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인간 진화의 예기치 않은 행운
_ 끝없는 뇌가소성
80살 노인도 뇌만은 젊은이와 같다
“75살 할아버지가 이탈리아어를 배울 수 있다고요? 말도 안 돼요.” “50살에 새로운 직업을 찾는다고요? 이미 기차는 오래전에 떠나버렸는데요.” 뇌는 시간이 흐를수록 가소성과 변화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노년기에는 제대로 학습할 수 없다는 통념이 만연하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류다. 젊은이의 신경구조가 노년층보다 훨씬 빠르고 역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노인의 뇌가 느리게 반응한다거나 기능을 멈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최근 함부르크─에펜도르프 대학병원의 신경과학자들은 50세에서 67세 사이의 남녀 44명을 곡예훈련에 초청했다. 연습 프로그램을 소화한 3개월 동안 연습 전후를 비롯해 휴식시간이 끝난 뒤에도 MRI를 통해 뇌를 조사해보았다. 대조집단으로는 피실험자들과 연령대가 비슷하지만 훈련을 받지 않은 25명을 선정했다. 곡예 훈련 피실험자들과 대조집단은 같은 날에 MRI 스캔을 받았다. 곡예 훈련자들의 ‘시각 관련 피질’에서는 훈련 전과 달리 아주 독특한 회색 물질의 확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각 관련 피질은 공간에서의 움직임을 인지하는 데 특화된 영역이다. 반면 대조집단은 같은 뇌 영역에서 어떠한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연구자들은 곡예사들에게서만 해마와 중격측좌핵이 확대된 사실을 발견했다. 중격측좌핵은 뇌에만 있는 고유한 보상 체계다.
이 실험과 기타 다른 실험을 통해 뇌는 고령에 이를 때까지도 가소성을 계속 유지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원칙적으로 학습에는 나이 제한이 없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인지 활동에 대해서는 유난히 학습이 잘되는 특정 단계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언어 습득 능력은 생후 1년 6개월에서 3살 사이가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이와 비슷하게 달팽이관 이식 같은 치료 역시 이 연령대에 제한되어 있다. 이는 청각기관인 달팽이관에 이식한 마이크로컴퓨터를 비롯해 마이크로폰을 통해 흡수되는 소리 신호가 전기 충격파로 변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렇게 변환된 전기 충격파는 가는 선을 통해 청聽신경으로 전달된다. 이 같은 기술을 통해 귀가 안 들렸던 사람은 처음부터 다시 듣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귀가 먹고 어른이 되어서야 장치를 이식한 경우에는 갑작스럽게 얻은 언어 신호를 통해 뇌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이런 경우에는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다른 수단을 발달시키겠지만, 적절하게 말하는 법까지 배우지는 못한다. 이 때문에 청력에 이상이 있는 것 같으면 가능한 한 이른 시기에 반드시 진단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래야 청신경과 언어중추가 최적화로 형성될 수 있다.
아울러 제약받거나, 부적절하거나, 병적인 감정 및 행동 패턴은 인생의 특정 단계에서 발달된다. 예를 들어 우울증은 사춘기가 분기점이 되는 중대한 시기다. 사춘기 단계에서의 우울증은 이별 및 상실을 체험한 결과로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와 반대로 거미나 어두운 동굴 같은 대상을 마주할 때 느끼는 불안 증세는 특히 3~8세 사이에 발달한다. 이러한 증세는 주변 사람들이 아이를 주목할 때 한층 뚜렷하게 나타난다. 주목받는 행동은 보상에서 나오는 방식이며, 보상은 강한 학습 충동을 이끌고 정보 처리에 관여하는 신경 결합을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크기가 전부는 아니다
택시 운전사의 확대된 해마와 곡예싸 훈련생과 쥐에게 나타나는 회색 세포의 증대는 자극을 많이 받게 되는 환경 조건에서 살아갈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때문에 학습을 통해 주로 특정 뇌 영역이 확대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마치 자루에 채워 넣는 내용물이 많을수록 자루의 크기가 더 늘어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 같은 패턴은 뇌의 가소성 자체에는 전혀 알맞지 않다. 특정 뇌 영역의 확대는 오직 학습을 할 때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미 전문가의 경지에 오르면 이 특정 뇌 영역은 다른 영역을 발달시키기 위해 자리를 내어주고 뒷전으로 밀려난다.
