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홀로서기
교토의 버려진 아이
기타오지 로산진은 1883년 3월 23일, 교토의 북부 가미가모上賀茂 신사 부근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여섯 살 이전까지의 기록이 거의 없어 태어난 곳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신사 근처 샤케社家(신사에서 잡무부터 시작해 모든 사무를 보는 신관의 집안)들이 살던 곳을 보존해놓았는데 그 언저리가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차남으로 태어난 그가 얻은 이름은 기타오지 후사지로北大路房次郞. 아버지는 기타오지 기요아야北大路淸操, 어머니는 도메登女였다. 아버지는 가미가모 신사—정확히 말하면 그 안에 있는 가모와케이카즈치賀茂別雷 신사—의 샤케였는데 로산진이 태어나기 세 달 전인 1882년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자살로 추정되지만 분명치는 않다.
아버지는 생활이 어려워 샤케 외에 다른 일도 해야 했으며 어머니까지 일을 해야 했다.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집을 오랫동안 비우기도 했고, 그래서 가정 불화가 있다는 말들이 돌았다. 재혼이었던 어머니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뱄던 일이 아버지의 자살 이유로 거론되기도 한다.
샤케는 하사받은 토지를 경작하거나 그것을 농민에게 임대했다. 특별한 허물이 없으면 계속 세습되었기에 분명 가난한 계급은 아니었다. 그러나 1870년 전후로 일본 정부는 세습제를 폐지하고 샤케 임명을 국가가 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때부터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샤케가 늘어났는데, 로산진이 태어난 시기가 바로 그런 혼란기였다.
‘후사지로’는 로산진 집안과 허물없이 지내던 순사 핫토리 요시토모服部良知가 지어준 이름으로 추정되는데, 매우 평범한 이름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태어났을 당시엔 더 이상 샤케 집안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샤케를 세습해온 기타오지 가문은 전통적으로 이름에 ‘기요淸’란 글자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로산진은 양자로 들어가기 전에도 이 집 저 집 전전했다고 하는데 확인되지는 않는다. 분명한 것은 로산진이 태어나기 세 달 전에 아버지가 죽었고, 남의 집에 버려지다시피 양자로 갔다는 사실이다. 장자 우선 상속 때문에 당시 일본에서는 양자를 들이는 일이 흔하게 있었다. 로산진의 양자 입적이 최초로 확인되는 것은 태어난 지 5개월 후 요시토모의 집에 양자로 들어간 일이다.
그보다 앞서 요시토모 부부는 로산진의 어머니 도메의 부탁으로 로산진을 어느 농가에 보냈는데,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아이를 보러 간 요시토모의 아내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직 핏덩이였던 아이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대로 두다가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녀는 그길로 아이를 데려와 입적시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요시토모의 행방이 묘연해졌고, 두 달 후엔 로산진을 아껴주던 그의 아내마저도 병으로 죽고 만다.
요시토모가 살던 관사에 남게 된 사람은 양자로 들어와 있던 형과 누나, 그리고 로산진이었다. 요시토모가 죽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었으므로 그들은 관사에 계속 머무를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요시토모의 소식을 알 수 없자 경찰서에서는 결혼 적령기에 이른 형과 누나를 결혼시키고 형을 순사로 일하게 했다. 그들 모두 법적 부모를 잃어버렸으나 한 곳에서 같이 살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이다. 그리하여 졸지에 젊은 부부, 즉 형과 누나가 한 살 정도 된 로산진의 부모가 되었다.
로산진이 다섯 살 되던 무렵, 아버지 역할을 하던 형이 정신이상으로 죽고 만다. 누나는 아이를 하나 낳은 상태였지만 더 이상 관사에 머물 근거가 없어졌다. 그녀가 두 아이를 데리고 갈 곳은 친정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의 집에 딸을 양녀로 보냈던 그 집도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녀의 어머니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로산진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외손자만 호적에 올리고 로산진에게는 걸핏하면 회초리를 들었는데, 그때마다 했던 말이 ‘근본도 알 수 없는 놈’이라는 욕이었다.
