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이 책은 소속된다는 것이 누리는 힘과 인기를 볼 때 현대사회의 핵심적 특징으로 개인주의의 지배를 꼽는 주장들이 심각하게 의심스럽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유대와 분열 사이에 나타나는 긴장은 사회적 문화적 종족적 다양성이 두드러지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시기에 소속된다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 의미인지를 반영한다.
개인이 집단이나 공동체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포함과 배제를 거쳐, 그리고 때로는 변화하는 불분명한 경계선들의 끊임없는 재교섭과 수정과 변형을 거쳐 개인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향이 있다. 개인 정체성은 윤곽이 뚜렷하지 않으며, 오히려 고유한 역동적 성격에서 비롯되는 여러 변형을 겪기 쉽다. 뿐만 아니라 한 개인에게 다양한 정체성이 공존하는 경향이 있으며, 개인적 욕구와 외부의 요구 및 기대에 따라 각 정체성의 유의미성이 움직이고 바뀐다.
민족이나 교회 같은 공동체에 들어갈 때, 개인은 해당 공동체 규칙에 순응하고 따르며, 공동체의 원리와 목표에 충성하고, 공동체의 교의와 위계질서를 받아들일 것으로 기대된다. 이를 통해 유대라는 정서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거치는 내내 공동체의 가치 및 목표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대두된다.
이 책은 또래 집단이나 지역사회부터 종족 집단이나 민족에 이르기까지 집단이나 공동체를 개인과 동일시하는 과정을 통해 개인의 자아 정체성이 점차 집합체collective의 ‘우선적 정체성’에 밀려나며, 마침내 집합체의 우선적 정체성이 개인의 새로운 정체성의 핵심 원천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 결과 개인은 집단으로 녹아들고, 집단의 가치와 원칙을 채택하며, 집단의 명령을 따른다. 새롭게 얻은 집단 정체성의 영향으로 자아 정체성이 변형되면서 개인은 집단 소속에 결부되는 안전과 온정을 누리는 대가로 개인적 자유를 꽤 많이 포기하도록 종용을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공유된 집단 정체성은 유력한 감정적 내용을 지니게 되며, 이는 종종 한 집단을 현재 상태status quo를 변형 또는 지지할 수 있는, 다양한 정도의 힘을 지닌 정치적 행위자로 뒤바꾸는 데 도움이 된다.
정체성은 소속과 배제를 통해(개인의 어떤 선택이나 타인들의 강요로) 구성되며, 두 경우 모두에서 정체성은 광범위한 공동체와 집단에 대해 다양한 정도로 감정적 애착을 갖게 된다. 내 주장의 혁신적인 점은, 선택 과정을 통해 소속이 자유의지에 따른 결과로 바뀐다는 것이다. 자유의지의 결과란 성원 지위가 할당되었을 경우에는 찾아보기 힘든 일정한 개인적 헌신을 함축한다. 반면 성원 지위가 할당되는 경우 개인들은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일련의 규범과 습관과 행동에 순응할 것으로 ‘기대된다’.
여기서 나는 한 집단이나 공동체, 가령 민족이나 신앙의 성원이 되면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으며, 이 위치에서 인간은 동료 성원들과 일정한 공통의 이해관계와 목표 및 특징 등을 공유함으로써 제한된 자기 존재를 초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선택에 따른 소속은 개인으로 하여금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하며, 이로써 그 개인이 보기에 집단의 질은 자동적으로 향상된다.
책의 개요
이 책은 7개 장으로 나뉜다. 1장에서는 정체성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정치적 도구로서 어떤 용도를 지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1장은 개인이 자기 삶을 구성하는 데 관여하면서 누리는 선택의 자유 정도가 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참조하면서 전통 사회와 현대사회를 극명하게 대조한다. 예를 들어 전통 사회에서는 자아 정체성 개념 자체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1장은 서구에서 부르카나 니캅 착용에 부여된, 때로 모순되는 여러 의미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정체성에 관한 이론적 논의로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는 특정한 복장 규범에 대한 집착 같은 일부 관행의 의미가 급진적으로 변형되면서 빚어진 전통의 재발명 과정을 부각한다. 이 논의를 통해 자아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따르는 몇몇 주요한 복잡성과 모순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 전면에 부상한다. 여기에는 상충하는 여러 정체성이 서로 공존하면서도 충돌하는 다양한 방식도 포함된다. 또 이 장에서는 정체성을 구성하는 경계선들의 역할뿐만 아니라 희미하고 유동적인 경계선의 성격도 분석하며, 정체성이 정치적 도구로서 지니는 잠재적 효용도 강조한다. 계속해서 서구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을 규정하는 주된 속성으로서 경제적 불안정과 불확실성, 문화적 불안과 정치적 소외 등을 검토하면서 세계화가 하나의 변형적 힘으로서 미치는 영향을 논의한다.