기타 연주 학습을 사례로 들어보자. 누구나 알다시피 연주법을 처음 익힐 때는 우선 손가락을 확실히 숙련시켜야 한다. 이런 훈련을 거듭하면 무엇보다 대뇌 피질이 확대되고 증가하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또 손가락 운동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법을 자동화시키게 되면, 즉 눈 감고도 연주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면 기타 줄을 일일이 짚거나 잡지 않고도 의식의 매듭과 고리를 통해 자연스럽게 연주할 수 있다. 이때 손가락을 주관하는 피질 영역은 처음에 마련했던 공간을 더 이상 유지시킬 필요가 없다. 이 피질 영역은 여전히 기타 연주를 할 줄 모르는 이보다는 크겠지만 악기를 배우기 시작하던 때만큼 크지는 않다. 운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동화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피질의 특별한 도움 없이도 뇌의 아주 깊은 곳에 있는 영역이 운동을 조종하는 것이다. 그 대신 뇌의 다른 부분이 뇌의 저장소에서 나온다. 기타 연주의 예를 들자면 음악적 정서성과 분석을 담당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이렇게 뇌로 기능을 옮긴 결과를 가히 문화사의 위대한 순간이라 일컬을 만한 형태로 체험한다. 수년 동안 연습을 통해 숙련된 기타 연주자는 화음 몇 개를 어느 정도 결함 없이 연주하는 데 만족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풍부한 ‘느낌’을 본인의 연주에서 표출할 수 있는 것이다.
무관심한 뇌, 그래서 무한한 가능성의 뇌
손을 통해 하는 음악 학습이 더 이상 뇌 내부의 장소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 음악적 감정과 관련된 뇌 영역이 어떻게 발달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어째서 뇌에서는 손의 숙련도가 자동화의 경지에 이른 뒤 음악을 통한 감정 표현이 점차 상승하는 것일까? 쇼펜하우어적인 의미에서 봤을 때 세상에서 가장 내밀한 존재인 뇌를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음악만큼 효과적인 게 없다는 말일까? 이는 단순히 뇌를 좀 더 즐겁게 할 뿐이며 느낌을 풍부하게 담은 연주를 수행하기 위해 연습으로 통달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서적인 진부함보다는 오히려 덜 형이상학적일까? 여기에는 밴드 동료로부터 받은 인정이 음악에 담긴 정서성을 증가시키는 데 더 큰 역할을 한다는 설명도 있다. 특히 사회심리학자들이 이러한 주장을 한다. 그들에게 뇌는 무엇보다 사회적 성격이 강하게 깃든 신체 기관이다. 따라서 동료에게 영향력을 끼치려는 기능이 잘 발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시각이 과연 적절한지 살펴볼 수는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의 모든 가정이 전부 뇌와 관여되어 있다. 철학자라면 쇼펜하우어적 관점이 아주 중요할 것이며, 반면 사교적이고 허영심 강한 사람들은 뇌의 사회적 관점을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그런데 뇌에서 이루어지는 발달은 원래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누가 또는 무엇이 뇌의 가소성의 밑그림을 그리는가라는 의문은 비단 음악에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곰곰이 곱씹어야 할 것이다. 누가 또는 무엇이 뇌가 발달할 수 있도록 발달 방향을 설정할까?
답을 말하자면 어느 누구도, 또는 그 무엇도 방향을 정하지 않는다. 오로지 뇌 스스로 방향을 정한다. 그런데 이 말이 처음부터 방향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뇌의 본질과 특성은 효과와 영향력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효과와 영향력이란 어디엔가 도달하려는 것, 움직이려는 것, 시작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도달하려는 것’이란 열려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과연 뇌에 유용할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도달하려는 목적을 충족시키려면 이와 관련해 어떻게 학습하느냐가 중요하다. 뇌는 처음에는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완벽하게 무관심하다. 이러한 무관심은 주위 환경과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중요한 것을 학습하는 방법을 익혔을 때 비로소 관심으로 바뀐다. 주위환경이 어떤 특성을 지녔는지, 그리고 뇌가 어떤 방식으로 반응하는지에 따라 각인은 이기적 또는 이타적인 결과로 나뉜다. 각인은 자상하고 애정이 듬뿍 담겨 있거나 반대로 난폭하고 굴욕적인 천성과 관련이 깊다. 천성 보존과 번식 혹은 대조적으로 고통과 파괴와 연결될 수도 있다. 타인을 위해 자기 삶을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자신을 위해 타인의 삶을 희생시키는 이들도 있다. 뇌에게 이 모든 것은 처음에는 단지 수많은 도달 가능한 목표에 불과하다. 하지만 결국 그 가운데 자신이 관심을 두고 원하는 것 하나를 목표로 삼게 된다.
그러므로 뇌의 엄청난 가소성은 처음에는 방향성이 없다. 나중에 가서야 지속적인 학습 및 기억 과정에 따라 비로소 방향을 얻는다. 그러므로 뇌가 근본적으로 몇몇 인간의 보존 또는 호모사피엔스 종의 보존에 헌신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고트프리트 벤이 말했듯이 이렇게 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생물에게 유리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칫 삶과 완전히 결별을 선언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자살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훗날에 이르러서야 ‘살겠다는 의지의 소멸’을 말할 수 있게 된다. 그 순간이 올 때까지 우리는 뇌에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뇌가 발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도덕도, 생물의 자기 보존도, 인간적인 상생도, 심지어 신도 뇌를 확정시키지 못한다. 인간 스스로 뇌가 가야 할 방향을 직접 찾아내고 학습해야 한다. 동시에 주위 환경의 자극 및 우연과 관계를 맺는 것 또한 뇌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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