할머니가 로산진을 학대한다는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웃으로 퍼져 주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다행히 목판업을 하던 후쿠다 다케조福田武造와 그의 아내가 로산진을 정식 양자로 받아들였다. 그때 여섯 살이었던 로산진은 새로운 성을 얻어 후쿠다 후사지로가 된다.
이렇게 평범한 가정에 정착은 했지만 경제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생활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한 그릇의 밥이나마 끼니때마다 먹을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로산진의 기억에 의하면 그 집은 방 하나에 주방 하나가 딸린 집이었는데 방은 낮에는 작업장, 밤에는 침실이 되었다. 이렇게 비좁은 공간에 십대 중반의 도제 한 명과 어린 로산진을 받아들인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어쨌든 후쿠다의 양자가 된 것은 로산진에게는 소중한 인연이 되었다. 물론 그에게 양부모는 “단정하지도 못하고 건성으로 일하며 화투나 내기를 좋아했다. 처음부터 애정은 없었다”라는 회고처럼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보면 후쿠다 부부는 로산진을 가혹한 생활로부터 구해주었고, 전각篆刻과 만나게 해주었으며, 미식에도 눈을 뜨게 해준 은인이었다. 훗날 친형이 죽고 자신이 기타오지 가문으로 되돌아갈 때, 자신의 장남으로 하여금 그 가문을 잇게 하는 등 양부모를 극진히 모신 것을 보면 로산진이 이 인연을 소중히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산진은 후쿠다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면서 학교에 다니게 된다. 4년제인 우메야梅屋 심상소학교였다. 폐교된 지 오래되어 성적을 비롯한 각종 기록은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1893년도 졸업생 명부에는 후쿠다 후사지로라는 이름이 있다. 만년에 로산진이 이 모교에 작품을 기증하고 학생들에게 강의를 한 것을 보면, 전 생애를 통해 유일한 학교생활인 이때를 소중하게 여긴 것만은 분명하다.
로산진의 미식가로서의 면모는 후쿠다 집안의 양자 시절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린 로산진은 여러 심부름을 도맡아서 했고, 식사를 준비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당시는 장작을 때서 밥을 하던 시절이었기에 식사 준비는 어린아이에게 버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로산진의 불 조절 솜씨는 양어머니를 놀라게 할 정도였다. 그는 등급이 낮은 좋지 않은 쌀이라도 이것저것을 섞고 불 조절을 잘하여 1등급의 밥맛을 내는 법을 금방 터득했다. 그가 만든 된장국은 같은 재료인데도 양어머니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맛이 뛰어났다고 하니, 그때 이미 천부적인 미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미각은 빈부와 관계없다. 천부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돈이 없어 형편없는 음식만 먹더라도 그 감각은 변하지 않는다. 학습이나 훈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훗날 그가 했던 이 말을 입증한 셈이다. 나중에 채소나 생선 등을 준비하는 것도 그의 몫이 되었는데, 가게 주인들은 하나같이 좋은 식재료를 골라내는 로산진의 눈썰미에 놀랐다고 한다. 그때는 처음으로 가족이나 자기 존재의 의미를 느끼기 시작한 시절이었지만 어린아이에게는 가혹한 시절이었다.
쇠비름 같은 유전자
농촌에서 밭을 가꾸어본 사람이라면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벌어지는 잡초와의 전쟁을 잘 알 것이다. 어디서 생겨나는 것인지 실뿌리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호미나 괭이로 김을 매고 매도 끝없이 돋아나는 것이 잡초다. 그중에서도 끈질기기로는 쇠비름을 따를 만한 것이 없다. 뿌리째 뽑아 훌훌 털어 뜨겁게 달구어진 대지 위에 팽개쳐도 쉬 생명줄을 놓지 않는 놈이 쇠비름이다. 쇠비름을 보면 로산진이 떠오른다. 유들유들하고 여유로운 겉모습부터가 그렇다. 환경에 적응하는 태도도 그렇고, 견디어가는 모습도 그렇다.
