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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이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보건실이었다. 내가 여기 왜 있지? 한순간 머릿속이 암전되는 듯했다. 찬찬히 기억을 되짚어보니 쓰러지던 순간이 떠올랐다.
교실이었고, 걷고 있었다. 어쩐지 배가 아파 화장실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의는 아닌데……. 순간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쟤 뭐야? 뭐가 묻었어. 란이는 설마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계속 걸었다. 꼴에 여자라고…… 킥. 이번엔 남자애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란이가 고개를 돌려 쳐다봤더니 뭘? 했다. 어떤 애는 급하게 집게손가락을 내렸다. 란이는 자신을 감싼 이상한 공기를 감지했으나 그게 뭔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그때 2학기 내내 옆자리에 앉았던 짝이 란이에게 다가와 말했다. 너 엉덩이에 뭐 묻었어. 란이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엉덩이 쪽을 보려고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란이는 손을 엉덩이 부근에 갖다 댔다. 축축했다. 뭐지? 생각하며 손을 눈앞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쓰러진 것이다.
“정신이 좀 드니?”
보건 선생님이었다.
“생리한다고 쓰러진 애는 보건 선생 되고 니가 처음이다.”
선생님이 짓궂게 말했다.
“좀 늦은 편이네.”
란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너무 늦었다. 친구들은 이미 초등학교 6학년이나 중학교 1, 2학년 때 모두 시작했다. 나는 왜 안 하지? 이런 의문을 가져 본 적도 있지만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도대체 이걸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까. 하겠지 하겠지 생각은 해왔는데 이렇게 느닷없이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그래도 걱정 마. 종종 늦는 애들도 있으니까.”
보건 선생님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란이는 침대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었다.
“얼른 화장실에 가서 속옷이랑 갈아입어.”
보건 선생님이 란이에게 검정색 봉지를 건넸다. 그때까지 옆에 있는지도 몰랐던 클레어가 봉지를 대신 받았다.
“담임이 가 보라고 해서.”
란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클레어가 말했다. 란이는 괜찮아, 라고 개미 목소리로 말하고는 클레어에게서 봉지를 뺏으려고 했지만 클레어는 봉지를 들고 빠르게 보건실을 나갔다.
란이는 하는 수 없이 보건실을 나섰다. 화장실 앞에서 클레어가 기다리고 있었다. 란이는 봉지를 받아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 칸에 들어가 차례대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우선 교복 치마를 벗었고 그다음 검정 스타킹을 벗었다. 마지막으로 팬티를 내리고는 유심히 살펴봤다.
검붉은 피로 그려진 지도였다.
란이는 한참 동안 지도를 바라봤고 뭔가가 달라졌다는 생각을 했다. 이전의 자신이 그냥 사람이었다면 지금은 여자가 되었다는 생각 말이다.
기술가정 시간이었다. 임신에 대해 배우고 있었다. 선생님은 칠판 앞에 서서 말했다. 월경을 시작하게 되면, 임신을 할 수 있는 몸이 됩니다. 진짜 여자가 됐다고 볼 수 있죠.
진짜 여자……. 란이는 태어나서 한 번도 여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여자가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된 후로 쭉 그랬다. 란이는 이렇게 되묻고 싶었다.
여자가 되고 싶지 않다면요? 임신을 하고 싶지 않다면요?
그러나 묻지 못했다. 선생님이 뒤이어 여자가 된다는 건, 즉 월경을 시작하는 건 크나큰 축복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란이는 동의할 수 없었다.
란이는 검정 봉지에 들어 있는 새 팬티를 꺼냈다. 팬티를 허벅지에 걸치고 생리대를 뜯었다. 생리대는 날개형으로 되어 있었다. 천사의 날개를 흉내 낸 것 같았다. 생리대에 붙어 있는 종이를 떼자 끈끈한 면이 나왔다. 끈끈한 면을 팬티에 붙이면 되는 것이다. 날개가 나란히 놓이게 붙이려 노력했지만 번번이 삐뚤어졌다.
몇 번의 시도 끝에야 정 가운데에 생리대를 붙일 수 있었다. 고작 생리대 하나 붙이는 데도 이렇게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 줄은 몰랐다. 쉬운 게 없구나. 란이는 그런 생각을 하며 팬티를 올려 입었다. 생리대와 맞닿는 살의 촉감이 불쾌했다. 천사는 무슨……. 마치 기저귀를 찬 것 같았다.
란이는 스타킹을 신고 교복 치마를 마저 입었다. 그리고 화장실 칸에서 나와 세면대 거울 앞에 섰다. 손을 씻고는, 물이 묻은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거울 속에는 자신이 있었다. 퀭한 눈을 한 자신이 말이다. 찬찬히 얼굴을 뜯어보았다. 속 쌍꺼풀이 진 퀭한 눈에 낮은 코, 작은 입술의 왜소한 소녀가 보였다. 사람들이 보기에 예쁘다고 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란이는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입을 앙다물었다. 일자 입술을 한, 조금 화난 듯한 자기 얼굴이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 란이에게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밖으로 나가자 멀리서 클레어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우아하다.
란이는 사뿐사뿐 걸어오는 클레어를 보며 우아하다고 생각했다. 우아하다는 말을 처음 들은 건 클레어의 엄마가 학교를 다녀간 직후였다.
정말 우아하지 않아?
누군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클레어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말했다.
클레어의 엄마는 검은색 외제차를 타고 학교에 왔다. 유기농 콩으로 만든 두유와 컵케이크를 반 애들 숫자에 맞춰 가져왔다. 클레어가 반장이 된 직후였다. 이래서 반장은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를, 애들끼리 했다. 란이는 그런 말을 하는 애들을 유심히 지켜봤다. 클레어만큼 잘사는 애들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늘 잘사는 애 못사는 애 편을 나누었다.