2장에서는 현대사회의 독특한 특징으로서 선택에 따른 소속의 의미와 결과를 평가한다. 이 과정에서 소속이 가져오는 결과를 평가하고, 특정한 집단이나 공동체의 성원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치르는 대가와 관련한 의심과 동요의 정서를 전면에 부각한다. 여기서 소속의 조건과 속성을 분석하고, 집합적 형태의 정체성이 구성되는 과정을 고찰한다. 특히 집단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상징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검토한다. 민족에 속하면 그 결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공통의 문화와 역사 및 특정한 영토에 대한 애착을 공유하며, 민족의 정치적 미래를 결정하겠다는 의지를 지니게 된다. 선택에 따라 소속된다는 사고와 결부된 감정적 애착은 집단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정치적 동원 과정에도 도움이 된다.
3장에서는 소속의 이중적 성격, 즉 어느 정도 선택의 자유를 누리며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남성과 여성에게 힘을 주는 동시에 그들을 속박하는 이중적 성격을 탐구한다. 그리하여 이 장에서는 임마누엘 칸트와 에리히 프롬, 미셸 푸코 등의 저작에서 자유가 어떤 의미인지 분석한다. 계속해서 내가 이른바 ‘독창적 사고라는 허구’라고 정의한 것에, 다시 말해 사실 우리는 단지 여론과 미디어가 주입한 견해를 재생산하고 있을 뿐인데도 우리 사고와 견해가 독특하고 독창적이라는 믿음에 초점을 맞춘다. 이 개념을 통해 나는 모름지기 소속이란, 사람들이 속하고자 하는 집단이 부과하는 가치와 규범 및 복장 규범 같은 여러 조건에 순응하려는 의지에 의존하는 것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런데 자유는 개인의 독립과 합리성을 가능케 한 반면, 적어도 일부 개인에게는 불안감과 무력감에 따르는 고립된 느낌을 남겨주기도 했다. 선택에 따른 소속이 소외와 고독에 대한 해독제로 작용한다는 게 내 주장이다. 그렇다 해도 사람들은 자유에서 벗어나고자 각기 다른 전략을 추구한다. 이런 전략은 순응에서 우월한 힘이나 이데올로기, 신앙이나 공동체에 대한 복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며, 모든 경우에 어느 정도 의존을 수반하는 것으로 보인다.
4장에서는 현대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선택에 따른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며, 모두가 자신의 자유를 화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다고 주장한다. 여기서는 유럽 전역과 그 너머에서 새로운 급진 우파radical right 〔‘극우파far right, extreme right’나 ‘초우파ultra right’ 등과 같은 의미〕 인민주의 정당이 널리 퍼지고 힘을 얻는 현상을 통해 권위주의 정치가 부상하는 것을 검토한다. 시장과 정치를 아우르는 다양한 형태의 근본주의가 재등장하고, 정치적 목표를 추구하는 한 세력으로 종교 근본주의가 다시 유행하는 현상도 이런 추세를 여실히 보여준다. 새로운 급진 우파의 부상은 ‘지나치게 다르다’고 여겨지는 이들을 배제함으로써 중요한 다수의 사람들(주로 일부 이민자와 무슬림)을 밀어낸다. 그들은 소속될 권리를 부정당함으로써 ‘영원한 외부자’ 지위로 추락하고 있다. 새로운 급진 우파가 부상하는 현상을 보다 보면, 다문화적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관용과 권리에 관한 쟁점이 제기된다. 결정적으로 이 현상은 누가 소속될 자격이 ‘있고’, 누가 그런 자격이 ‘없는지’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킨다(이 질문은 심각한 경제적·정치적·사회적 결과와 관련된다). 이 장에서는 새로운 급진 우파의 이데올로기와 정치 담론을 새롭게 분석해보고자 한다. 또한 ‘반反이민’ 관점과 더불어, 이 관점의 초민족적 성격과 ‘백인 국수주의’ 강령까지도 조사해보고자 한다.