1893년 우메야 심상소학교를 졸업한 열 살의 로산진은 한약 도매상에 견습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집에서 500미터 정도 떨어진 점포였다. 당시 견습원 생활은 설날 같은 큰 명절 외에는 쉬는 날이 없을 정도로 어린이에게는 고된 것이었다. 견습원 생활을 하는 목적은 혹독한 사회 체험을 통해 사회 적응력을 높이기 위함이다. 이른 아침의 청소나 가게 정리, 심부름, 약봉지 만들기, 주인의 딸이 외출할 때 동행하기 등이 주된 일이었는데, 누구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온 로산진에게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적은 액수였지만 용돈까지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외출을 많이 할 수 있다는 것이 로산진에게는 신나는 일이었다.
일본의 고도 교토는 역사와 문화와 예술의 도시여서 볼거리가 많았는데, 이는 로산진에게 잠재해 있던 미적 감각을 일깨우는 자극제가 되었다. 특히 거리의 가게들에 걸린 간판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4년제 소학교에서 배운 것이라고 해야 간단한 한자와 산수 정도였지만, 특이하게도 그는 간판 글자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다가간 방법 또한 특이했다.
우선 거리의 간판 글자를 보면 몇 번이고 손가락으로 그리고 익혀 기억했다. 그리고 가게로 돌아와서 아궁이에 불을 땔 때 부지깽이로 글자를 쓰면서 익혔다. 대부분의 글자는 배운 적이 없어 읽을 수가 없었다. 물론 사전을 산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래서 고안해낸 방법이 신문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신문에는 한자에 일본식 발음인 후리가나를 달아놓았던 것이다. 로산진은 자신이 익힌 글자를 신문에서 찾아내 음을 알아나갔고 점차 뜻도 알아나갔다. 원시적이고 느린 방법이었지만 그로서는 최선의 방법이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로산진이 관심을 가지게 된 분야는 서도書道였으며, 이는 예술가로서의 첫걸음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랬어도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것은 서도가 아니었다. 그의 진정한 관심은 그림이었다.
1895년 로산진이 열두 살 때 교토에서 내국권업박람회가 열렸다. 산업 수준만이 아니라 예술과 문화 수준도 높이기 위해 열린 박람회였다. 이 박람회를 관람하느라 로산진은 1년 동안 견습원 생활을 해서 번 돈의 절반을 지불해야 했다. 로산진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박람회를 보았다기보다는, 헤이안(교토의 옛 이름) 천도 1100년을 기념하는 큰 행사였기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 박람회는 로산진에게 새로운 세상과 만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일본을 대표하는 화가들의 그림이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다케우치 세이호竹內栖鳳의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세이호는 당시 서른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교토를 대표하는 화가가 되어 있었고, 지금의 교토예술대학에서 강의까지 맡고 있었다. 네 폭 병풍 「백소일수百騷一睡」는 활기차게 장난치거나 먹이를 찾아 먹는 참새들, 재롱을 떨고 있는 세 마리의 강아지들, 그리고 이제 막 졸기 시작하는 듯한 어미 개를 그린 편안한 느낌의 그림이었는데, 지금까지 그림다운 그림을 본 적이 없던 로산진의 눈을 환히 열어주었다.
세이호의 집은 로산진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세이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가메마사政’라는 작은 요리점이었다. 사방등을 이용한 간판에는 ‘政’ 글자와 함께 거북 그림이 있었는데, 단 한 번의 붓놀림만으로 그린 간단하면서도 호쾌한 필치의 그림이었다. 로산진은 그 그림과 글씨가 너무나 좋아 그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화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현실은 세이호를 만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예술가로서의 첫걸음
비록 미술학교 진학과 화가로의 길은 가난으로 인해 가로막혔지만 서도는 붓 한 자루면 가능했다. 서도는 목판업을 하는 양아버지 후쿠다 다케조의 일과도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자연스러운 선택이 되었다. 로산진은 1년 정도의 견습 생활을 한 후 양아버지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양아버지 후쿠다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남보다 많이 벌기 위해 경쟁하거나 돈을 모으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하지만 근근이 이어오던 목판업은 로산진이 가세하면서 사정이 달라지게 된다.
