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갈잎 배
모쿠타로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소년은 엎드린 채 도리도리라도 하듯이 고개를 치켜들고 비틀린 손가락을 내민다. 자신의 영혼 속으로 떨어져가는 듯한 미소를 띠고.
이 역시 비틀린 한쪽 팔꿈치로 소년은 윗몸을 지탱하면서 그와 같은 눈동자로 미소 짓는 일을 버티어낸다. 고르지 않은 앞니로 웃어 보이겠다고, 한쪽 팔꿈치를 내민 채.
그 손가락으로 치맛자락을 붙잡으려다가 소년은 나뒹군다―아니, 그 찰나에 내 손가락을 움켜쥐고 앉는다. 바깥쪽으로 휘어진 손가락으로.
바깥으로 휜 채 움칠움칠 움직이는 손가락과 손바닥을 모아 쥐었을 때, 한줄기 힘이 피잉 하고, 그의 가늘고 비틀린 몸을 꿰뚫었다. 아주 잠깐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는다. 그의 육체의 중심을 그렇게 끌어안는다. 아마도 지극히 드물게, 그리고 언제나 잠깐 동안만, 소년은 그렇게 안긴다.
이곳 유노코 재활병원에 오고 나서, 병문안 왔던 낯선 여자들에게. 간병인 아주머니들과 간호사들에게.
혹은 잠깐 안기려다가 내동댕이쳐진다.
―어머, 기분 나쁜 애네, 꼴에 사내라고!
소년은 창백해져서 한쪽 뺨을 바닥에 대고, 다다미를 향해 전혀 거칠지 않은 숨을 내쉰다. 눌려 찌부러진 벼룩 같은 온몸으로 몸 안의 질척이는 것들을 뿜어내버리듯이. 목덜미에도, 이마에도 진땀이 배인 채로.
할아버지는 달랐다. 책상다리를 벌려 그를 안고 얼러주었다.
자, 가볼까 모쿠야
궁전이 있는 항구까지
히노시마까지
응,
할아버지섬까지냐
응, 응,
할머니섬까지냐
응, 가볼까, 응,
엔진을 켜고
가볼끄나
노를 저어 가볼끄나
돛을 달고 가볼끄나
응, 모쿠
돛을 달자고? 그래
오늘밤은 십삼야十三夜이니
돛을 달고 갈까
할아버지는 배가 되어 머리를 끄덕여가며 돛대를 올린다. 부옇게 흐려져 몽롱해진 눈으로, 항상 열어젖혀두는 문턱 없는 대청을 향해 모쿠를 태우고 배는 밀려간다. 배는 흔들린다.
할아버지는 불현듯이 눈을 뜨고는, 잊어버리고 있던 소주를 한 모금 마시려다가 쏟는다.
쏟아지는 소주에 사래가 들어 소년은 꿈틀꿈틀, 몸을 젖힌다. 목덜미가 휘어진다.
행복한 아지랑이 같은 것이 할아버지의 책상다리 사이에서 피어오르고, 바로 얼마 전까지 소년은 그 아지랑이 속에 잠겨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책상다리 배 안에서 소년에게, 아니 손자들에게 잠들기 전 언제나 갖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밤엔 아마쿠사에서 조상님들과 함께 지녀온 〈후유지돈 이야기〉이다. 손자들을 나란히 옆에 눕힌 기나긴 가을밤에 그는 자신의 일대기 가운데 가장 들려주고 싶은 한 조각을 말한다. 당신의 ‘어머님’이나 ‘아버님’에게서 전해 들은, 유별날 것도 없는 민화를―. 자신의 마음을 담아 손본 리얼리즘으로, 예를 들면 이렇게 이야기한다.
만날 하는, 그 옛날이야기를 하라는 거구나, 그려그려.
은제나 하는 그 ‘후유지’(게으름뱅이)돈1)의 이야기를 해줄겨.
옛날, 옛날에 말여, 할아부지 집이 있든 마을에 후유지 나리가 계셨단 말여.
으째서 후유지‘돈’이 되었는가 하면은 이 넓은 세상으 내 몸 하나 둘 곳이 없었던 것이여. 힘들고 힘들어서 숨을 쉬는 것도 세상의 눈치를 보아가며, 남들 일도 자기 일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응게 후유지 나리가 되었든 것이여.
