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다른 경제를 꿈꾼 나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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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하는 경제는 가능할까
성장, 분배, 일의 보람이라는 꿈
김종배 (이하 ‘김’)
앞으로 10회에 걸쳐서 ‘대안 경제’의 이론과 실제를 살펴보기로 했는데, 단도직입적으로 여쭤보겠습니다. 대안 경제가 뭡니까?
조형근 (이하 ‘조’)
어렵게 생각하면 끝도 없이 어려운 질문이지만, 우선 쉽게 가보죠. ‘대안’이라고 하지 말고 ‘우리가 바라는 꿈’이라고 말해봅시다. 세 가지로 나눠보겠습니다. 첫째, 더 많은 부를 생산하고 싶다는 꿈, 둘째, 일한 만큼 대가를 받고 싶다는 꿈, 셋째, 일에서 성취감이나 보람을 찾고 싶다는 꿈. 대안 경제는 이런 세 가지 꿈에 대한 대답을 찾아나가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김
경제 성장, 분배, 삶의 의미라는 세 가지 틀에서 대안을 찾아가는 시도로 이해하면 되겠군요. 경제 성장의 꿈을 위한 대안 경제 모델에 관해 좀 더 짚어주십시오.
조
경제 성장의 환상을 벗어던지는 데에서 출발하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흔히 성장을 해야 일자리도 생기고 분배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국내총생산GDP과 1인당 GDP로 정의되는 경제 성장은 실제 우리 삶의 개선과는 상당히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삶의 풍요로움에는 해로워도 GDP는 증가하는 경우도 매우 많습니다.
김
하기는 GDP가 증가해도 내 일자리가 없다면 아무 의미도 없겠죠. 분배 상황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요. 1인당 GDP라는 평균의 맹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GDP 총량이 증가한다면 일자리가 늘어나거나 분배가 개선될 가능성은 커지는 것 아닙니까?
조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겁니다. GDP는 환경 파괴도, 분배 불평등도, 근로 시간이나 삶의 질도 고려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직장과 집이 멀어지고 교통 관리 시스템이 부실해져서 교통사고가 증가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죠. 자동차 수리비와 교체 비용이 증가할 것이고, 의료 비용도 증가할 겁니다. GDP는 증가합니다. 반대의 경우에는 GDP가 오히려 감소하게 됩니다. 그래서 리처드 하인버그Richard Heinberg라는 학자는 “GDP라는 잣대로 국가의 전반적 건강을 측정하려는 것은 음표 개수로 음악의 가치를 평가하려는 것과 같다.”라고까지 비판했습니다. 무엇보다 GDP 개념과 측정 방식을 고안한 미국의 경제학자 사이먼 쿠즈네츠Simon Kuznets는 처음부터 GDP를 통해 경제 발전의 수준이나 성장을 측정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GDP는 경제 현실의 극히 일부만 보여주는 제한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여기서 GDP 중심의 성장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 하나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의 1968년 연설입니다.
미국의 국민총생산GNP은 연간 8000억 달러를 넘지만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포함됩니다. 대기 오염, 담배 광고, 고속도로에서 시신을 수습하는 구급차, 현관문에 다는 특수 자물쇠, 이 자물쇠를 부수는 사람을 가두는 감옥, 삼나무 벌목, 도시의 문어발 확장으로 인한 경이로운 자연의 유실, 네이팜탄, 핵탄두, 도시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한 경찰 장갑차, 텍사스 저격수 휘트먼의 소총, 연쇄 살인마 스펙의 나이프,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팔려고 폭력을 조장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이것들은 모두 GNP에 합산됩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것들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건강, 교육의 질, 놀이의 즐거움, 시의 아름다움, 결혼의 힘, 대중 토론이 빚어내는 집단 지성, 공직자의 청렴, 재치와 용기, 지혜와 배움, 공감과 애국심. 이것들은 하나도 GNP에 합산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GNP에는 삶을 살아갈 만하게 만드는 것들을 제외한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김
정치가의 연설로는 매우 감동적인데요. 문제의식에는 깊이 공감합니다만, 경제 성장은 경제 성장대로 GDP로 측정하고 그에 따른 부작용은 부작용대로 고려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경제 성장을 GDP 말고 무엇으로 측정할 수 있습니까?
