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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은 결코 배신하는 법이 없습니다
김도영
봉제 장인,경력 43년
내 숨결과 미싱이 한 호흡으로 흘러갈 때, 더없는 평온이 찾아온다
1959년 부산 출생, 세 살 무렵 서울로 이사
1973년 14세에 동화시장(현 평화시장 옆) 봉제공장에서 시다 생활 시작
1978년 6년 만에 재봉사가 되어 미싱을 타다
1999년 나이 마흔, 검정고시를 보다
2011년 한국패션봉제아카데미에서 강사 활동 시작
같은 해에 개인 작업실을 열다
현 재 강사로서 기술을 가르치는 일에 보람을 느끼며 개인 작업실에서 꾸준히 한길을 걷고 있다
지상의 작업실 한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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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 밖쯤 당도했을 봄 때문에 더욱 춥게 느껴지는 2월 어느 날, 신설동역에 내려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작은 가게들이 어깨를 겯듯 서로의 처마를 의지한 채 올망졸망 이어져 있고, 가게 주인들이나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한편 무심한 듯하면서도 주변에 대한 경계심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도 건물도 골목을 지키는 담벼락처럼 자연스럽게 환경의 일부로 녹아든 곳.
1980년대 어느 무렵에서 시간이 멈춘 듯한 이 골목은 창신동과 더불어 우리 현대사의 빛과 그림자를 한 몸에 품고 있는 공간이다. 우리나라 의류·봉제산업의 젖줄로, 평화시장을 비롯해 동대문 일대 패션산업을 지탱하는 힘이 여기에서 나온다.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 어디선가 쉼 없이 미싱 소리가 들리고, 날마다 만들어지는 수많은 옷들이 매일같이 나라 안팎으로 실려 나간다.
올해로 43년째 이 골목을 지켜온 김도영 장인의 작업실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40여 년 동안 하루도 미싱 앞을 떠나지 않은 이의 삶이란, 또 그 세월 동안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의 변화는 어떤 모습일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채로.
그의 작업실은 어느 아담한 건물 2층이었다. 내부는 재단대와 재봉틀, 옷감을 넣어놓은 선반으로 꽉 차 있었다. 그는 작업실이 누추하다며, 인터뷰는 분위기 좋은 커피숍 같은 데서 해야 하는데 불편해서 어떡하냐고 연신 미안해했다. 하지만 건물 앞에서 그를 만나 계단을 ‘오르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충분히 황송해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봉제공장들이 그렇듯 으레 지하겠거니 했는데 ‘지상의 작업실’이라니! 더욱이 조명도 밝고, 다녀본 곳들 중에서는 최상급에 속하는 작업장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좀 추웠다. 난방이 안 되는 건물이라 작년에는 그냥 지내다가 올해부터는 조그만 석유난로를 피우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작업을 하기에 충분히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김도영 씨는 차를 한잔 내주고는 일을 해야 한다며 바로 재단대 앞에 섰다. 나는 재단대 가까이, 그러나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옆쪽에 가만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쓱쓱 삭삭 옷본에 맞춰 천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한 치의 거침도 없는 손놀림, 길이 잘 든 가위 소리.
나는 기술자, 영원한 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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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일감이 많은 편인가요?
“아뇨. 요즘이 1년 중 제일 한가한 때예요. 12월부터 2월까지요. 그래도 드문드문 맞춤옷 의뢰가 들어와서 노는 날은 별로 없어요. 이건 여성용 패딩 코트인데, 천연 염색한 옷감에 솜을 넣어서 만드는 거예요.”
지금 50대 중반이시지요? 재봉 경력이 40여 년이라면, 언제부터 이 일을 시작하신 건가요?
“초등학교 마치자마자 바로 이쪽으로 들어왔지요. 그때만 해도 동네 엄마들이 모여서 ‘누구네 집 딸은 어디 취직했는데 월급 많이 타 왔다더라’는 얘기를 많이 했어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도 어서 학교 마치고 돈 벌러 가야지’ 하고 생각했어요. 딸내미들은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취직하는 게 당연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처음 취직한 곳은 어디였나요?
“동화시장이라고, 평화시장 옆에 있는 시장에서 봉제일을 시작했어요. 남들처럼 시다(보조) 생활부터 시작했지요. 미싱사 옆에서 박음질하기 직전 과정을 도맡아 하다가 어느 정도 인정받으면 소위 미싱을 타게 돼요. 재봉틀에 앉아서 본격적으로 바느질 작업을 맡는 걸 ‘미싱 탄다’고 하거든요.”