울보짬보였든게 비지 뭐. 옳지, 모쿠 니처름 이런 울보짬보였던 거여, 그 후유지돈이.
으째서 그렇게나 눈치만 보는 사람이 되었든고 하면 말여, 너무나 넋이 깊어놓응께 그 깊은 넋 땀시 자신과 자신의 몸을 돌볼 수가 읎었든 것이지. 알겄냐, 모쿠야.
딱 니 같은 양반이었든 것이여.
그래서는 지 몸에 관한 거는 뭐 하나도 지 손으로 할 수가 없응게로, 그 후유지돈이 길바닥에 누워 계시면은 할아부지네 마을사람들이,
―후유지돈, 후유지돈, 차라도 한잔 드릴까유? 하지.
후유지돈은 자기 몸이 지멋대로니께, 가엾게도 끄덕이는 것인지 도리질을 하는 것인지 모를 고갯짓을 하는 것이여. 그러면 마을사람들은,
―저거 봐, 후유지돈이 끄덕이시잖여, 언능 차를 드려. 고구마도 드리구.
하믄설랑 자기들의 극락왕생을 위해 차를 공양하지.
동짓달에 밭고랑에 누워라도 계시면은 마을사람들은 모두들 쩔쩔매며 어쩔 줄 모르고,
―으쩌다가 시상으나, 이런 디서 말없이 쭈구리고 계시니 을매나 몸이 아프시겄능가? 언능언능 짚자리라도 갖다가 두툼허니 깔아드리세. 덮어도 드리구. 고양이 새끼라도 갖다가 안겨드려. 이런 동지섣달에 품이 추워 어찐당가?
―시상으나, 을매나 추울끄나. 이런 양반을 내버려뒀다가는 내 몸을 버리는 것이여. 벌을 받지, 벌을 받어.
―그려, 지옥에 갈 껴, 지옥에.
해가믄서 마을사람들이 절절매는 것이지.
짚자리의 짚이란 것은 말이여, 모쿠야. 쌀이 열리는 나무여.
그랑께 할아부지 집이 있든 아마쿠사 마을서는 옛날에는 쌀에다가 ‘님’ 자를 붙여서 쌀님이라고 불렀었지. 알겠냐, 모쿠?
인간은 쌀님과 물고기들과 풀들이 먹여 살링께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여. 그 쌀님을, 아마쿠사에서는 천하백성들이 을매나 고생 고생해가믄서 만들었든지.
아마쿠사는 바다가 있어서 좋긴 혀두 민물이 없는 섬이거등. 8월달의 땡볕을 넘기고 고추잠재리가 날아오고 벼꽃이 피기 시작허는 백중날 무렵까지는 밤별헌티 절하고 새벽별헌티 절하고 할아부지 할무니들이 을매나 고상을 허는지 말루 다 못 허지. 그렇게 고상을 혀서 만든 쌀을 갖다가 도회지 양반님들헌티 바치는 것이 아마쿠사 농민들이였어.
쌀米이라는 글자를 어떻게 쓰나
여든여덟八十八 날을 물구나무서서 지내지
이런 노래처럼, 여자들 고생이라는 것은 ―모내기 전의 새참 만들기, 물 대기, 거름주기, 볍씨 뿌리기, 볏모 뽑기, 논두렁 만들기, 써레질, 모내기, 모땜하기, 뒷거름 주기, 논두렁 고치기, 풀 뽑기, 벌레 잡기, 새 쫓기, 기우제.
증말이지 말로 못혀, 거꾸루 서서 지 머리카락까정 볏모랑 같이 심어버릴 지경인 겨.
이렇게 생고생을 혀서 겨우 이삭이 패면 이번엔 태풍이지. 태풍이 닥쳤다가 가불기까정 무논에 잠겨서는, 빈 이삭이 안 나오도록 벌레가 나오면 벌레를 잡고 혀서 가까스로 쌀나무에 쌀이 열리는 것이여.