조
GDP를 대신하는 새로운 지표를 세우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습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와 아마티아 센Amartya Sen, 장폴 피투시Jean-Paul Fitoussi가 함께 지은 『GDP는 틀렸다』라는 책에 그런 다양한 시도와 제안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개인 저자들의 작업이 아니라 프랑스 정부가 설치한 위원회에 의한 공동 작업의 결과입니다. 그 요지는 생산보다는 소득과 소비에 주목하고, 가계의 입장과 분배를 부각하고, 시장에서 측정되지 않는 비시장적 행위들로 측정의 범위를 넓히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경제적 복리가 제대로 측정될 수 있다는 것이죠.
김
경제 성장을 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분배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일한 만큼 받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요? IMF 때도,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도 사람들이 일을 열심히 안 해서 경제위기가 온 건 아니지 않습니까?
조
일부 이상한 사람들은 노동자들이 일은 안 하고 파업만 해서 경제위기가 왔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한국의 근로 시간 통계만 보여줘도 됩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렇게 열심히 일해도 그만큼 대가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성취감이나 보람은 꿈도 꾸기 어렵습니다. 분명히 열심히 일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비정규직이 되고 해고되며, 잠 줄여가면서 열심히 자영업을 하는데 망해갑니다.
김
노동으로 벌어들이는 몫은 갈수록 줄어들고, 자본 가진 사람들이 가져가는 몫은 갈수록 더 커지고. 아무리 사람이 아니라 ‘자’가 ‘본’이 되는 자본주의 사회라지만 너무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조
노동소득 분배율과 자본소득 분배율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국민소득 전체를 임금소득과 영업잉여로 구분하고 상대적인 비율을 보는 건데요,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도 노동소득 분배율이 가장 낮은 편에 속합니다. 그런데 이 통계조차도 왜곡되어 있다, 노동소득 분배율이 실제보다 과대평가되고 있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김
그건 또 왜 그런가요?
조
영업잉여에는 기업의 이윤만이 아니라 농민이나 기타 영세 자영업자의 소득도 포함되거든요. 아시다시피 한국은 자영업자 비율이 매우 높은 편입니다. 서구가 대체로 10퍼센트 정도라면 우리나라는 30퍼센트에 육박합니다. 그런데 망해가는 자영업자의 영업잉여가 자본소득에 포함되니까 소득 분배의 추이에서 자본소득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되고 있는 셈이죠. 자영업자들의 영업잉여를 제외하고 임금소득과 기업소득으로만 비교하면 분배 상황은 더욱 나빠집니다.
김
통계를 제대로 보는 게 쉽지 않은 일이군요. 일한 만큼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데에는 누구나 공감할 텐데, 사람들이 과연 일에서 성취감이나 보람도 추구할까요? “직장이 전쟁터 같아도 밖에 나가면 지옥”이라고, 그저 버티고 또 버티는 게 현실 아닙니까?
조
직장이 전쟁터라는 비유는 경제가 본질적으로 적대적 경쟁의 장이라는 생각을 반영합니다. ‘목숨 걸고 싸우는 전쟁터에서 웬 성취감이니 보람 따위를 찾느냐, 배부른 소리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일하는 시간이 인생의 절반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가족이나 친구와의 교유, 취미생활 등 다른 어떤 활동보다도 일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 긴 시간 동안 불행한 사람이 나머지 시간에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그 긴 시간 동안 겪는 긴장, 좌절, 모욕감 같은 것이 우리의 삶과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요? 물론 노동이 전쟁이고 일터가 전쟁터이길 원하고 그렇게 되도록 강요하는 체제의 힘 아래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바람을 포기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포기한다는 말 자체가 이미 그런 꿈이 있었다는 걸 의미하죠. 본래 없던 걸 포기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김
좋습니다. 그럼 일에서 찾는 성취감, 보람이란 과연 뭘까요?