5장에서는 내가 ‘소속 의례’라고 이름 붙인 것에 집중한다. 이 장에서는 실체(예를 들어 민족)에 그것을 독특하게 만드는 뚜렷한 속성을 부여함으로써 구체화하는 상징의 능력을 검토한다. 이 과정에서 상징은 개인의 대들보일 뿐만 아니라 집합적 형태의 정체성으로서 자신의 힘을 전면에 내세운다. 상징 덕분에 개인들은 자기 삶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상징은 개인들이 속한 공동체의 특징과 구조와 위계질서를 규정하는 데 이바지한다. 이런 일을 효과적으로 하려면 상징이 일정한 모호성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의미를 띨 수 있어야 한다. 한편 의례는 권위와 위계질서를 전달하며, 소속 정서를 강화하고자 집단에 대한 의존을 강조한다. 다음 두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정치권력을 정당화하는 의례의 역할이 여실히 드러난다. 즉 아랍의 봄으로 빚어진 정치 변화를 촉진하고 공고히 하고자 새로운 상징을 추구한 사례와 스페인내전 이후 프랑코 장군이 부과한, 독재를 정당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 상징과 의례의 역할이 그것이다.
6장은 질문 하나로 시작한다. 충성은 자유로운 선택을 수반할까, 아니면 압력을 받은 결과일까? 여기서 나는 ‘권위주의적’ 충성과 ‘민주주의적’ 충성을 구분한다. ‘권위주의적 충성’ 개념은 순응으로서의 충성을 가리키며, 이 경우에 개인은 정치적 상관을 위해 일하면서 한 행동에 대해 개인적 책임을 면제받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민주주의적 충성’은 충성 애착의 대상에 최대한 이익이 되도록 자유롭게 헌신하는 것으로 정의되는 역동적 원리를 가리킨다. 여기서 또 하나의 개념이 도입되는데, 이른바 ‘도구적 충성’은 기대되는 보상 여부에 개인의 충성이 좌우되는 경우를 가리킨다. 이 장에서는 독특한 감정적 헌신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데 기초를 두는 하나의 태도로서 충성의 의미를 검토한다. 또한 민족에 속한다는 공유된 정서가 종종 민족주의를 통해 인도되는 충성의 유력한 방아쇠로 작용함을 지적한다. 소속된 이들에게는 일정한 정도의 충성이 기대되지만, 현대의 다민족 사회는 하나의 역설에 직면한다. 즉 민족에 충성하는 일부 개인들은 소속을 허락받지 못하는 반면, 소속된 다른 이들은 자기 민족을 경멸하고 다른 대상에 충성한다.
평시와 전시의 민족적 충성에 관한 논의는 냉전 시기 미국에서 공산주의 동조자들에 대한 기소와 유죄판결이 이루어진 직후 충성 심사가 도입되면서 촉발된 반발에 관한 연구로 이어진다. 나는 서구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유와 순응 사이의 긴장을 검토하면서 정치적·종교적 사고의 다양성이 증대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상이한 정의가 내려지며 세속적 다문화 사회에 모순적 충성이 공존함으로써 빚어진 몇 가지 근본적 쟁점을 제기한다.
7장에서는 민족, 민족주의, 민족 정체성 등과 관련해 고른 몇몇 정치적 동원 과정에서 감정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는, 종종 무시된 문제를 고찰한다. 이 장에서는 감정이 사회적·정치적 애착에 고유하다고 주장하며, 정치적 동원의 가장 강력한 행위자의 하나인 민족에 속한다는 감정적 호소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내놓는 주요한 주장은 감정이 정치적 동원을 촉발하는 방아쇠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집단에 대한 헌신과 동일시를 수반하는 소속의 강한 감정적 차원을 전면에 드러낸다. 여기서는 세계화가 만들어낸 긴장과 모순으로 규정되는 틀 안에서 감정과 시장 자본주의의 이성적 정언명령의 대조를 검토한다. 또한 이른바 ‘해방적’ 사회운동과 ‘퇴행적’ 사회운동을 구별함으로써 현대 정치적 동원의 양가적 성격을 강조한다. 이 장에서는 정치적 동원이 결정화結晶化되는 데 도움이 되는 몇몇 감정을 확인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으며, 이른바 ‘치유 공간’, 즉 주어진 공동체에서 일정한 감정을 드러내고 다룰 수 있는 공적 공간 구성에 대한 관심을 환기한다.
우선 이 책은 전통 사회와 대비되는 현대사회에서 정체성의 대조적 유의미성을 탐구한다. 또한 세계화가 초래한 결과로 규정되는 새로운 맥락에서 정체성을 구성하는 과정이 맞닥뜨리는 여러 도전과 모순을 검토한다. 여기에는 경제적 불안정과 불확실성, 문화적 불안과 정치적 소외 등이 포함된다.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