예전에는 미싱을 타기까지가 쉽지 않았잖아요.
“선배 미싱사들이 잘 안 가르쳐주려고 하니까요. 우리같이 처음 일 배우는 처지에서는 점심시간에라도 잠깐 앉아보려고 눈치도 보고, 비위도 맞추고 별짓 다 하는데 허락을 안 했지요. 저도 시다로 5~6년 고생했어요. 막상 일 배우는 것보다 마음고생을 더 많이 한 것 같아요.”
요즘도 그런가요?
“아이고, 요즘은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지, 배우겠다고만 하면야 얼마든지 가르쳐주지요. 그때는 밥만 먹여주면 무슨 일이든 하던 시절이니까……. 그 대신 그렇게 배운 기술이 몸에 익어서 인제 웬만한 일은 무섭지가 않아요. 요즘처럼 미싱만 바로 배운 사람들은 하던 거 아니면 다른 일은 못 하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뭘 줘도 다 해요. 속도나 품질 면에서 머뭇거리는 게 없지요.”
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솔직히 그전에는 어디 가서 봉제일 한다는 말을 쉽게 못 꺼냈어요. 창피했으니까요. 다들 저 아래로 보는 게 있었으니까……. 저도 공순이라는 말 듣는 게 상처였어요. 사람들은 제품하고 인쇄 쪽 일을 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그랬지요. 사실 대우도 못 받았고요. 하지만 이젠 친구들도 다 부러워해요. 이 나이에 내 일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이 일은 내가 건강하기만 하면 언제까지든 현역으로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지금은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게 여간 고맙고 뿌듯한 게 아니에요.”
지금은 그렇지만 돌아보면 한스럽달까, 후회되는 것도 있지 않나요?
“딱 하나, 공부 제때 못 한 게 두고두고 가슴에 맺혔지요. 어릴 땐 ‘몇 년만 열심히 벌어서 학교 가야지, 가야지’ 했는데 끝이 안 나더라고요. 그때도 귀 열린 이들은 야학도 찾아다니고 그랬다는데, 전 그런 기회도 못 얻었어요. 공장에서 누가 그런 눈치라도 보이면 사장이 나가라고 하니까, 분위기 버린다고요. 결국 진학을 못 하고 일만 열심히 했지요. 그런데 살다 보니 이건 도저히 아니다 싶었어요.”
그때가 언젠가요?
“마흔이요!(웃음) 그때 검정고시를 봤어요. 더 미루면 한이 될 것 같아서, 가슴에 맺혀서 눈을 못 감을 것 같더라고요.”
김도영 씨는 지금도 공부해야지 하는 생각밖에 없다. 미싱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아서 공부할 시간 내기가 쉽진 않지만, 꼭 해내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공부해서 좋은 글을 써보는 게 소망이란다.
단가 경쟁이 판치면 기술자도 설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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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긴 세월 봉제 쪽에서 단련된, 자타 공인 고급 숙련 재봉사다. 그런데 업계에서는 김도영 씨처럼 좋은 기술을 가진 재봉사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며 어려움을 호소한다. 분명히 수요가 있는데 공급이 안 되는 이유가 궁금했다.
“사실 돈만 생각하고 품질보다는 수량 위주로 일하는 이들이 많다는 점, 인정해요. 하지만 모순이 있어요. 품질은 좋게 해달라면서 단가는 싸게 하자고 하니 그게 문제라는 거지요. 저한테 오는 디자이너들만 해도 그래요. 많이들 오는데, 실컷 얘기해놓고 결국은 싸게 해주는 곳을 찾아가더라고요. 우리가 옷을 정성껏 만들어준다는 것은 그만큼 시간을 더 투자한다는 것 아닌가요? 좋은 품질의 옷을 만들고 싶으면 공임工賃(품삯)에 투자해야 하는데, 그렇게는 안 하려고 해요. 들이는 정성만 놓고 보면 판매가의 절반을 우리에게 줘야 맞지 않나요? 그런데 예전부터 왜 생산 라인에서만 가격을 낮추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지금 만드시는 옷은 공임이 얼마나 되나요?
