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1.
외국어 속에 마법으로 묶여 있는 저 순수 언어를 번역자 자신의 언어를 통해 풀어내고, 작품 속에 갇혀있는 저 순수 언어를 작품의 재창조를 통해 해방시키는 것, 바로 이것이 번역가의 과제이다. 이 순수 언어를 위해 번역가는 자기 언어의 낡은 장벽을 무너뜨려야 한다.
─ 발터 벤야민, 「번역가의 과제」에서
번역에 관한 글들이 번역만큼 중요했던 시기는 별로 없었다. 번역이 황금기를 맞이했으며 번역 이론이 최초로 세상에 선보이고 또 위용을 떨쳤던 프랑스의 르네상스 시대조차 번역에 관한 이론적 담론보다는 번역이 프랑스어나 프랑스 문학의 발전에 끼친 영향력이 훨씬 막강했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은 망각되어도 좋은 것은 아니다. 번역이라는 활동성을 크게 간과해온 한국문학사 전반을 되돌아봐도, 번역은 항상 글에 관한 이론적 사유를 한 걸음 앞서갔던, 미지를 향한 기투였으며, 후대에 이르러 우리는 번역이 가려고 했고 실로 도달하기를 원했던 잠재적 경계를 잠시 마음속으로 그려보며, 언어–문화의 변화와 맞물린 문학의 새로운 도전과 그 가능성을 추정해볼 뿐이다. 번역을 다룬 대다수의 이론적·철학적 글도 결국 번역작품에 대한 사유이며, 번역이 하나의 작품을 바라보게 될 때, 번역이 오로지 작품으로 세계를 방문할 때, 번역이 제 문학적 가치를 확보해낼 희망을 타진할 뿐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 역시 망각되어도 좋은 것은 아니다. 이론은 후차적으로 추정해볼, 그것이 번역이라면 항상 귀납적인 외투를 입고 있어야만 하는, 그러나 번역에게는, 번역을 위해서는, 여전히 헐겁거나 지나치게 죄어오는 유령들의 외투일 뿐이다. 번역을 언어-문화의 프락시스로 사유하려는 노력이 아니라면, 번역이 이론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매 순간, 저 이론은 어딘가에 기대지 않고서는 조금도 제 가치를 보장받을 수 없다. 번역의 유령들이 배회하는 것이 아니라, 번역에 관한 메타 담론들이 끊임없이 개념주위를 떠돌고 텍스트의 주변에서 부유하며, 번역을 은유하는 말들을 뱉어내면서 번역에서, 언어에서, 문학에서, 주인 행세를 하려고 들며 어딘가를 겉돌고 떠돌며 미끄러지는 번역의 유령들이 되어 번역 주위를, 그 핵심을 벗어난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다.
번역에 관한 글은, 번역 행위에 대한 이론적·철학적 규명보다는 번역의 문학적 가치에 대한 옹호와 문화적 파장에 대한 분석, 언어 내부의 변화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고자 할 때, 한번쯤 시도해볼 만한 사유의 반열에 오를 자격을 갖춘다. 그동안 우리는 번역에 대해, 철학적 접근에서 해석학적 분석에 이르기까지, 소통에 대한 염려에서 온갖 종류의 이분법에 대한 옹호와 그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구절절한 사연의 호소와 주장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자주 공설들을 듣고 또 감내해야만 했다. 번역을 두 가지 항 안에 쑤셔 넣으려는 이분법의 이데올로기는 번역과 번역가를 돌보는 대신, 지속적으로 번역과 번역가를 괴롭히고, 번역 행위를 단순화하며, 번역을 선택적 결과물로 만들어버리는, 너무나도 공고한 통념이자 순진한 입장이며, 번역의 문학적 활동과 그 가치를 즉각 취하하는 폭군일 수밖에 없다. 번역의 방법론은 다섯 가지, 열 가지를 말하지 않는다. 텍스트의 성격에 따라 가변적인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오로지 두 가지, 그러니까 직역이나 의역, 의미 중심이나 문자 중심, 도착어 중심이나 출발어 중심 중 하나로 축소되거나 환원되는 속성에 뿌리를 둔 이분법이 여전히 자기의 입장을 관철시키려는 것이다. 번역에서 파생된 모든 이분법의 진원지가, 그 출발점이 바로 여기다. 둘 중 하나에 치중하거나 치중할 수밖에 없다고 번역 이론가들이 입을 모으기 시작하면, 이분법은 번역의 방법론으로 상정해볼 최후의 보루라 자처할 뿐 아니라, 언어와 문화에 대한 포괄적인 사유에 관해서조차 기어이 둘로 나누어 구분하는 기이한 일에 온 정신을 쏟아 붓기 시작한다. 