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유학자, 동물원에 가다
학을 춤추게 하는 법
동물, 마음의 노예
마음이 기계다
동물도 마음이 있을까? 동물은 먹고 자는 기계 같아서 도저히 그럴 것 같지 않지만, 이 책의 유학자들은 동물이 인간만큼 복잡하고 오묘한 마음을 가진다는 생각으로 동물을 관찰하였다. 그들은 동물과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마음을 지배하는 감정들에 대해 섬세히 관찰하였다. 괴롭기도 하면서 기쁘기도 한 동물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고등한 인간조차 괴로우면서 즐겁기도 한 감정은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덕무李德懋는 동물이 모순된 여러 가지 감정에 따라 스스로도 오락가락 헷갈리는 행동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동물에게 그런 모순된 감정을 인위적으로 촉발시키는 방법도 소개한다.
나는 학에게 춤을 추게 하는 방법을 들었다. 깨끗이 사용한 평평하고 미끄러운 방에 기물을 남기지 않고 구르는 나무토막 한 개를 둔다. 그리고 학을 방 안에 가두고 방이 뜨겁도록 불을 넣는다. 학은 발이 뜨거운 것을 견디지 못하고 둥근 나무에 올라서는데 나무토막은 구르면서 섰다 미끄러졌다 한다. 학은 나무토막 위에서 두 날개를 오므리고 펴기를 수없이 한다. 그때 창 밖에서 피리를 불고 거문고를 뜯어 학이 왔다 갔다 하는 것에 맞추어 소리를 낸다. 즉 서로 마디를 맞추어 연주하는 것같이 한다. 학은 한편으로는 뜨거운 것을 피하려 하고 귀는 시끄러운 소리에 따갑지만 한편으로는 기뻐하기도 하여 괴로움을 잊는다. 오랫동안 그렇게 한 뒤에 학을 놓아 준다. 며칠 뒤 또 피리를 불고 거문고를 타면 학은 기쁜 듯이 날개를 치고 목을 꼿꼿이 세워 마디에 맞추어 춤을 춘다. 기이한 꾀와 묘한 계책이 학을 이렇게까지 만드는가. 이로부터 만물이 모두 그 자연을 제대로 누리지 못할 것이다. 장자가 이르기를, “말과 소는 그대로가 천연이고, 머리를 얽고 코를 뚫는 것은 인위이다. 이것을 통하고자 하는 것은 도리어 막는 것이다.” 하였다. 얽고 뚫는 것도 또한 천연이다. 만일 얽고 뚫지 않으면 말과 소의 성품을 인도할 수가 없다. 저 머리와 코를 보면 이미 천생으로 얽고 뚫을 만한 형세가 있으니, 이것은 천연이다. 그러나 이른바 인위라는 것은 학을 춤추게 하는 따위일 것이다.- 이덕무, 『청장관전서』 제48권, 「이목구심서 1」, 한국고전번역원, 이식 옮김(교정: 인용자)
재롱 피우는 동물을 관람시키고 동물 주인이 이득을 챙기는 일은 조선 사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풍습이었다. 동물 입장에서는 곤혹스럽지만, 이렇게 재롱 피우는 재주를 억지로 만드는 방법은 조선 유학자들의 기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동물의 지능에 특히 관심이 많았던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학이 느꼈을 두 가지 감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나는 고통을 피하려는 원초적인 감정이고, 다른 하나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거문고와 피리 소리를 감상하려는 감정이다. 이 두 가지 감정은 ‘기이한 꾀와 묘한 계책’에 의해 만들어지게 된다. 꾀와 계책이 학의 춤을 이끌어내는 과정을 설명한 것은 확실한 근거를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특정 사건이 촉발한 감정이 학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다는 이덕무의 설명은 우연한 사건(학의 입장에서는 뜨거운 방과 나뭇가지, 음악 소리가 모두 우연한 사건일 것이다)에 의해 주조되는 동물의 마음을 살피려는 그의 시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 책의 유학자들은 동물의 마음이나 인간의 마음이나 사건이 촉발하는 감정에 의해 주조되는 인과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동물 같다’는 말에는 ‘하등하다’는 뜻과 ‘자연스럽다’라는 뜻이 동시에 배어 있다. 동물은 먹고 자는 일의 즐거움에만 열중하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생활을 한다고 생각되지만, 그런 일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서 왠지 하등하고 미천해 보인다는 뜻이다. 반면 인간은 자연스러운 본능에 지배당하기도 하지만, 배우고 창조하며 새로운 습성을 만들기도 한다. 이는 인간과 동물을 구별해 주는 중요한 차이점으로 자주 부각된다. 인간은 자연이 부여한 본성을 넘어 문화와 개인적 개성이라는 습성을 의지대로 취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본성과 습성의 관계는 기계성과 창조성의 관계, 또는 본능과 사회성의 관계로 대조된다.
