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안경, 조선인의 눈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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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은 언제 조선에 들어왔을까
최초의 기록들
키아라 프루고니의 《코앞에서 본 중세》에 의하면, 안경의 발명자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13세기 말경 유리 생산의 중심지였던 베네치아에서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700년 전이다. 서양에서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던 안경이 조선에 전해진 것은 언제였던가?
안경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이호민(1553~1634)이 1606년에 쓴 〈안경명〉이다. 이 글에서 이호민은 “화인(중국인)이 밝고 깨끗한 양의 뿔을 사용해 두 눈 모양으로 만드는데, 눈이 어두운 사람이 눈에 쓰고 글을 보면 잔글씨가 크게 보이고, 흐릿한 것이 밝게 보인다. 이것을 안경이라 부른다.”라고 밝히고 있다. 희한한 것은 양의 뿔로 안경을 만든다는 말인데 사실인지 의문스럽다. 하기야 오늘날에는 플라스틱으로 렌즈를 만들고 있으니, 아주 투명한 양의 뿔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투명한 양의 뿔이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 뒷날 강세황(1713~1791)은 〈안경〉이란 글에서 이호민이 ‘어심’, 곧 물고기 머리뼈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며 이수광(1563~1628)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안경을 본 적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호민은 물고기 머리뼈가 아니라 양의 뿔로 만들었다고 했다. 강세황이 본 것은 다른 문헌이거나 아니면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다.
〈안경명〉에서 ‘명’이란 원래 어떤 물건의 표면에 새겨 넣기 위한 글이다. 안경에는 글자를 새길 곳이 마땅치 않으니, 〈안경명〉은 혹 안경을 넣어두는 갑에 써넣기 위해 쓴 글이 아닌가 한다. 〈안경명〉에서 이호민은 사람이 늙어감에 따라 귀 먹고 눈이 머는 것은 상제의 뜻이니, 귀가 먹었다 해서 귀를 기울여 듣고 눈이 나빠졌다 해서 물건(안경)을 빌려보려고 하면서 상제의 뜻을 거스를 것까지야 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한 것을 보건대, 이호민은 안경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는 자신이 갖고 있던 안경 렌즈를 양의 뿔로 만든 것으로 잘못 판단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어쨌든 이호민의 〈안경명〉이 1606년에 쓰인 것이니, 적어도 이때 조선에는 안경의 존재가 알려져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호민과 같은 시기를 산 이수광은 1614년에 간행한 《지봉유설》에서 안경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소설에 ‘안경: 노년에 책을 보면 작은 글자가 크게 보인다.’ 하였다. 듣자니 예전에 중국 장수 심유경(?~1597)과 왜국의 중 겐소(?~1612)는 모두 노인이었지만 안경을 써서 잔글씨를 읽을 수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안경은 대개 해방(바닷조개) 종류인데 그 껍데기로 만든다고 한다.” 여기서 하나 궁금한 것은 ‘바닷조개’란 말이다. 그것이 렌즈를 의미하는지 안경테를 의미하는지 알 수 없지만, 안경에서 핵심적인 것이 렌즈임을 생각한다면 렌즈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것이 렌즈라면 투명한 것이어야 하는데, 투명한 바닷조개가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 때문에 강세황은 이수광이 안경을 직접 본 일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이수광이 인용하는 ‘소설’이 어떤 책인지 알 수 없다. ‘소설’은 ‘자질구레한 이야기’란 뜻이고, 지금의 장편소설이라고 할 때의 소설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안경: 노년에 책을 보면 작은 글자가 크게 보인다.’는 말의 유래를 굳이 찾아보면 청나라 진원룡이 편찬한 《격치경원》의 〈안경〉이란 글에 “《패사유편》에 따르면, 젊어서 들으니 귀인에게는 안경이 있다 하였다. 노년에 책을 보면 작은 글자가 크게 보인다.”라는 말이 나온다. ‘成’ 자와 ‘看’ 자가 다를 뿐 사실상 같은 문장이다. 다만 《격치경원》은 《패사유편》을 인용한 것인데, 이수광은 청나라가 등장하기 전에 사망했으니 《격치경원》을 보았을 리 없다. 그가 본 ‘소설’이 《패사유편》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중국의 어떤 책에서 안경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또 심유경과 겐소가 안경을 착용했는지도 직접 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수광이 안경을 쓴 사람으로 들고 있는 심유경과 겐소는 모두 임진왜란 때 중국과 일본의 외교관으로 조선에 파견되었던 사람이다. 즉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경 중국과 일본에는 이미 안경이 전해져 있었지만, 조선에서는 생소한 물건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문헌 자료는 아니지만, 이수광과 이호민의 자료보다 연대가 올라가는 자료도 있다. 김성일(1538~1593)이 착용한 것으로 알려진 안경이 한 점 남아 있는 것이다.