양아버지의 일은 판자에 글자를 쓰거나 칼로 새겨 간판을 제작하는 일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타고난 감각과 노력이 뒷받침된 로산진의 서도 솜씨는 금방 상당한 경지에 올랐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양아버지의 솜씨를 넘어설 정도가 되었다.
견습 시절에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로산진이 심부름을 다녀오다 길거리에서 지갑을 하나 주웠는데, 그 속에는 2엔이 넘는 돈이 들어 있었다. 견습원 1년 급여와 맞먹는 액수였다. 로산진은 자기보다 열 살 정도 많은 선배에게 그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어보았다. 선배는 이렇게 조언했다.
“지갑을 보니 부자가 분명해. 이 정도라면 그 주인에게는 큰돈이 아닐 거야. 그리고 찾아줄 수도 없는 일이잖아. 나는 네가 그렇게 갖고 싶어하는 서예 도구를 샀으면 해. 물론 돈은 땀 흘려 벌어야 하는 것이지만, 올바른 일을 위해 쓴다면 남의 돈을 훔친 게 아니라고 봐.”
로산진은 그렇게 해서 서예 도구를 살 수 있었고, 독학으로 서예를 시작했다. 로산진은 만년에 그 일을 회고하면서 그 선배를 ‘인생에서 처음으로 만난 스승’이라며 고마워했다.
실력을 갖춘 로산진이 가세하자 양아버지 후쿠다의 가게는 갑자기 평판이 좋아졌다. 그러자 양아버지는 로산진에게 모든 일을 맡기기에 이른다.
준비된 사람에게는 반드시 기회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당시 교토에는 ‘일자 쓰기一字書き’라는 대회가 유행했다. ‘일자 쓰기’는 주최하는 신사나 전통 있는 상점에서 응모 용지를 구입하여 지정된 글자 혹은 스스로 선택한 글자를 써 응모하는, 상금이 걸린 대회였다. 시상은 천天 1명, 지地 2명, 인人 3명, 가작 4명을 선발해 가작에게는 50전, 천에게는 2엔의 상금을 주었다. 일용직 노동자 하루 품삯이 10전이었으니 누구나 입상 욕심을 내던 대회였다.
로산진은 일을 마치기만 하면 출제된 글자를 연습했다. 입상작을 참고해 열심히 혼자서 연습했다. 거리에 널린 오래된 간판 글자는 그의 선생이 되어주었다. 로산진은 놀랍게도 첫 응모 때 가작에 뽑혔으며, 꾸준히 응모한 결과 1년 후에는 드디어 천에 뽑히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그 후 천・지・인에 드는 것은 로산진에게 쉬운 일이 되었다. ‘일자 쓰기’는 로산진에게 교토 거리의 뛰어난 간판 글자를 섭렵하는 계기가 되었다. 로산진은 간판 글자의 장점을 두루 취하여 틀에 박힌 서체가 아니라 개성이 살아 있는 서체를 만들었다. 이것은 로산진 예술의 한 분야인 전각의 토대가 되었다.
스승은 없어도
더 넓은 세상을 동경하는 것은 젊은이들의 본능이자 특권이다. 수도인 도쿄가 로산진에게는 그런 곳이었다. 스무 살의 로산진은 심한 근시로 병역을 면제받았고, 그의 특출한 솜씨 덕분에 목판업은 번창하고 있었다. 그때 기회가 찾아왔다.