동물에 천착했던 조선 후기 유학자들의 글에서는, 본성과 습성의 관계가 그저 두 가지 다른 종류의 기계성으로 나타난다. 이들에게 있어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자연이 빚어놓은 ‘본성’과 아주 사적인 자아의 역사가 빚어놓은 ‘습성’에 휘둘리는 기계이다. 따라서 이들은 본성이니 습성이니 하는 구별보다는, 새로운 습성을 만들어 그 습성이 천성이 되는 기술을 중요시 여겼다. 이덕무가 인용한 『용촌집舂村集』의 한 구절은 바로 이렇게 사람이 습성을 새롭게 만드는 방법을 말하고 있다.
우연히 『용촌집』을 읽다가 실로 내 마음에 맞는 한 대목이 있기에 적어 둔다. 용촌이 이르기를,“사람이 억지로 하는 것도 괜찮다. 나의 여섯째 숙부가 어렸을 때 남의 집에 불상사가 생겼다는 말을 들으면 곧 희색을 나타내기에 내가 주의시키기를 ‘숙부는 무엇 때문에 남의 재앙을 좋아하고 남의 재화를 즐거워하시오?’ 하였더니, 숙부가 고개를 끄덕인 그 후부터는, 억지로 탄식도 하고 혹은 괴로움과 슬픔을 참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는 참마음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그 뒤로는 습관이 되어 본성같이 되어 버렸다. 그분은 지금 복록과 장수가 온 종족 중에 첫째간다. 만약에 그때의 생각이 변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복을 누릴 상이 아니었다.”하였다.- 이덕무, 『청장관전서』 제55권, 「앙엽기 2」, 억지로 함, 한국고전번역원, 차주환 옮김
남의 불행에 즐거워하는 것은 자연이 주조한 인간의 본능 중 하나다. 하지만 이는 유학자들에게 새로운 습관에 의해 전복될 수 있는 기계성일 뿐이다. 새로운 습관은 누군가의 명령으로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 기계적인 본성이나 습성에서 고통받거나 남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면, 그 기계성을 허무는 습성의 탄생은 오직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에서 시작된다. 동물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그 동물의 마음을 옭아매고 있는 생각이 애초에 어떤 과정을 통해 생성되었는가를 알아봐야 한다. 이 책의 유학자들이 동물을 관찰하며 염두에 둔 점이 바로 이것이다.
기계의 숙명을 벗어나는 기술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동물을 관찰한 또 다른 조선 실학자 이익李瀷도 우연한 사건들이 인간과 동물의 마음을 사로잡고, 마음이 그 사건의 영향력 속에서 관성적으로 움직이는 기계가 되어버림을 다음과 같이 적는다.
내가 매양 경험으로 말하건대, 어리석은 백성이 착한 일과 악한 일을 행할 때에 그 마음이 처음부터 그러한 것이 아니요, 우연히 한 가지 일의 득실로써 충격을 받고 거기에 빠지게 되어 잠깐 사이에 천리의 간격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착한 길로 인도하여 악한 마음이 그치게 되면 처음 솟는 샘물 같고, 처음 타오르는 불과 같아 마침내 천성과 같아지는 데 이를 것이다.- 이익, 『성호사설』 제15권, 「인사문」, 정형, 한국고전번역원, 정지상 옮김(교정: 인용자)
우연히 일어난 한 가지 일의 득실에 충격을 받고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마음이 바로 사적인 자아의 역사가 빚어놓은 기계성이다. 즉 좋은 습성이나 나쁜 습성이나 천성처럼 굳어지게 되는 과정은 모두 우연한 사건들 때문이며 스스로 조절 가능한 것이 아니다. 유학자들은 임금, 백성, 동물 등 만물을 모두 도덕적인 존재로 탈바꿈시키는 사람들이다. 맹자孟子부터 조선 후기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도덕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어떻게 하면 인간의 마음에 심을 수 있을까 궁리해 왔다. 그러니 이들에게 ‘인간적인’ 인간성은 기계의 숙명을 벗어나게 하는 기술일 뿐이지, 자연에 내재된 것 아니면 문화의 창조물이라는 이분법에 함몰된 것이 아니었다.