“10만 원 정도예요. 이 옷은 겉감, 솜, 우라(안감)까지 재단을 세 번 하는데 그 정도면 결코 비싼 게 아니거든요. 하지만 객공客工(임시로 고용한 직공)으로 일하는 분들은 단가를 훨씬 더 싸게 받아요. 그날 일한 수량에 따라 돈을 받는 객공은 정말 기계처럼 일해야 해요. 어떻게 그렇게 싸게 받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예를 들어 재킷 하나에 봉제 공임을 8,000원에서 1만 원 정도 받아요. 남자 코트 하나에 2만 원 정도일걸요? 참 어이없는 일이 많지요. 하지만 일이 없을 때는 이렇게 단가가 낮아도 서로 하겠다고 나서니까 문제지요. 우리가 단합해서 이 가격에는 안 하겠다고 해야 하는데, 지금으로선 그런 형편이 안 됩니다. 이쪽에서 안 하겠다고 해도 저쪽에서 누군가가 그럼 그 가격에라도 맡겠다고 하는 식이니, 공임이 낮아질 수밖에요.”
제대로 된 기술자는 드물어도 어쨌든 봉제하시는 분들은 많다는 얘기군요.
“맞아요. 우리 봉제업이 참 대단한 산업인 건 분명해요. 창신동, 신당동, 미아리 주변 인구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을 하면서 아이 키우고 먹고사는 걸 보면 엄청난 규모의 산업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요즘 제조업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비중이 높은데, 봉제 쪽은 어떤가요?
“여기도 마찬가지예요. 옷 만드는 일은 늘 손이 필요한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점점 그런 일을 안 하려고 하니까요. 저도 100장 단위로 대량 주문이 들어오면 다른 사람 손을 빌려요. 주로 베트남 분들을 쓰는데, 이 분들이 참 잘해요. 감각도 있고, 다른 외국인들보다 손재주가 제일 나은 것 같아요. 그래서 도움을 많이 받아요. 그분들은 평일에 다른 직장 다니고 주말에 아르바이트 삼아 와요. 참 성실하게 일하는 분들이지요. 이번 설에 다들 돌아간다는데 앞으로 어떻게 하나 싶어요.”
봉제산업에 새로 유입되는 인력 중에 우리나라 사람은 별로 없겠군요.
“요즘은 한국 사람들 안 쓰려고 한다는 말도 있어요. 임금도 높고 이것저것 따지는 게 많다고. 게다가 요즘 대량으로 옷 만들어 파는 H&M 같은 데 가보면, 디자인도 예쁘고 가격도 싸고 그렇잖아요. 외국에서 만들어 온다고 하는데, 우리로서는 그 가격에 어떻게 만들어 오는지 모르겠어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에요. 이런 옷들하고 경쟁해야 하는데, 우리 봉제산업이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 건지 참 안타깝지요.”
김도영 씨가 패딩 처리된 천 조각을 들고 미싱 앞에 옮겨 앉는다. 재단이 끝났으니 이제 재봉을 할 차례인 것이다. 오려놓은 옷감을 이리저리 맞추더니 바로 박음질에 들어간다. 다르르, 다르르…… 미싱 돌아가는 소리가 부드럽게 깔린다.
희망을 보려면 절망을 건너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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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때는 이 미싱 돌아가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빠져들 때가 있어요. 고통스럽고 힘들고 피곤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이 소리가 편하게 느껴지거든요. 도통한 건가요(웃음) 정말이지 지금은 미싱 할 때 마음이 제일 편해요. 전에 잠깐 보험회사도 다녀봤는데, 그때는 그쪽 사람들이 왜 그렇게 잘나 보이던지……. 나도 저런 일을 해봐야겠다 싶어서 찾아갔지요. 하지만 저와는 잘 안 맞는 일인 것 같아서 그만뒀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이 안 편했어요. 미싱 할 때야 고작 머리 쓴다는 게 하루에 몇 장을 더 만들어낼 수 있나 그런 건데, 그쪽은 전혀 다른 세상 같아 보였어요.”