어느 날 나카오지 야스中大路屋寸라고 하는 백모가 나타났다. 그녀는 로산진의 아버지가 죽은 후로 로산진을 쭉 지켜보고 있었으며, 이제 예순아홉이나 되어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만약 그렇게 되면 진실을 말해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찾아왔다고 했다. 로산진은 그녀에게서 처음으로 자기 가족과 자신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로산진이 가미가모 신사의 샤케 기요아야의 차남이며, 아버지는 예전에 죽었고 어머니와 형은 도쿄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도쿄 교바시京橋에 시집간 자기 딸이 있는데, 거기에 가서 부탁하면 어머니의 행방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날 이후 로산진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결국 그는 양아버지에게 양해를 구한 뒤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도쿄로 향했다. 백모의 사위 니와 시게마사丹羽茂正는 경제적으로 넉넉했고 친인척들을 잘 돌보아주었는데, 로산진은 그 집에서 지낼 수 있었다. 거기서 그는 형이 철공소에서 일하고 있고 어머니는 시조 다카토시四條隆平 남작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어머니와 만났던 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그 집에 찾아갔을 때 어머니는 심부름을 나가고 없었다. 이윽고 어머니가 돌아왔는데 태어나자마자 헤어진 자식을 보고도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냉랭한 태도를 보였다. 왜 왔느냐는 듯한 표정은 무서울 정도였다. 어머니는 말없이 나가더니 기모노와 속옷을 사왔다. 한눈에 봐도 헌옷이었다. 그러고는 돌아가라고 했다
어머니는 형편이 어려워서 냉랭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 일은 로산진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로 남게 되었다.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어머니를 기다리는 사이에 주인인 남작에게서 당시 최고의 서도가로 인정받던 구사카베 메이카쿠日下部鳴鶴와 이와야 이치로쿠嚴谷一六를 만날 수 있는 소개장을 얻었던 것이다. 남작은 로산진이 어리지만 혼자서 서도를 공부한 것이 대견하여 아량을 베풀었던 것이다.
로산진은 곧장 예서隸書 글을 써 가지고 가르침을 받으러 갔다. 그들은 로산진이 쓴 글을 한번 보고서는 해서楷書부터 다시 공부하라는 말만 툭 내뱉을 뿐이었다. 로산진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해서, 초서, 전서 등을 모두 익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가라면 그것을 알 수 있을 터인데 아예 초심자 취급을 하자 기분이 무척 상했다.
다음 날 해서 글을 들고 가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들은 말은 역시 실망스러울 뿐이었다.
“너의 해서 글씨는 형이 무너져 있어. 이것은 해서가 아니야. 이렇게 흔들림이 많아서야 이야기가 안 되지!”
로산진에 대한 조금의 인정도 없는 말이었다. 하긴 듣도 보도 못한 약관의 애송이가 혼자서 익힌 서체를 당당하게 내보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는지도 모른다. 로산진은 이해할 수 없었고 불만스러웠지만 다시 써 갔고 역시 혹평을 들어야 했다. 훗날 로산진은 이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마침내 대가들에게 가르침을 받게 되었지만 그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소위 대가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실로 유치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기교적으로만 관찰하고 외형만을 중시한다. 서도가의 글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옛날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근대에는 글다운 글이 없다. 그들은 왜 정해진 틀만을 고집할까? 한마디로 말해 그들에게는 예술이 없기 때문이다.
도쿄에 온 목적은 어머니를 만나기 위함이었지만, 더 넓은 세상에서 서도를 공부하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다. 하지만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대가의 제자가 되기를 포기했다. 다행히 백모의 사위 시게마사가 로산진을 위해 서도교실 겸 하숙을 얻어주었다. 시게마사의 영향력 때문인지 제법 많은 학생들이 수강하여 생활해 나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1904년 스물한 살 때 로산진은 제36회 일본미술전람회에 천자문千字文을 써서 출품하기로 결심한다. 이 미술전람회는 당시 일본 최고의 권위를 가진 대회였고, 서도가로 이름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다. 로산진은 대담하게도 예서에 도전했다. 그는 메이카쿠와 이치로쿠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글이란 모양이 중요하다. 같은 서체를 끝없이 반복하여 연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서는 해서나 초서 등을 충분히 익힌 후에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교토 거리에서 살아 있는 서체를 연마해온 로산진은 그들의 대전제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는 수개월 동안의 피나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결과는 놀라웠다. 우승자 다섯 명 안에 로산진이 뽑힌 것이다. 그는 그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대회가 끝나고 대회장에 가보니 내 작품이 걸려 있었다. 나도 놀라고 같이 갔던 사람들도 놀랐다. 2, 3일 후에 다시 가보니 내 작품이 팔렸다는 표시가 붙어 있었다. 게다가 매수자는 궁내대신이었다.
