 묵인하고 동석을 허락해주는 모양이지만, 적어도 처음에는 상당히 반발이 심합니다. ‘그 분야’가 좁을수록, 전문적일수록, 그리고 권위적일수록, 사람들의 자부심이나 배타성도 강하고 거기서 날아오는 저항도 커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 이를테면 가수나 화가가 소설을 썼다면, 혹은 번역가나 논픽션 작가가 소설을 썼다면, 소설가는 그것에 싫은 얼굴을 할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가수나 화가가 소설을 쓰고, 번역가나 논픽션 작가가 소설을 쓰고, 그런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경우도 적잖이 눈에 띕니다. 하지만 그걸로 소설가들이 ‘아마추어가 당치 않은 짓거리를 한다’고 화를 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험담을 하거나 야유하거나 심술궂게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일도, 적어도 내가 보고 들은 한에서는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전문 이외의 사람을 향한 호기심이 발동해서 기회가 닿으면 마주 앉아 소설에 대해 애기하고 때로는 격려도 해주고 싶다고들 생각하지 않을까요.
물론 뒤에서 작품에 대해 험담하는 일쯤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소설가들끼리도 일상적으로 하는 짓이고, 말하자면 통상 영업 행위지 다른 업종의 참여와는 딱히 관계가 없습니다. 소설가라는 인종은 수많은 결함이 눈에 띄기는 하지만, 누군가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는 것에 관해서는 대체적으로 대범하고 포용적인 것 같습니다.
그건 어째서일까요?
내가 생각건대 그 답은 아주 확실합니다. 소설 따위─‘소설 따위’라는 말투는 약간 난폭하긴 합니다만─쓰려고 마음만 먹으면 거의 누구라도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피아니스트나 발레리나로 데뷔하려면 어릴 때부터 길고 험난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화가가 되는 데도 어느 정도 전문 지식과 기초적인 기술이 필요합니다. 애초에 그림 도구 일습을 장만해야 합니다. 등산가가 되는 데는 남다른 체력과 테크닉과 용기가 요구됩니다.
그런데 소설이라면 문장을 쓸 줄 알고(대개의 일본인은 쓸 수 있지요) 볼펜과 노트가 손맡에 있다면, 그리고 나름의 작화作話 능력이 있다면, 전문적인 훈련 따위는 받지 않아도 일단 써져버립니다. 아니, 그보다 일단 소설이라는 형태가 만들어져버립니다. 인문계 대학에 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소설을 쓰기 위한 전문 지식 따위, 있으나 마나 한 것이니까.
재능이 좀 있는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뛰어난 작품을 써내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내 경우를 실례로 들고 나서는 건 약간 면구스럽기는 한데, 이를테면 나만 해도 소설을 쓰기 위한 훈련이라고는 전혀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일단 대학 인문학부 영화연극과라는 곳에 다니기는 했지만, 시대적인 상황도 있어서 공부는 거의 하지 않고 머리 기르고 수염 기르고 지저분한 꼴로 그 근처를 빈들빈들 돌아다닌 것뿐입니다. 작가가 되겠다는 작정도 딱히 없었고 미친 듯이 습작을 써본 적도 없이, 어느 날 불현듯 생각이 나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첫 소설(같은 것)을 썼고 그걸로 문예지의 신인상을 탔습니다. 그리고 뭐가 뭔지 잘 알지도 못한 채 직업적인 작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간단해도 되는 거야?’ 하고 나 자신도 저절로 고개를 갸웃거렸을 정도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간단하잖아.
이런 말을 하면 ‘문학을 대체 뭘로 보는 거냐’라고 불쾌하게 생각하실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이 일의 기본적인 양상에 대해 말하려는 것뿐입니다. 소설이라는 건 누가 뭐라고 하든 의심할 여지 없이 매우 폭이 넓은 표현 형태입니다. 그리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 폭넓음이야말로 소설이 가진 소박하고도 위대한 에너지의 원천의 중요한 일부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누구라도 쓸 수 있다’는 건 내가 보기에는 소설에게는 비방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입니다.
즉 소설이라는 장르는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진입할 수 있는 프로레슬링 같은 것입니다. 로프는 틈새가 넓고 편리한 발판도 준비되었습니다. 링도 상당히 널찍합니다. 참여를 저지하고자 대기하는 경비원도 없고 심판도 그리 빡빡하게 굴지 않습니다. 현역 레슬링 선수도─즉 이 경우는 소설가에 해당하는데─그런 쪽으로는 애초에 어느 정도 포기해버린 상태라서 ‘좋아요. 누구라도 다 올라오십쇼’라는 기풍氣風이 있습니다. 개방적이라고 할까, 손쉽다고 할까, 융통성이 있다고 할까, 한마디로 상당히 ‘대충대충’입니다.
하지만 링에 오르기는 쉬워도 거기서 오래 버티는 건 쉽지 않습니다. 소설가는 물론 그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소설 한두 편을 써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소설을 오래 지속적으로 써내는 것, 소설로 먹고사는 것, 소설가로서 살아남는 것, 이건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보통 사람은 일단 못할 짓, 이라고 말해버려도 무방할지 모릅니다. 거기에는 뭐랄까, ‘어떤 특별한 것’이 점점 필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 나름의 재능은 물론 필요하고 그만그만한 기개도 필요합니다. 또한 인생의 다른 다양한 일들과 마찬가지로 운이나 인연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더해서 어떤 종류의 ‘자격’ 같은 것이 요구됩니다. 이건 갖춰진 사람에게는 갖춰져 있고, 갖춰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런 것이 갖춰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후천적으로 고생고생 해가며 습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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