학생들도 가르치시는데, 그거야말로 잘나 보이는 일 아닌가요(웃음)
“제가 좀 별난 버릇이 있어요. 해마다 일거리가 뜸해지는 겨울이 되면 뭔가 좀 더 나은 일이 없을까 하고 찾아 나서곤 하지요. 평생 봉제일을 해오면서 ‘내가 하는 일은 왜 이리 대우를 못 받나’ 하는 생각에 늘 가슴이 답답했거든요. 그러다 6년 전 이맘때, 우연히 한국패션봉제아카데미를 소개한 기사를 보고, 곧바로 당시 장충동에 있던 ‘참여성복지터’ 공방을 찾아갔지요. 그리고 당시 복지터 대표였던 전순옥 의원님을 붙잡고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잖아요. ‘저도 같이 일하고 싶습니다. 제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말씀 좀 해주세요!’”
저도 그날을 생생히 기억합니다.(웃음)
“얘기를 나눠보니 의원님 마인드가 늘 제가 생각하고 꿈꾸던 것이었어요. 내가 해온 일로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겠다 싶더군요.”
그래서 제가 봉제아카데미에서 학생들에게 봉제 기술을 가르쳐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었지요?
“맞아요. 그전에 먼저 강사 프로그램을 이수하라고 권유하셨지요. 봉제 기술과 가르치는 기술은 또 다르니까. 그래서 6개월간 교수 방법이나 이론 등 교육 프로그램을 마치고 강사를 시작해서 5년째 아카데미에서 교육생을 가르치고 있어요. 개강하면 일주일에 2~3일 수업이 있는데, 방학인 요즘은 이주 여성들을 위한 센터 ‘디딤터’에서도 재봉 교육을 하고 있지요.”
직접 학생들을 가르쳐보니 어떻던가요?
“보람을 많이 느끼지요. 다들 고등교육까지 받은 분들이 봉제 기술을배우러 오는 것을 보면서, 이 기술이 이렇게 좋은 것이었구나 싶어 고마운 마음이 들어요.”
학생들의 연령대나 수료 후 취업 현황은 어떻습니까?
“주로 30~40대지요. 봉제 기술은 배우는 데 나이 제한이 없고, 또 기술을 배우고 나면 취직하기도 까다롭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취직을 해도 버텨내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 봐요. 기술만 익히면 수입이 어느 정도 되는데도, 실제로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여전히 한국인은 별로 없고 외국인이 많아요. 취업을 목적으로 배워놓고도 대우 면에서 못 견디겠다고 그만두니까요. 교육할 때 늘 그 정도는 견뎌내야 한다고 얘기하는데, 요즘은 참고 견딘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기술을 배워도 활용을 못 하니 안타까우시겠네요.
“속상한 거야 말도 못 하지요. 다들 기술은 그저 ‘배우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그 기술이 정말 자기 것이 되려면 현장에서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해요. 하지만 그 과정을 못 견디니 애써 배운 것도 말짱 도루묵이 될 수밖에요.”
좀 더 현실적인 감각이 필요하다는 말씀이군요.
“우리는 시장과 연결돼 있으니 거래처에서 원하는 수량을 맞춰줘야 해요. 바쁘면 밤 12시 넘어서까지도 일해야 하거든요. 솔직히 장사라는 게 팔리는 시기가 있잖아요. 그때를 맞춰줘야 하는 게 우리 일이고요. 그런 데서 생각의 차이가 생기는 거지요. 기술 배우면서 내 권리 찾겠다고 6시 칼퇴근을 꿈꾸고 오는데, 사실 생산 라인이 그렇게 해서는 돌아가질 않거든요. 간혹 처음부터 너무 큰 기대를 갖고 오는 분들도 있어요. 옷먼지와 실밥 날리는 현장에서 ‘저 사람은 꿈꾸고 있나’ 싶을 정도로…….”
그래도 작업 환경을 개선할 필요는 있지 않을까요?
“물론이지요. 우선 작업장이 개선되면 새로운 세대들이 유입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길 것 같아요. 인격적인 대우도 문젠데, 예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 적응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고요.”
저는 잠깐 있다 가는 사람인데도 작업실이 2층이라고 해서 솔직히 반가웠습니다. 봉제 작업장은 대부분 지하에 있으니까요.
“우리 봉제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하고 섞어놔도 금방 표가 나지요. 뭐랄까, 사람들이 햇빛을 못 보고 장시간 오래 앉아 지내니까 시든 화초처럼 생기가 없어요. 전에 지하에서 2년 일했는데, 건강이 안 좋아져서 이제는 절대로 지하에 작업실을 내고 싶지 않아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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