약관의 젊은이가 대부분 오십대를 넘긴 수상자들을 제치고 최고로 인정받은 것이다. 일본 서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비록 최종 등수는 두 번째였지만 궁내대신이 구입했다는 사실은 최고작임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더욱 재미있고 놀라운 것은 최종 심사위원이 그를 애송이 취급했던 메이카쿠와 이치로쿠였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승리보다 값진 것이었다.
줄탁동시라는 말이 있다. 병아리는 걷고 뛸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껍데기를 깨고 세상으로 나오려 하지만 아직 부리가 약하다. 아무리 쪼아대도 껍데기가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때 어미가 밖에서 껍데기를 쪼아 세상으로 나오는 통로를 열어준다. 로산진에게는 어미 닭이 없었다. 변죽만 울려대는 세상에서 스승을 포기하고 그는 당당히 홀로서기를 시작한 것이다.
더 넓은 세상을 향하다
인쇄문화에 변화가 생겼다. 직접 글을 새기는 목판인쇄가 오랫동안 이어져온 전통이었지만, 주조활자에 의한 활판 인쇄술이 활성화되면서 목판인쇄는 차츰 밀려나기 시작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소식을 빠르게 전하기 위해 발달한 신문을 필두로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미 서도만으로는 안 되는 시대가 되었고, 아이들을 가르쳐서 먹고사는 것은 호구지책일 뿐이었다.
스물두 살의 로산진이 서도를 더 배우고 싶어 찾아간 사람이 바로 오카모토 가테이岡本可亭였다. 가테이가 유명하기도 했지만 그의 글씨에 안진경顔眞卿 체의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로산진은 당나라 때 기존의 서체에 반기를 들면서 서도의 혁신을 추구한 안진경을 좋아했다. 훗날 로산진이 사용한 로케이魯卿라는 이름에 ‘경卿’ 자가 들어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로산진의 예서와 해서 글씨를 본 가테이는 흡족해하며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로산진도 가테이의 인품을 좋아했고, 가테이도 로산진을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가테이 역시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형에게 의지하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제자가 되면 스승으로부터 호를 받아 사용했는데, 로산진은 ‘가이쓰可逸’란 호를 받아 후쿠다 가이쓰라는 이름으로 글을 썼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가테이보다는 가이쓰를 지정해 들어오는 주문이 더 많아졌다. 그래도 가테이는 전혀 불쾌하게 여기지 않고 진심으로 제자의 성공을 바랐다. 그만큼 가테이는 후덕한 인물이었다. 로산진은 가테이 집안과 평생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특히 가테이의 손자이며 화가인 오카모토 다로岡本太郞와는 각별한 사이로 지냈다.
로산진은 어떤 서체, 어느 서도가의 글씨라도 금방 똑같이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 생활을 같이 해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어떤 서체든지 그것을 그대로 써내는 데에는 하루의 시간이면 충분했다고 한다. 이는 형태를 베껴내는 것이 아니라, 글씨에 들어 있는 이치를 직관적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약 2년 후인 1907년, 스물네 살의 로산진은 후쿠다 오테이福田鴨亭란 이름을 받아서 도쿄 교바시에 ‘서도교수書道敎授’라는 간판을 내걸고 독립한다. 다음 해 3월경 야스미 다미安見タミ를 아내로 맞이하고, 여름에는 장남 오이치櫻一가 태어난다.
로산진의 솜씨가 뛰어나다는 소문은 주문으로 이어졌고 수입도 제법 많아졌다. 이때부터 로산진은 서도에 필요한 문방사우나 연적, 필통뿐만 아니라 화로나 주전자 등을 살 때 명품만을 고집했다. 그는 고미술품의 진가는 유리 너머로는 아무리 보아도 알 수 없으며, 곁에 두고서 만져보아야만 알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명품을 구입하거나 고미술품을 구입하는 데 아낌 없이 돈을 썼고, 그것들에 대한 안목과 관심을 높여나갔다.
