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야독 꿈꾸며 땅 덥석 사고 보니
남자 나이 쉰다섯 즈음은 참 묘한 시기이다. 자식들도 다 컸고, 집안도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으며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는 때이다. 이런저런 세파를 겪은 끝에 사람도 제법 성숙한 면모를 보인다. 그런데 정신없이 사느라 잊고 지냈던 저 아득한 적막寂寞의 그림자가 언뜻언뜻 눈앞을 스치는 것도 그 시기이다.
교수 노릇 잘하고 있던 내가 뜬금없이 농사를 짓겠다고 나선 것이 바로 쉰다섯 즈음이었다. 사실 그런 생뚱맞은 생각을 한 남자가 나뿐만은 아니었다. 기氣치료 같은 자연치유법에 눈을 뜬 친구가 있는가 하면, 갑자기 불교에 심취하기 시작한 친구도 있었다. 더 이상 메마른 도시의 삶 속에서 허우적거려서는 안되겠다는,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던 것일까? 어느 날 나는 땅을 사야겠다는 결심을 하고서 한 부동산중개소를 찾아갔다.
농사짓는 땅으로 인정받으려면 300평이 넘어야 한다는 애기를 주워들은 바 있고, 또 나중에 집을 짓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어서, 그런 땅을 구해달라고 했다. 그리하여 중개사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내가 사는 후평동에서 자동차로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춘천시 동면 지내리였다.
큰길에서 소로小路로 접어들어 야트막한 야산들 사이로 들어가니 약간 비탈진 농토들이 나타났다. 그 근방에는 집도 한 채 있었고, 커다란 우사牛舍도 있었다. 그중 300평쯤 되어 보이는 자연녹지 한 필지를 중개사가 소개했다. 앞이 툭 트인 전망 좋은 곳은 아니었지만, 그 대신 아늑한 맛도 있고 땅 모양이 네모반듯한 것이 괜찮아 보였다. 좌측 야산에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는 것도 보기가 좋았고, 무엇보다도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선을 보는 자리에 처음 나선 자가 그 첫 상대와 덥석 결혼을 하듯, 나는 처음 본 그 땅을 덥석 사버렸다.
중개사가 지적도를 보여주었고, 토지대장이니 도시계획확인서 같은 것들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내가 그 땅을 소유하게 되면 그 뒤쪽의 땅이 맹지盲地가 될 테니, 길로 내어줄 10평 정도를 공유지분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공유지분은 따로 등기를 해주겠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런데 아, 그때는 감쪽같이 모르고 있었다. 내가 사려고 하는 땅 그 자체가 아예 맹지라는 사실을! 길이 빤히 나 있고, 자동차가 들어갈 수 있으니 지적도에 도로가 없으리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를 못했던 것이다.
사실 그때는 맹지라는 용어도, 개념도 잘 알지 못하던 때였다. 게다가 세상물정 모르는 나에게 맹지를 팔아넘긴 그 중개사는 공유지분이라던 그 10평의 땅도 등기를 해주지 않았다. 약속한 날짜가 지나도 소식이 없어서 부동산 중개소에 찾아갔더니, 그 중개사는 얼마 전에 거기를 그만두었고 연락도 닿지 않는다고 했다. 훗날 나는 공유지분이라던 그 땅이 뒤쪽 땅을 산 사람의 소유로 되어 있음을 알았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맹지를 산 교수가 나 하나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우리 대학교 남모 교수와 전모 교수가 각각 거두리에 맹지를 샀음을 알았고, 김모 교수가 만천리에 맹지를 샀음을 알았다. 이웃 강원대에도 맹지를 구입한 사람이 더러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은퇴 후에 시골에 가서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면서 음풍농월吟風弄月하겠다고 생각한 교수들이 하나같이 중개사들의 농간에 넘어가 맹지를 사고 있었다. 노후를 위해 땅을 사러 나선 교수들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경치만 보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맹지를 사들였다. 교수들은 가히 맹지 전문가들이었다. 동요 노랫말에 나오는 “아빠는 엄마를 좋아해”가 아니라 “교수는 맹지를 좋아해”였다.