할아부지가 어렸을 때는 쌀 한 톨이라도 우물 옆에 흘리거나 밥 먹다가 바닥에 떨구거나 했다가는 농부의 고생을 몰라본다고 혀서 엄니가 작대기로 바닥을 두드리며 꾸중을 허셨지. 그렇게 해서 열린 벼를 양반들헌티 먼저 갖다 바쳐야 혔응께. 촌장 댁 앞마당에 새 짚으로 짠 멍석을 깔고 흰 나무 쟁반에다가 벼를 담아서는 흰 나무젓가락으로 낟알를 나누어 갖춰놓고서는 상납 쌀가마니를 맹글어두었지. 거기서 남은 싸라기 쌀을 얻어다가는 우리 아랫것덜은 목숨을 이어온 것이여. 지푸라기 하나라도, 타고 난 재 한 줌이라도 소중히 쓰라고 할아부지네 부모님들은 가르치셨지.
사람이 죽을 때 깔아주는 깔짚이라는 것은 농민들이 고생혀서 기른 짚이니, 솜이불보담도 더, 만든 사람의 정성이 들어가 있지. 시원허믄서두 따뜻허니 이 세상과 저세상 사이 임시 잠자리로는 딱 좋은 겨.
아마쿠사는 천령天領 2) 섬이었지. 천령 섬은 양반님들헌티 바치는 쌀을 내놓을 농민들이 있던 섬이여. 보통사람들은 평소엔 지푸라기조차 깔 수가 없도록 되어 있었어.
일단 한번 짚자리서 자보믄 그 산뜻함이라는 것이―모쿠, 니가 이런 기저귀 같은 거 빼버리고 뒹굴뒹굴 풀밭을 뒹굴 때 같은 냄새가 나고, 사타구니 사이를 시원한 바람이 씽씽 부는 거여. 재밌냐, 모쿠? 후후후, 웃어라 웃어. 그렇게 기분이 좋단 말여. 그게 또 얼마나 따뜻하냐면 푸근푸근허는 햇님 냄새가 나서 금세 죽을 것 같던 병자도 짚이 덥혀주는 열을 받으면 벌떡 살아 일어나는 일도 있었지.
할아부지랑 한번 자볼 텨, 모쿠야? 두툼허니 깔아둔 짚자리 위에서? 그건 그렇고, 후유지돈의 이야기였지.
자, 인자 그 후유지돈이 문득 어느 날 마음먹고 여행을 떠나셨지.
시골냥반잉께 널따란 신작로가 무서워서 천천히 한 발짝씩 땅에 발을 붙이고 걸어가셨던 것이여.
8월의 뙤약볕이셨더란다.
후유지돈은 근디 폴써 아까부터 실은 배가 몹시도 고파서 힘들었는데, 염치를 아는 양반인 디다가 좀처럼 엉덩이를 내려놓을 처마 밑도 없는 것이여. 남의 동네이니 후유지돈이 지나시는 것을 아는 이두 없구 말여.
자, 그런디 누구든 좋으니 지나가는 사람이 없을꺼나. 내 등에는 마을 아낙들이 만들어준, 소금에 절인 매실장아찌가 들어가 기막히게 맛있는 커다란 주먹밥이 있는디.
누구라도 등짝의 짚으로 싼 꾸러미에서 주먹밥을 풀어줄 사람이 없을끄나. 그 사람허고 같이 사이좋게 나눠 먹을 것인디.
후유지돈이 배는 고픈데 짚꾸러미에서 주먹밥을 꺼내줄 사람은 오지 않는 것이여.
어쩔 수 없이, 그려두 여전히 신작로가 어디까지고 이어져 있으니 터벅터벅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
후유지돈은 서글퍼져서 웅크리고 앉아 한동안 땅만 보고 있었드란다.
그런디 개미들이 이 더운 8월에 부지런히 짐을 지고 땅 위에서 어디까지나 끝없이 가고 있더라는 것이여.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땅 위의 길이 을매나 길든지 인간이 걸어가는 것과는 견줄 수두 없드라는 것이지.
후유지돈은 개미들에게 말씀하셨어.
증말이지, 북鼓도 찢어져버리고 구멍이 뚫려 있구만 그려도 역시 영차, 영차 어디까지나 줄을 지어 뚜들겨야만 하는 거이냐? 오오, 기특하고 가엾어라―
그러자 뚝뚝, 눈물이 뺨으로 흘러나와서 메마른 입으로 들어갔다. 후유지돈은 생각허셨지. 눈물이라는 것은 시상으나 이 얼매나 맛있는 것인지.