란이는 자신이 못사는 편 중에서도 가장 하위에 속할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자신의 형편에 대해 생각한 건 중학교에 들어오게 되면서다.
초등학교는 지금 살고 있는 낙원동에 있는 학교였기 때문에 모두 사는 형편이 비슷비슷했다. 대부분 못사니 잘사는 게 특이한 것이지 못사는 건 특이한 게 아니었다. 란이는 누구나 동사무소에서 주는 쌀로 밥을 해 먹는 줄 알았고, 또 누구나 좁은 집에서 사는 줄 알았다. 그러다 중학교에 오면서 많은 것이 다라졌다. 란이는 추첨을 통해 낙원동이 아니라 바로 옆 동인 해원동에 있는 중학교에 오게 되었다.
더 이상 애들은 사는 형편이 비슷하지 않았다. 비교 대상이 생기자 가난은 이빨을 드러냈다. 배고픔을 느끼는 게 가난이 아니었다. 다들 스마트폰을 쓰는데 자신만 쓰지 못하는 것, 그게 가난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건 해원동 애들이었다. 그 애들도 란이가 느끼는 가난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그건 토원동에 사는 클레어 때문이었다. 클레어는 최신 기종의 아이폰을 가장 먼저 들고 왔고, 매일 아침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등교했다. 아이들은 그런 클레어를 보며 자신들이 가난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란이를 보며 혀끝을 찼다. 실제 애들이 혀끝을 찬 건 아니다. 그들은 란이와 자기들을 차별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란이는 그런 아이들을 보며 혹시 그들이 클레어에게 받은 모멸감을 자신에게 그대로 갚아 줌으로써 자신들을 어떤 감정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클레어가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모멸감을 준 적은 없지만, 클레어가 신고 다니는 신발, 메고 다니는 가방, 입고 다니는 겉옷 등이 그들에게 비교 심리를 일으켰다. 비교보다 비참한 건 없었다.
란이는 자신이 클레어와 친구가 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클레어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무슨 목적이 있지 않고는 이럴 수는 없었다.
“겉옷이 안 보이더라. 우선 니 가방만 챙겨 왔어.”
클레어는 란이에게 가방을 건넸다.
“담임한테 너 몸이 많이 안 좋은 것 같다고 했더니 조퇴해도 된대. 내가 데려다줄게.”
“괜찮아.”
“너 좀 많이 아파 보여. 그리고…….”
클레어가 뜸을 들이다 말했다.
“사실 나도 몸 안 좋다고 거짓말했거든. 그럴 일이 있어서……. 암튼 집에 가는 길이니까 데려다줄게.”
란이는 자기 멋대로인 클레어가 부담스러웠다. 같이 있는 게 어색하고 싫었다. 클레어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이 입고 있던 패딩을 벗어서 란이에게 건넸다.
“이거 입어.”
란이는 가방만 받아 교문을 향해 걸어갔다. 클레어는 괜찮다는 말에도 굳이 란이를 따라왔다. 란이는 한 번 더 돌아서서 괜찮다고 말했다.
“나도 괜찮아.”
그런 뜻이 아니잖아,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란이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교문을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거기까지 클레어가 따라왔다. 클레어가 란이의 어깨에 멘 가방을 벗기더니 자신의 패딩을 억지로 입혔다.
“하지 마.”
“너 입술이 하얘. 하얗게 질렸어.”
란이는 더 이상 실랑이를 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판단해 클레어가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클레어는 맘대로 해도 된다는 뜻으로 알았는지 택시를 잡았다.
택시가 서자 란이를 먼저 택시 안으로 밀어 넣고 자신도 탔다.
“아저씨, 낙원동 행운아파트로 가 주세요.”
내가 행운아파트에 산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란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낙원동에 산다는 건 알더라도 행운임대아파트에 사는 것까지는 들키고 싶지 않아 나름 조심했었다. 란이는 행운아파트라는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클레어의 조심성 없는 태도가 불쾌했다. 자신에게는 이토록 중요한 문제가 클레어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속상했다.
란이는 택시에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숨이 막혀 왔다. 등줄기에 땀이 찼다. 히터 때문인가 생각하다가 유독 상체만 덥다는 걸 깨달았다. 클레어가 벗어 준 몽클레어 패딩 때문이었다.
클레어가 클레어가 된 건 얼마 전이었다.겨울이 시작되면서 애들은 패딩을 입고 오기 시작했다. 노스페이스, 블랙야크, 케이투, 네파 등 다양한 브랜드의 옷을 입고 왔다. 그리고 그 속에 몽클레어를 입은 클레어가 있었다.
클레어가 몽클레어를 입고 온 날, 아이들은 선망의 눈빛으로 클레어를 쳐다봤다. 물론 스스로는 부정할 것이다. 그러나 란이는 봤다. 애써 외면하려는 눈, 별거 아니라고 무시하려는 눈, 대놓고 부러워하는 눈, 자신도 갖고 있다는 동지애로 동공이 살짝 커진 눈 들을 말이다. 란이는 놀라지 않았다. 몽클레어가 뭔지 몰랐으니까. 그날 밤, 집을 돌아와 인터넷을 켜 보고서야 알았다. 클레어가 입고 온 패딩이 200만 원을 훌쩍 넘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건 란이네의 육 개월 치 임대료와 관리비를 합친 것보다 비쌌다. 누군가는 그걸 옷을 입고 다닐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클레어는 그날 이후로 예솔이라는 이름 대신 클레어라고 불렸다. 질투심이 섞여 있는 별명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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