어찌 되었건, 나는 마침내 농지 소유자가 되어 농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막막할 뿐이었다. 나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나의 조상님들 중에도 농사 비슷한 것을 지어본 분이 없었다. 하지만 한군데 믿는 구석이 있기는 했다. 평소 친하게 지내고 있는 사학과 박근갑 교수가 일찍이 송암리라는 시골에 땅을 사서 집을 짓고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순진한 책상물림들에게 ‘은퇴 후 귀촌’이라는 바람을 불어넣은 장본인이 바로 박 교수였다. 그는 틈만 나면 우리에게 시골생활의 즐거움을 떠벌렸고, 농사가 천하지대본임을 실감하면서 살고 있다고 으스대었다.
박 교수는 내가 농사를 짓기 위해 밭을 구입했다는 소리를 듣고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그리고 영농의 기초를 가르쳐달라는 내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그는 몇 가지 농기구와 멀칭*용 검정비닐 그리고 퇴비 두 포대를 구입해놓을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그때가 감자를 심는 시기여서 씨감자를 마련해놓을 것을 지시했다. 나는 당장 철물점으로 달려가서 농기구들을 구입했고, 농협에 가서 검정비닐과 퇴비를 구입했다. 씨감자는 우리 땅 옆에 사는 영감님에게 부탁했더니, 쓰고 남은 것을 나누어 주었다.
* 농작물을 재배할 때 경지 토양의 표면을 덮어주는 일. 덮어주는 자재를 멀치mulch라고 하며, 예전에는 볏짚, 보릿짚, 목초 등을 썼으나, 오늘날에는 폴리에틸렌이나 폴리염화비닐 필름을 이용한다. 토양침식 방지, 토양수분 유지, 지온 조절, 잡초 억제, 토양전염성병균 방지, 토양오염 방지 등의 목적으로 실시된다.
내가 준비를 마치고 난 어느 날 드디어 그가 우리 밭에 나타났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평소에 농사일을 가지고 그토록 호언장담하던 박 교수는 밭이랑을 만들고 비닐을 씌우는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예상 외로 몹시 버벅거렸다. 그가 정확히 아는 것이라고는 씨감자를 심을 때는 몇 토막으로 잘라서 눈이 난 곳을 위로 해서 심는다는 정도였다. 나는 그가 무안해할까 봐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농사를 짓는다면서, 밭 만드는 일 안해봤어요?”
그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대답했다.
“사실은… 동네 청년들이 다 해주는 바람에… 나는 나중에 캐는 것만 해봤어요.”
알고 보니, 박 교수는 내가 앞으로 그 전철을 밟아나가게 될 모델 ─ 엉터리 농사꾼이었다.
300평 밭농사가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감자를 심은 면적이 열 평 남짓 되었을까? 애초에 땅을 사서 정지整地작업을 할 때, 밭의 윗부분 50평가량은 비닐하우스 및 원두막을 짓기 위한 용도로 따로 평탄작업을 해두었다. 하지만 나머지 200여 평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박근갑 교수는 옥수수와 콩을 심을 것을 권했지만, 그런 것들은 또 어떻게 심어야 한단 말인가? 아내와 나는 눈앞에 펼쳐져 있는 광활한 토지를 바라보며 한숨만 쉴 뿐이었다. 원래 내가 대책 없이 일 저지르는 데 선수이긴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문제가 달랐다. 경작지의 20분의 1 정도에만 작물을 심어놓고 나머지를 풀밭으로 놀린다면,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아내와 나는 의논 끝에 옆의 영감님에게 도움을 청해보기로 했다.
영감님은 나머지 땅에다 일단 복합비료 한 포대와 퇴비 다섯 포대를 뿌리라고 했다. 우리가 시키는 대로 했더니, 영감님이 트랙터를 가지고 와서 로터리를 쳐주었다. 그러고는 말린 옥수수를 몇 개 줄 테니 그 씨를 심어보라고 했다. 다음 토요일이 되자, 영감님의 지시대로 50센티미터 간격으로 호미로 땅을 파고서 한 구멍에 세 알씩 옥수수 씨를 넣었다. 점심을 사 먹어가면서 오후 늦게까지 작업을 했더니, 반 정도의 면적에 옥수수를 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나머지 땅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다시 영감님에게 자문을 구했다. 영감님은 모종상에 가서 푸성귀 모종들을 사다가 나머지 땅에다 심어보라고 했다. 다음 날 아내와 나는 영감님이 가르쳐준 대로 아침 일찍 중앙시장 모종상을 찾아갔다. 거기에는 온갖 종류의 텃밭 모종이 작은 포트 속에서 가녀린 몸매들을 나부끼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그 앳되고 앙증맞은 모종들에 현혹되어 무턱대고 상추, 쑥갓을 비롯한 쌈채소, 맷돌호박, 오이, 가지 등속을 구입했다.