기술은 특정한 육체에 귀속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지식으로도 존재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소개할 이야기들은 바로 인간과 동물의 마음을 기계로 취급하고, 지식과 기술로서의 인간성을 기계에 이식하려는 유학자들의 시도 사례들이다. 이러한 시도는 다소 사악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구나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며, 개인적인 생각을 남들의 머릿속에도 집어넣기 위해 온갖 협박과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바이러스의 숙주일 뿐임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들은 다른 인간들 역시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을 숙주로만 볼 뿐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 있어 ‘도덕’이란 자기 자신과 타자를 그러한 숙주로만큼은 삼지 않게 하는 기술일 따름이다. 기술은 남이 나를 해하기 위해 나에게 사용할 수도 있지만, 도리어 그 기술이 지식으로 통용된다면 누군가는 그러한 사람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도 있다.
슬프다, 벼와 기장 밭에 소와 말을 놓아두고, 꿩과 토끼가 있는 곳에 매와 사냥개를 풀어 놓고서 그 짐승들이 뜯어먹고 물어뜯는 것을 막고자 하면 되겠는가?”- 안정복, 『동사강목』 제9하, 병오년 명종 16년, 한국고전번역원, 차문섭 옮김
뜨거운 방과 음악 소리로 학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 그리고 꿩과 토끼가 있는 곳에 매와 사냥개를 풀어놓지 않는 것이 바로 유학자들이 도덕적인 동물을 만드는 데 썼던 기술들이다. 그러나 특정 기술이 모든 동물에게 같은 효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동물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바로 호오好惡를 가진다. 살아 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좋아하는 것을 할 때 마음이 편하고 싫어하는 것을 하면 가시방석이니, 기술을 제대로 적용하려면 우선 동물의 호오를 읽어야 한다. 우리는 한 인간을 마주할 때, 종종 그 인간의 호오보다는 성품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한다. 심지어 자기 자신을 마주할 때도 그렇다. 저 사람은 나쁘다, 착하다와 같은 가치 판단을 자동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물들의 나쁘고 착한 행동도 결국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의 가치가 모두 달라서 생긴 결과이다. 정약용丁若鏞은 하늘이 부여한 성품이라는 추상적 담론에서 벗어나 식물, 동물, 사람의 성품이 단지 ‘기호嗜好’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의를 즐기는 것은 마음의 성품이고 잘 차려진 음식상을 즐기는 것은 입의 성품이니 그렇다면 성품이란 기호의 명칭이 아니겠습니까. (……) 위징의 성품은 검소를 좋아했고, 두보의 성품은 아름다운 글귀를 탐하였는데, 이상에 말한 성품이란 것이 하나라도 기호를 성품이라 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2천 년 이래로 항상 흔히 쓰는 말로, 입만 열면 문득 기호를 성품이라 하는데, 유독 경학가가 성품을 논하는 데만은 반드시 기호라는 글자를 버리고, 본연과 기질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 ‘이발’이니 ‘미발’이니 (……) 심心)니 성性이니 하여 학자들을 황홀하게만 만들고 부질없이 노고만 시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현의 『시경』 해설을 보면 ‘물고기의 성품은 추우면 깊은 물로 도망가는 것이다.’ 하였고, ‘두루미의 성품은 탐악하다.’ 하였으며, 또 ‘능에의 성품은 나무에 앉지 않는 것이다.’ 하였고, 또 ‘사슴의 성품은 산림을 좋아하는 것이다.’ 하였으며, ‘꿩의 성품은 번뇌를 싫어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같은 유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어디에 기호와 염오를 본성으로 여기지 않은 곳이 있습니까. (…… ) 사람의 성품이 선을 편히 여기는 것이 마치 배추가 오줌을 편히 여기고 마늘이 닭똥을 편히 여기고 벼가 물을 편히 여기고 기장이 건조한 땅을 편히 여기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편히 여긴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즐기는 것이니, 이것이 필경의 공효입니다. 이로써 볼 때 성性이란 글자가 본래 기호라는 뜻으로 쓰인 것임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무릇 물건에 한 가지씩의 성품을 갖추어 주어 기호를 가지고 그 생명을 이루게 하는 것이 바로 천명天命입니다.- 정약용, 『다산시문집』 제19권, 「편지」, 이여홍에게 답함, 정태현 옮김
착하고 나쁘다는 가치판단은 단조롭지만 호오의 세계는 이렇게 다채롭다. 그러나 호오의 내용은 달라도 이 동물들의 목표는 하나다.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싫어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 세계에서 만물의 공통된 호오는 살기를 좋아하고 위험을 싫어하는 것일 테다. 그러나 위험을 피하는 만물의 기술은 모두 차이가 난다. 동물을 사냥할 때도 잘 걸려드는 놈이 있는가 하면 재빨리 도망가는 놈이 있듯 말이다. 그런데 그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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