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내 할아버지
경운기를 몰고
산밭 아래
작은 샘을 지날 때마다
잠시 물 한잔하신다
─ 어이쿠우, 시원타!
맨날 이리 고마워서 우짜노
보는 사람 하나 없는데
작은 샘한테 인사를 하신다
달콤한 보약
어르신이 경운기 사고로 떠나신 지, 어언 삼 년이 지났습니다. 우리 마을에서 어질기로 소문난 어르신이, 하루는 저희 집에 찾아와 술 한잔만 달라 하셨지요. 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아내가 소주랑 안주를 조금 내놓았는데 소주만 벌컥 드시고는 얼른 일어나셨지요. 그날이 마지막으로 어르신께 드린 소주였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왜 어르신이 바쁜 농사철에, 맨날 밥은 드시지 않고 소주만 드셨는지를, 왜 술병을 빼앗는 할머니 몰래 대숲에 소주를 숨겨 두고 드셨는지를.
산골 마을에 남의 논밭 얻어 농사지으며 산 지 서너 해 지나서야 알았습니다. 바쁜 농사철이 되면 몸이 지쳐 밥 씹을 힘조차 없다는 것을. 그래서 밥보다 술잔에 손이 먼저 간다는 것을. 몸이 지칠수록 술은 술술 잘 넘어간다는 것을. 더구나 술을 마시면 여기저기 쑤시고 아픈 몸이 끄떡없이 괜찮아진다는 것을.
어느 겨울, 어르신과 같이 지게 지고 산에 땔감 하러 갈 때 짚으로 만든 낡은 제 멜빵을 보시고 말씀하셨지요. “나 죽기 전에 평생 써도 안 떨어지는 멜빵 만들어 줌세. 틈이 나모 쓰레기장에 버려진 천막 쪼가리나 주워 오시게.” 겨울 햇살 아래, 하루 내내 평상에 앉아 지게 멜빵을 만들어 주신 어르신! 오늘, 그 지게 멜빵을 어루만지며 이른 아침부터 모판을 날랐습니다. 아무리 농기계가 편리하고 좋다 해도, 길도 없는 높은 다랑논에 모판을 나를 때는 지게보다 더 좋은 게 없습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어깨가 쑤십니다. 문득, 어르신과 논두렁에 앉아 술술 그냥 넘어가는 술 한잔 마시고 싶습니다. 그리고 오늘에야 겨우 알았습니다. 할머니 몰래 대숲에 숨겨 두고 드신 소주가 얼마나 달콤한 보약이었는지.
터무니없는
요즘 노인 회관에 가면
형님이 따로 있는 게 아니오
돈 잘 쓰는 사람이 형님이오
돈 잘 쓰는 그 형님이
얼마 전에 훌륭한 며느리를 봤다고 동네방네 소문이 쫙 났다 하더만요
요즘은 잘나고 못나고 소용이 없고
부잣집에서 시집오면 훌륭한 며느리라 하요
어허, 오래 살지도 않았는데
거지발싸개 같은 소릴 다 듣겠네
그런데도
이웃 산골 마을에 아들이 공무원인
할아버지가 사는데 말이에요
농사지으면서도 틈만 나면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공무원처럼 양복을 자주 입고 다녀요
공무원처럼 운동복을 갈아입고 산책을 해요
공무원처럼 걸음도 천천히 걸어요
공무원처럼 말도 함부로 하지 않아요
이렇게 자식들 때문에 부모가 바뀌기도 하지만,
부모 때문에 자식들 팔자가 바뀌기도 해요
아버지가 대학 교수였던 영민이는
대학 교수가 되었고요
아버지가 문방구를 하던 태식이는
초등학교 앞에서 이십 년째 문방구를 해요
아버지가 비정규직이던 순철이는
아직도 자동차 공장 비정규직이에요
살기 좋은 우리나라는
아버지가 판검사고 대통령이면
그 자식들도 판검사가 되고 대통령도 되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한평생 가난을 업으로 안고 살았어요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경제성장을 위해
자식을 낳아 전국 팔도에 빠짐없이 내보냈지요
공장으로 식당으로 고물상으로 건설 현장으로……
그런데 말입니다
일밖에 모르고 거짓말할 줄도 모르고
부지런하게 살아온 그 자식들도 아버지를 닮아
아직도 가난이 업인 줄 알아요
‘이명박 씨가 대통령 해 먹을 때
4대강, 자원 외교, 방위 산업 따위로 날린 돈이
100조 원이나 된다는데요
그 돈이면 집 없는 사람들한테
2억짜리 집 50만 채를 공짜로 지어 줄 수 있대요’
100조 원, 그 돈은 모두
일밖에 모르고 거짓말할 줄도 모르고
부지런하게 살아온 어진 백성들이 흘린 땀이라요
그런데, 그런데도요
그 주인인 백성들은 아직도 가난이 업인 줄 알아요
어처구니없는대한민국 이 땅에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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