가문의 전승 외에 다른 증거가 없어 과연 김성일이 사용했던 것인지 확언하기 어렵지만, 만약 김성일이 썼던 것이라면 1593년 이전에 중국이나 일본에서 들어온 안경일 가능성이 높다. 김성일은 1577년 1월 사은사 겸 개종계주청사의 서장관으로 정사 윤두수, 질정관 최립과 함께 북경에 갔다가 7월에 돌아왔고, 또 1590년 통신사의 부사로서 일본에 다녀왔기에 북경이나 일본에서 안경을 구입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하지만 김성일의 안경은 당시로서는 극히 희귀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문득 눈이 나쁜 김성일이 처음 안경을 눈에 걸쳤을 때 심정을 떠올려본다. 퇴계 이황 선생의 고제로서 공부를 잘하기로 이름난 수재였으니, 안경 너머 환히 보이는 책에 일순 기쁨에 젖지 않았으랴.
요약하자면 안경은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조선에 알려졌고, 이내 수입되었던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안경과 애체, 그리고 만랄가국
이수광의 《지봉유설》과 이호민의 〈안경명〉은 안경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기는 하지만 안경의 유래를 정확히 밝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뒤에 살펴보겠지만 안경은 스스로를 독서인으로 규정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광명을 찾아주었다. 시력이 나빠 책을 읽고 쓸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 물건은 그야말로 축복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전에 없던 이 물건의 유래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학한 성호 이익(1681~1763)이 그 유래를 밝히기 위해 나섰다. 그는 《성호사설》의 〈애체〉란 글에서 안경의 유래를 밝히고 있다.
애체는 세상에서 말하는 안경이다. 《자서》에는 “서양에서 나온다.” 하였다. 그러나 서양의 이마두(마테오 리치의 중국 이름)는 만력 9년 신사년(1581, 선조 14)에 처음으로 중국에 왔다.
‘애체’는 안경의 별칭이다. 왜 애채가 안경의 별칭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뒤에 언급하겠다. 이익은 《자서》란 책에서는 안경이 서양의 산물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마테오 리치는 1581년(사실은 1582년에 마카오에 도착)에 처음 중국에 왔다고 말한다. 문장이 약간 이상하게 여겨질 것이다. 이익은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도착한 이후 안경이 중국에 전래되었음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에 굳이 ‘그러나’란 표현을 쓴 것으로 보인다. 이익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먼저 장영의 《요저기문》이란 책을 인용한다. 이 책은 뒷날 안경의 유래를 밝힐 때마다 언급되는 것이니, 여기서 직접 인용해둘 필요가 있다. 이하 인용에서 ‘나’는 곧 장영이다.
예전 내가 북경에 있을 때 호농의 집에서 그의 아버지 종백공이 선묘(신종)에게 하사받은 안경을 보았다. 동전 크기만 한 것이 개 있는데, 형태가 운모와 비슷했다. 금으로 테를 두르고, 그것을 늘려 자루와 끈을 만들었다. 그 끝을 합치면 하나가 되고 나누면 둘이 된다. 노인이 눈이 어두워 잔글씨가 보이지 않을 때 이것을 두 눈에 걸치면 글자가 밝게 보인다.