조
효율성이 엄청나게 높은 로봇을 떠올려보죠. 그 로봇이 생산성 1위를 달성했다고 성취감을 느끼지는 못할 겁니다. 마찬가지로 시키는 대로만 일한 사람이 실적이 높아졌다고 해서 성취감이 들지는 않겠죠. 그래서 성취감은 작업 과정에서의 자율성, 창의성과 관련이 깊습니다. 전문직의 직무 만족도와 성취감이 상대적으로 높은 데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의 직무는 표준화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조직에 속해 있는 경우에도 직접적 노동 과정은 상당 부분 자율적 결정에 맡겨지기 때문이죠.
김
예를 들어 교사의 수업이 그렇겠군요. 교육 과정이 표준화되어 있다고 해도 교수 방법은 교사마다 다르니까요. 교수의 논문 작성도 마찬가지겠지요?
조
맞습니다. 그럼 전문직만 일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일까요? 사실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도 노동자들의 창의성과 자율성을 끌어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기업들이 꽤 있습니다. 구글 같은 IT 기업은 워낙 유명한 사례이고, 도요타나 볼보 같은 전통적인 제조업 기업도 노동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자율성을 높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습니다. 대안 경제 체제에서는 이런 자율성을 더욱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김
그런 자율성에 기반을 두고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봐도 되겠군요. 그런데 성취감과 보람은 어감이 조금 다릅니다. 성취감까지는 그래도 이해가 되지만, 경제 활동의 보람은 정말 이상적인 개념처럼 들립니다. 교수님이 『사회를 구하는 경제학』에서 알려주신 애덤 스미스Adam Smith의 유명한 말이 아마 “빵집 주인이 사람들을 먹여 살리려고 빵을 파는 건 아니다.”였죠? 그저 자기 이기심에서, 자기가 먹고살려고 빵을 만들어 파는 것일 뿐이라고요. 열심히 일하다가 보람을 느끼게 되면 좋은 일이지만,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경제 체제라니 비현실적인 것 같은데요.
조
두 명의 교사가 있습니다. 한 교사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뭔가 보람을 얻으려 애쓰고, 다른 한 교사는 단지 직장인으로서만 충실하려고 합니다. 김종배 선생님은 어느 쪽 교사가 아이들을 가르쳐줬으면 좋겠어요?
김
이 질문 의도가 보이는데요.(웃음) 당연히 보람 찾는 교사가 좋죠. 그럼 그건 교육이라는 영역의 특수성이 있지 않느냐는 반론을 펴게 될 텐데, 다른 직업은 왜 그러면 안 되느냐고 반박하실 거죠?(웃음)
조
그냥 혼자 다 하세요.(웃음) 보람이란 자신의 행동이나 성취가 타인과 공동체의 행복, 복리의 증진에 기여한다고 느낄 때 얻는 감정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이기심과 연민, 공감을 동시에 말했습니다. 타인의 불행에 함께 아파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적 도덕감정이고 그게 없다면 사회는 파멸한다고요. 나는 실적 1위 해서 성취감을 잔뜩 느끼는데 동료들은 감봉되고 해고된다면 과연 행복할까요? 보람이라는 걸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나의 성공이 타인의 기쁨이 될 수 있으면 그게 보람이죠. 보수적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수 우익을 자처하는 김훈 작가가 우익삼락, 즉 ‘우익의 세 가지 즐거움’을 언급한 적이 있어요. 그중 하나가 보수라면 부자라서 세금 많이 내는 게 즐겁다는 거였죠.
김
그럼 부자인데도 세금 안 내는 사람들은 그 즐거움을 거부하는 바보들이겠군요.(웃음)
조
그렇습니다. 기쁨을 거절하는 금욕주의자들이죠.(웃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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