이미 감자를 심으면서 밭이랑을 만들고 검정비닐로 멀칭하는 요령을 터득했기 때문에, 푸성귀 밭을 만들고 채소 모종들을 심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농사일에는 초보 중에서도 왕초보들인지라 전문 농사꾼들에 비해서 작업시간이 두세 배는 더 걸렸던 것 같고, 힘도 두세 배는 더 들었던 것 같다. 주말 이틀 동안 어찌나 용을 썼던지, 일요일 저녁에는 밤새도록 끙끙 앓았고, 월요일 아침에는 결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솟아올랐다.
교수에게 300평 밭농사라니! 내가 얼마나 무모한 짓을 감행했는지를 뼈저리게 느끼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가 농사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주말뿐이었다. 아내는 서울 소재 대학에 다니는 딸 셋 뒷바라지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나는 학교 일에 바빴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우리 대학에는 주말농장을 가꾸는 교수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이 가꾸는 땅은 기껏해야 5평 아니면 10평 정도였는데, 그들은 그 면적 가지고도 쩔쩔맨다고 엄살을 떨었다. 그런데 30평도 아니고 300평이라니!
하지만 이건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옥수수의 싹이 채 돋기도 전에, 푸성귀 모종들이 채 모살이 ─ 모종이 땅에 뿌리를 박고 파랗게 생기를 띠게 되는 일 ─ 를 하기도 전에, 멀칭이 안된 땅에서는 온갖 종류의 잡초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바랭이, 방동사니, 개망초, 사위질빵, 며느리밑씻개, 질경이, 여뀌, 애기똥풀, 쇠비름 등 그 이름도 요상한 잡초들이 여기저기서 정신없이 돋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잡초들은 순식간에 자라났다. 바랭이 같은 풀은 줄기를 뻗어서 땅에 닿으면 거기에 뿌리가 생기고, 그 뿌리에서 다시 줄기가 생기는 식으로 온 밭을 뒤덮어갔다.
아내와 나는 호미로 긁어서 잡초의 싹을 없애보려고 했다. 잡초도 어린싹일 때는 호미로 쉽게 긁혔다. 그러나 일주일 후에 가보면 잡초의 양이 두 배는 불어나 있었고, 잡초의 키가 두 배는 자라나 있었다. 마침내 옥수수 싹이 돋아났지만 풀 속에 묻혀 찾기가 힘들 지경이었고, 김을 매다가 자칫 옥수수 싹을 자르기 일쑤였다. 김수영의 〈풀〉이라는 시에 묘사되어 있듯, “풀은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났다.
이대로는 안되겠고 뭔가 해결책이 있어야겠다고 고심하고 있던 차에, 마침 아파트 옆집에 초등학교 교감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한 분이 이사를 왔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결심을 하고서 옆집에 찾아갔다.
“제가 지내리에 땅이 좀 있는데요. 땅이 좀 큰 편이어서 누구 같이 농사지을 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마침 선생님이 이사를 오셨으니, 괜찮으시다면 같이 한번 지어보지 않으실래요? 농사에 들어가는 비용은 다 제가 대고, 수확물은 똑같이 나누는 조건으로요.”
교감선생님은 처음에 좀 당황해하셨다. 어릴 때 시골에서 자라기는 했지만 농사를 지어본 경험은 전무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도 농사에는 초년생이며 문외한이라고 했더니, 마침내 동의를 해주셨다.
“안 그래도 퇴직하고 뭐 하는 일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아내와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둘이 하던 일을 넷이 하면 얼마나 수월하겠는가! 내가 원래 운이 좀 좋은 편인데, 이번에도 운이 잘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기쁨은 사흘을 넘기지 못했다. 우리가 함께 밭에 가기로 한 전날 밤, 이번에는 교감선생님이 우리집을 방문했다.
“제가 엉겁결에 동의는 해놓고, 곰곰이 생각해봤는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안되겠어요.”
“아니, 무슨 문제가 생겼나요?”
“그게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도 엄두가 안 나서요.”
나는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분 입장에서 보면 엄두가 안 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분은 나보다 나이가 열 살이나 더 많지 않은가. 인생의 후반기에 뭔가 새로운 숨통을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쉰다섯 즈음, 늦어도 예순 이전에는 시도해야 할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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