장영이 북경에 있을 때 호농이란 사람의 집에서 호농의 아버지가 선묘, 곧 신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안경을 보았다는 것이다. 장영의 기록을 근거로 이익은 안경이 명나라 신종(1572~1620) 때 중국에 들어와 있었을 것이고, 그것은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도착하면서 전래된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앞서 이수광의 기록에 중국인 심유경이 안경을 썼다 했으니,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이전에 이미 중국에서 안경이 유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 형태는 지금과 달라 안경알을 접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등자갑(천칭저울을 넣어두는 납작한 상자)에 넣어둘 수 있다고 했으니, 테에다 대못을 박아 렌즈가 겹쳐지도록 하는 ‘대못안경’이었을 것이다. 의아한 것은 테에다 자루가 되는 끈을 만들었다는 것인데, 이때까지 안경다리가 없었으니 귀에 걸기 위한 끈이 아니었을까 싶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장영은 《요저기문》이란 책을 지은 바가 없다는 것이다. 위의 인용 자료는 장영의 문집인 《방주집》 26권 잡저에 실려 있다. 잡저는 전·잠·명문·잡언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 중 ‘잡언’은 가벼운 에세이로서 독립된 책으로 돌아다니기도 하였는데, 여기에 안경에 관한 정보가 실려 있는 것이다. 박학하기로 이름난 이익이 왜 《방주잡록》이 아닌 《요저기문》이란 엉뚱한 책을 출처로 제시하게 되었던가? 이익은 명나라 도종의가 편찬한 140책에 이르는 거질의 《설부》란 총서를 가지고 있었던 바, 그중 137책에 장영의 《방주잡록》과 전희언의 《요저기문》이 연달아 실려 있다. 이익은 《방주잡록》이라 말한다는 것을 뒤의 《요저기문》으로 잘못 알고 인용한 것이다. 박학한 이익이지만, 실수가 없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앞서 인용된 장영의 글 뒤에 “서양은 비록 아주 먼 곳이지만, 서쪽 끝 천축의 여러 나라는 중국과 물화를 무역한 지 오래다. 천축은 또 서양과 거리가 멀지 않다. 그 상황으로 보아 안경은 장차 중국에 전해질 것이다.”라는 부분이 이어지는데, 이것은 장영의 《방주잡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또 이익의 시대라면 중국에서도 안경이 이미 유행하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중국으로 전해질 것이란 말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 역시 어디선가 인용한 것을 바탕으로 쓴 것이겠지만, 원래 자료를 찾을 수 없으니 무어라 말하기 어렵다. 다만 앞의 인용에 이어지는 부분은 주목할 만하다. “《거가필비》에 ‘서역 만리국에서 나온다.’고 하였다.”고 하여, 안경이 서역의 만리국 산물이라고 밝혀놓은 것이다. 안경의 산출지인 ‘만리국’은 어디인가?
조선 시대에 박학하기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이덕무(1741~1793) 역시 안경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정조 시대 정국을 쥐고 흔든 김종수의 형 김종후는 이덕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만운(1723~1797)의 《기년아람》의 서문에 나오는 ‘애체’란 어휘에 대해 물어보았고, 이덕무는 자신의 박식을 과시하는 듯 상세한 답을 한다. 이덕무에 의하면 ‘애체’는 자서에 ‘구름이 성한 모양이다’, ‘애희靉霼는 곧 애희僾俙다’라고 나와 있다고 한다.
이덕무는 ‘애체靉靆’와 ‘애희靉霼’를 같은 의미로 보고 있고, ‘애희靉霼’, ‘애희僾俙’와 같은 것으로 본다. 애체靉靆는 원래 구름이 성한 모양이라고 하는 바, 이것은 구름이 잔뜩 낀 모양, 무언가가 잘 보이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애희靉霼와 애희僾俙 역시 희미한, 불명료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을 근거로 이덕무는 ‘구름의 애희僾俙한 것을 빌려서 안경의 이름을 삼은 것’이라고 말한다. 희미한 상태를 나타내는 말을 안경의 이름으로 삼는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굳이 설명을 붙이자면 ‘희미한 사물’을 환히 볼 수 있다는 의미로 애체란 말을 택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덕무의 발언에서 조금 주목할 대목은 명대 이전에 이미 안경이 발명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송나라의 조희곡이 지은 《동천청록》과 원나라 사람의 소설을 인용한다.
《동천청록》―애달은 노인이 잔글씨가 잘 보이지 않을 때 눈에 걸면 환히 보인다.
원나라 사람의 소설―애체는 서역에서 나왔다.
이 두 자료를 근거로 하여 이덕무는 안경이 송.원 때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데 이상한 것은 ‘원나라 사람의 소설’ 운운하는 문장 뒤에 작은 글씨로 쓴 주석이 붙어 있다는 것이다. 출처는 《방여승람》이고 그 내용은 ‘만랄가국에서 애체가 나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원나라 사람의 소설’을 《방여승람》으로 알기 쉬우나 실제 《방여승람》의 저자 축목은 송나라 사람이다. 그리고 《방여승람》에는 안경에 대한 내용이 없다. ‘원나라 사람의 소설’ 역시 어떤 문헌인지 알 수가 없다. 뭔가 복잡하게 보인다. 그것은 이덕무가 《동천청록》과 ‘원나라 사람의 소설’ 《방여승람》, 그리고 기타 애체에 관한 자료를 《강희자전》에서 몽땅 옮겨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자서란 곧 《강희자전》이다. 이덕무는 《동천청록》과 ‘원나라 사람의 소설’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동천청록》은 원래 안경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가? 없다! 이익도 《성호사설》에서 《동천청록》을 인용하고는 있지만, 그 역시 안경에 관한 내용을 인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천청록》이 안경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동천청록》을 인용해서 안경이 송대에 발명되었다고 주장한 사람은 독일 태생의 미국의 동양학자 베르톨트 라우퍼Berthold Laufer(1874~1934)이다. 하지만 왕령과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1900~1995)에 의해 라우퍼 주장의 근거가 된 《동천청록》의 안경 부분에 관한 서술이 명대에 증보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덕무 역시 명대에 증보된 《동천청록》을 보았던 것이다.
