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L. 닥터로
E. L. Doctorow
E. L. 닥터로는 『다니엘서The Book of Daniel』『래그타임Ragtime』 『문 호Loon Lake』 『세계박람회Wold’s Fair』 『빌리 배스게이트Billy Bathgate』 『3월The March』,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앤드류의 뇌Andrew’s Brain』를 썼다.
최근에 읽은 책 가운데 가장 좋았던 책은 무엇입니까?
음, 판테온에서 랜드마크 시리즈로 낸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들 수 있을 겁니다. 헤로도토스는 정말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역사학자이고, 탐사기자이면서, 천생 이야기꾼이기도 하죠. 아니면 토머스 네이글의 『마음과 우주Mind and Cosmos』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신新다윈주의와 과학적 유물론을 철학적으로 강하게 비판한 글이죠. 용감한 반대자의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읽고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떠올랐어요. “우리가 갖고 있던 과학적 질문들이 전부 그 해답을 찾았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문제는 아직 취급조차 되지 않았다.” 또다른 최고의 책은 돈 드릴로의 『코스모폴리스Cosmopolis』입니다. 아름다운 자만심이 이 소설에 흐르고 있죠. 리무진을 타고 맨해튼 미드타운을 가로지르는 서사시적 여정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의 새 단편집 『천사 에스메랄다The Angel Esmeralda』도 좋았어요. 드릴로는 세계에 대한 이해가 완숙한 경지에 오른 작가입니다. 그다음엔 해럴드 블룸의 『미국의 종교The American Religion』를 꼽고 싶은데, 이 책은 미국의 기독교가 기독교적이기보다는 영지주의靈智主義에 더 가깝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모르몬교가 이 나라 종교의 미래라고 보지요. 요즘에는 『현대물리학, 시간과 우주의 비밀에 답하다From Eternity to Here』에 빠져 있는데, 물리학자 숀 캐럴이 시간에 대해 쓴 대단히 흥미로운 책입니다. 시간은 물리학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그들은 시간이 왜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는지를 묻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읽는 책도 포함시킬 수 있다면, 시머스 히니의 번역으로 나온 『베오울프Beowulf』를 다시 읽고 있어요. 노래로 부를 수 있는 책이 바로 여기에 있었네요.
언제, 어디서 책 읽는 걸 좋아하십니까?
제 책상에 앉아서요. 날씨가 좋을 때는 바깥 뒷마당에서 읽는 것도 좋아합니다.
다시 읽기를 좋아하신다면, 어떤 책을 주로 다시 집어드시나요?
몽테뉴, 그리고 체호프요. 그들은 절대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죠. 몽테뉴는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회고록을 쓴 사람이에요. 그는 자신의 삶을 하나의 서사로 구축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어요. 그저 자신의 생각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지요. 자기 자신의 머릿속으로 깊숙이 침잠해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그 사유와 감정을 적어놓지요. 흰 불빛 아래서 일종의 자화상 시범 스케치를 하는 거예요. 『수상록』이라는 제목으로 출판을 해서 말이지요. 안톤 체호프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처럼 인생을 종이 위에다 옮겨놓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는 비판적인 분석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문장은 마치 그냥 뿌려놓은 듯 인위적인 기교가 하나도 없지요. 리처드 피비어와 라리사 볼로콘스키가 번역한, 『이중주The Duet』와 『3년Three Years』을 포함한 다섯 개의 단편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 엄격하고 신중한 정신이 배어 나오지 않는 번역본은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대학에 계신 동안에 연극일을 하시고 할리우드에서 대본을 읽고 골라내는 일을 하셨지요. 그런 경험들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었나요?
그렇습니다. 케니언 대학 재학 시절에 연극에 깊이 관여했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놀랍습니다. 『리어 왕』에서 에드거 역할을 하고, 클리퍼드 오데츠의 『황금 소년Golden Boy』에서 조 보나파르트를 연기했던 그 소년은 누구였을까요? 아시다시피, 당시에는 연극에 올릴 희곡을 쓰려는 마음이 있었고, 배우들이 겪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무대 경험이 필요했지요. 글로스터의 착한 아들 같은 역할을 맡게 되면 그 텍스트를 자세하고 강박적으로, 말하자면 영문학 전공자도 그렇게까지는 읽지 않을 정도로 꼼꼼하게 읽게 되지요. 그래서 연극이 어떻게 짜여 있고 어떻게 축조되었으며, 진행되면서 어떻게 그 긴장을 유지하는지, 또 인물이 어떤 방식으로 제시되는지를 배우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 심장박동을 느끼죠. 셰익스피어를 할 때는 단어들을 소리내어 말하면서 언어의 음악, 운율의 리듬을 듣고, 그게 제 안에 머물게 되지요. 어떤 의미에서는 영어라는 언어를 하나의 선물로 받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 글이 어떤 형태를 취하건 그 경험은 소중한 자산이 되었어요. 제가 극장을 떠나 소설이라는 글쓰기를 선택했을 때도 말이지요.
말씀하신 대로, 영화사에서 대본을 읽고 골라내는 일을 했습니다. 할리우드가 아니라 출판사들이 있는 이곳 뉴욕에서 했지요. 영화사에서는 영화로 만들 만한 책을 찾고 있었어요. 맞아요. 제가 대본도 읽었지요. 하지만 주로 교정쇄로 된 소설들을 읽었는데, 그게 저한테는 용기를 북돋아주는 경험이 됐습니다. 출간한 책들 가운데서도 질이 떨어지는 책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목격했으니까요. 단지 어떤 책이 인쇄됐다고 해서 반드시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게 아주 쓸모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멋진 순간들도 있었어요. 제 책상 위에 솔 벨로의 『비의 왕 헨더슨Henderson the Rain King』의 초고 일부가 놓여 있는 걸 발견했던 기억이 있어요. 컬럼비아 영화사에 선택권이 있었는데, 저는 그들에게 그걸 선택하라고 설득했었지요. 물론 그들은 안 했습니다. 하지만 벨로는 저한테 중요한 작가였습니다. 대학 시절에 그의 『오기 마치의 모험Adventures of Augie March』을 읽었는데, 그 작품에는 어떤 계시적인 특성, 서사에서의 자유로움이 있었지요. 그저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것 외에는 소설을 쓰는 데 어떤 규칙도 없었습니다.
몇 달 뒤에 『비의 왕 헨더슨』이 출간됐을 때, 그 책의 첫 3분의 1가량이 실망스러웠습니다. 초고보다 좀 못하더군요. 벨로가 그걸 매끈하게 다듬었던 겁니다. 이야기의 어떤 형식적인 의무에 맞췄던 거죠.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생명력을 축소시켜버리고 말았지요. 그 일이 저한테 좋은 가르침을 줬습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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