일본이 청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중국과 조선으로부터 우수한 문방사우와 명품 도자기, 가구 등이 대량으로 유입된 것도 로산진으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로산진이 살았던 곳이 긴자와 니혼바시의 중간 지점이라 그런 것을 볼 기회가 많았다.
로산진이 자주 다니던 서점으로 쇼잔도松山堂라는 대형 서점이 있었다. 이 서점의 사장은 로산진의 글씨를 좋아해 출판물 글씨를 맡기기도 했는데, 이때 로산진은 사장의 딸 후지이 세키藤井せき를 알게 된다. 로산진은 늘씬하고 풍만한 몸매에 대단한 미인인 세키에게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만다. 그는 아내인 다미에게서는 여성적인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예술과 요리에 거의 흥미가 없고 육아에만 매달리는 아내는 싱싱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세키로 인해 이때부터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 시작한다.
1910년경, 아내가 둘째를 임신했지만 로산진은 점점 가정으로부터 멀어져갔다. 그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데다 상대를 배려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비싼 서예 도구를 구입하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아내를 이해할 인물도 아니었다. 중국이나 조선으로 공부하러 가겠다는 걸 아내가 허락하지 않자 그는 결국 몰래 조선으로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한편 로산진의 어머니는 나이가 들어 식모살이를 그만두었으나 의지할 데가 없었다. 로산진의 형이 있었지만 몸이 약해 어머니는 조선에서 기관수로 일하고 있던 로산진의 이부異父 형에게 의지하기로 했다. 그 말을 들은 로산진은 조선통감부(후에 조선총독부가 됨)에 자리를 잡고 있던 친구로부터 일자리가 있다는 편지를 받고는 지체 없이 집을 떠났다. 어머니와 함께 조선으로 건너간 것이다.
서도를 공부할 생각이었기에 로산진이 애초 마음에 둔 곳은 조선이 아니라 중국이었다. 한데 중국은 신해혁명 직전의 어지러운 상황이라 할 수 없이 조선으로 가게 되었다. 조선에서 잡은 직장은 조선통감부 인쇄국이었다. 처음에는 서류 정리 일을 맡았으나, 곧 서도 솜씨와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통감부에서 중앙의 사령부로 전달하는 보고서를 최종 기록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 일은 한가한 업무여서 개인 시간이 많았다. 그는 서도뿐 아니라 비석 글씨, 전각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귀국할 때는 이미 전각에 크게 매료된 상태였다.
로산진은 이 시기에 조선의 가구가 지닌 아름다움과 김치의 맛에 빠져들었는데, 김치는 그가 죽을 때까지 즐긴 음식이기도 했다. 또한 한반도에 널려 있던 옛 가마터 답사를 통해 조선 도자기에 대해서도 깊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로부터 약 20년 후 로산진은 도자기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다시 조선을 방문하게 된다. 훗날 도예가로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에서의 생활은 여러 가지 깨달음을 주었는데, 훗날 도자기에 대해 흥미를 갖도록 해준 것이 그중의 하나이다.”
전각에 빠진 그는 귀국하는 길에 청 말기 전각의 대가인 우창숴吳昌碩를 만나기 위해 상하이에 들르기도 했다. 우창숴는 서화와 전각 등 여러 분야에 조예가 깊은 인물로, 일본의 많은 서예가와 화가는 그가 새긴 인장이나 낙관을 갖고 싶어했다. 로산진은 당대 최고의 대가인 그를 직접 찾아가 예술의 길을 물었다. 우창숴는 이 열정적인 젊은이에게 진심 어린 가르침을 주었고, 헤어질 때는 자신의 화첩과 ‘간운고학間雲孤鶴’이라는 인장을 선물로 주기까지 했다. 간운고학은 그 무엇에도 개의치 말고 대자연처럼 의연하게 나아가라는 말이다. 고난의 삶 속에 시, 서, 화, 전각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고 그 존재감을 알린 우창숴와 로산진은 여러 면에서 닮은꼴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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