이덕무는 위의 두 자료 외에 앞서 이익이 《요저기문》이라고 잘못 인용한 장영의 《방주잡지》를 인용하고 있다. 곧 《방주잡록》이다. 이덕무는 이익이 인용한 것 외에 다음과 같은 자료를 든다. “또 손경장의 처소에서 두 번 보았는데, 손경장은 ‘좋은 말을 주고 서역의 가호 만랄로부터 사들인 것인데, 그 이름은 애체라고 들은 것 같다.’고 하였다.” 이덕무는 이상의 자료를 종합해 안경은 송·원 대에 이미 있었지만 그리 유행하지는 않았고, 명나라 신종 때에 좋은 말을 주고 사왔다고 하며, ‘지금은 누구나 사용’한다고 말하고 있다. 송·원 시기에 안경이 있었다는 이덕무의 주장은 그만의 것이고, 다른 사람의 동의를 얻은 적은 없다.
당시 박학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안경이란 물건의 유래를 밝히려 했던 것 같다. 이유원(1814~1888)은 세상의 오만 가지 사실에 대해 쓴 에세이집 《임하필기》의 〈안경〉에서 안경은 옛날에는 없었고, 명나라에 와서 처음 생겨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유기의 《가일기》란 책에 사항이 재판을 할 때 수정으로 햇빛을 받아 문서의 어두운 부분을 비추어 본 사실이 있는 것을 근거로 송나라 때는 수정으로 사물을 비추어 볼 줄은 알았지만, 안경을 만들 줄은 몰랐다고 판단한다. 이유원이 명나라 때 안경이 처음 생겨난 것이라 주장하는 근거 역시 장영의 《방주잡록》이다. 그는 《방주잡록》을 근거로 삼아 안경은 명나라 때 매우 귀중한 물건으로 황실에서 하사를 받거나 가호에게서 구입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안경을 사오는 곳인 ‘만랄가국’은 도대체 어디며, 가호는 또 무엇인가? 앞서 이익은 서역 ‘만리’에서 안경이 생산된다 하였고, 이덕무는 《방여승람》을 인용해 ‘만랄가국’에서 안경이 나온다고 말한 바 있었다. 이유원 역시 〈안경〉과 안경을 다룬 또 다른 글인 〈학슬안경〉에서 안경은 원래 ‘서역의 만자가국에서 처음 나왔다’고 말한다. 여기서 ‘자’와 ‘랄’이 섞여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원래 ‘刺’와 ‘剌’ 자를 혼동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정확한 표현은 ‘滿剌加國’이고, 한국 한자음으로는 ‘만랄가국’이다. 이유원 역시 〈안경〉에서 안경은 ‘만자가국의 가호에게서 들어온 것’이라고 하고 있는데, 특이한 것은 가호를 ‘배를 타고 중국으로 와서 장사하는 만자가국의 가호’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름의 근거가 있는 말이다.
‘만랄가’는 ‘Malacca(말라카, Melaka)’를 음역한 것이다. 말라카는 지금의 말레이시아, 말레이 반도 남서부 믈라카 해협에 있는 도시다. 이곳은 인도양을 지나 중국 남부로 들어오는 항로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16세기 초반 포르투갈이 식민지로 삼고 동서 무역의 기지로 만들었다. 중국 쪽의 기록이 이곳을 서역이라 표현한 것은 바로 이런 사정을 배후에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호’, 즉 장사하는 오랑캐란 바로 포르투갈 상인을 말한다. 포르투갈 상인이 가지고 온 안경은 자연스럽게 중국 남부의 광동 지방으로, 그리고 북경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그것이 장영의 《방주잡록》에 나오는 안경이 되었을 것이다. 또 앞서 임진왜란 때 일본 승려 겐소가 안경을 썼다고 했는데, 당시 일본은 포르투갈과 교역을 하고 있었으니, 그 안경은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구입한 것일 터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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