자기 눈물을 빨아 먹고는 다시 걸어가셨드란다.
그러자 저쪽에서, 몸에 지닌 것이라고는 머리에 올려놓은 대나무 삿갓 하나뿐인 인간이 고개를 갸우뚱한 채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것이여.
이런 드디어 오셨구먼.
인간이 그리웠는디. 배를 곯은 듯한 사람이 어쩐지 휘청휘청하면서 가까스로 오고 있구먼. 저 사람이야말로 등 뒤의 주먹밥을 꺼내줄 사람이 틀림없어. 저런 저런, 보아허니 저 사람은 무척이나 배가 고픈 것이 분명허네그려.
저렇게 입을 쩝쩝 다셔가며 신작로를 걸어오고 계시능구먼. 저렇게 배가 고픈 사람이라면 이야기하기도 쉽겄지.
―저기, 여봐요. 이것 참 딱 좋은 곳에서 당신을 만났구먼유. 실은 말여유, 지 등에는 마을 아낙분들이 만들어주신 주먹밥이 짚꾸러미에 들어 있구먼유. 증말루 미안허지만두, 둘이서 같이 먹게로 주먹밥을 등 뒤의 짚꾸러미에서 줌 꺼내주실 수 없을랑가요?
후유지돈이 이렇게 말씀을 허셨던 것이지.
그랬드니 대나무 삿갓을 쓴 사람이 천천히 삿갓과 몸을 흔들어가며 말하기를,
―이런, 증말 반갑구먼유. 나야말루 딱 좋은 곳에서 당신을 만났습니다그려. 나야말로 당신헌티 부탁을 혀야 쓰겄다 허고 있었지유. 실은 이 삿갓이, 여기 보시는 바와 같이 턱끈이 풀어져서 기울어져 있잖어유.
아아, 누구든지 좋은 사람을 만나 묶어달라 혀야겄다, 그 사람을 만날 때꺼정은 어떻게든지 이 삿갓을 바람에 날려 보내서는 안되겄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는, 내가 을매나 고생을 하면서 삿갓을 안 떨어뜨리려고 턱으로 박자를 맞춰가믄서 왔는지. 모처럼 나온 신작로를 게걸음으로 걷니라구 엄청 멀게 왔구먼유. 겨우 여기까지 왔당게요. 당신을 만난 것은 하늘이 도우신 거유. 어려운 부탁이지만도 내 삿갓끈을 좀 묶어주지 않으실랑가요?
두 사람의 후유지돈은 서로 하늘의 도움이 되어 삿갓끈을 묶어주고 소금이 묻어 있는 커다란 주먹밥을 짚꾸러미에서 꺼내서는 함께 먹고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허면서 다시 헤어져 걸어갔드란다.
어떠냐, 모쿠?
주먹밥 후유지돈이나 삿갓 후유지돈이나 너랑 많이 닮은 양반들이었지. 재미있었냐, 모쿠? 할아부지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여.
잠들었냐, 모두들. 곤스케도 자구 요이치도 잠든 겨? 미이도 자나, 미이? 할머니도 잠든 건가? 할머니는 잠을 잘 장께 증말 좋아. 이야기를 들을 때두 거반 자면서 대답하는 할머니를 닮아야지. 안 그러냐, 모쿠? 할머니는 극락의 잠을 자니 팔자가 좋아.
그러자 할머니는 고개도 들지 않고 손자의 목을 받치고 있던 여윈 손목을 빼내더니 슬쩍 한번 흔들었다.
“대충 그만해두고 자지 그려요, 할아범. 호호, 정신이 반쯤은 나가버린 주제에.”
하며 하품을 섞어 빈정거렸다. 할아버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이밀며, 허허, 모쿠야, 할머니는 아직 안 자구 있었네, 자는 척하고 있었던 것이여, 하고 말했다.
모쿠만이 할아버지의 말 상대가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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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돈どん’은 인명·신분을 나타내는 말에 붙어서 아랫사람, 특히 하인 등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다.
2) 천황 혹은 에도江戶시대 쇼군將軍의 직할 영지.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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