저자 중심이나 독자 중심, 이국화 전략이나 자국화의 그것처럼, 증식하는 이분법은 사유의 방식과 문화의 가능성, 그것의 이해 양상이 바로 그렇게 이분법 속에서만, 바로 그 테두리 안에서만 결정될 수 있다고 믿는, 그럼에도 별다른 의심도 없는, 어떤 때는 신념이 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순진하면서도 영악한 관점들이 되어, 다시, 여전히, 번역 주위로 유령이 되어 떠돌아다니는 것이다. 이분법의 악순환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번역하는 문장들, 지금-여기서 번역하는 사유들, 번역하는 저 문자의 세계는, 단순하고 기계적인 코드의 전환으로 취급되거나 절름발이 지지자의 망령이 되고 반쪽짜리 운명이 되어, 이 세계와 이 세계를 기습하듯 찾아온 사유들, 그 사유를 담아내려는 불가능에 가까운 언어적 실험과 도전의 세계 저 바깥에서 겉돌고 헛돌면서, 우리에게서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이탈될 뿐이다. 이분법에 젖어 번역에 싸구려 해석의 격자를 씌운 이데올로그들, 이 번역 이데올로그들의 욕망이 번역을 지배하려고 드는 순간은 바로 이때다.
번역 이론이라는 이름으로 그동안 출몰했던 이분법적 개념들을 한번 떠올려보라. 번역이 당신을 호명할 때, 번역이라는 언어활동이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은 단순해서 가지런한 이 이분법의 두 곳 중 하나의 편에 서서 번역이 열어놓은 이 세계와 대면한다고, 그렇게 번역하는 문장들을 향유한다고 과감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직역-의역, 형식-의미, 문자-정신, 구조-내용, 원문 중심-역문 중심, 문학성-가독성, 충실성-창조성, 보존-변형, 딱딱한 번역-유려한 번역, 이국화-자국화, 출발어-도착어, 들이, 들이대기-길들이기, 이타성-정체성, 낯섦-친숙함 중에서 하나를 배척하여 선택하거나 선택하여 배척할 수 있다고 당신은 말할 수 있는가? 번역을 한 줄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이 두 가지 항이 명료하다는 제 아우라 뒤에, 지워지고 부정된 자잘하고 섬세한 것들, 다양한 편차와 차이로만 존재하는 언어의 결들이 자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며, 이분법의 아우라는 오로지 두 가지에 편입되지 못한 모든 것과 언어의 가능성을 지우고자 하는, 지워버린, 시대의 상징일 뿐이라는 사실을 곧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이론이라는 이름의 담론들을 환대하면서, 번역이 가짜 유토피아의 꿈에 몸을 싣고, 언어를 넘어 언어 밖으로, 도식을 향해 한껏 부풀어 오르는 것은 바로 이 상징에 기대서이다. 이분법의 각각은 자명함을 주장하는 바로 그만큼, 매 순간, 텍스트의 특성과 번역의 조건에 따라 가변적일 번역 방식을 오로지 두 가지 형태의 선택적 사안으로 고착시킬 뿐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옮겨와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텍스트가 조직되는 고유한 방식이며, 텍스트의 고유한 조직이 다른 언어로 변형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을 포착해내는 작업에서 번역에 관한 담론들이, 번역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한다.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맥락을 벗어난 기호는 그 자체로 아무것도 아니듯,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듯, 번역도 맥락을 벗어나 궁리할 수 있는 과학적 사유의 대상이 아니다. 번역은 과학을 지향하는 학문적 대상이나, 어떤 구조적 격자를 갖추어놓고 거기에 맞추어 몸을 넣거나 빼낼 수 있을 것이라 신봉할 만한 이론적인 영역에 종속된 연구 대상도 아니다. 번역은 경험적 사실들과 경험에서 축적된 지식과 언어를 통해, 다른 언어로 그 지식과 언어를 위치시키면서, 매번의 맥락과 역사적 상황을 헤아려 말의 쓰임을 찾아가는 언어활동 전반에 대한 귀납적 성찰의 과정이며, 이는 사실 언어 자체의 속성이기도 하다. 번역은, 번역에 관한 이야기는, 번역에 관한 성찰은, 경험을 뒤로하고 전진하는 선험적 방법론이나 언어-문화의 가변적인 속성을 제쳐놓고 저 혼자 앞장서 철학의 영역으로 달음질하고자 하는 사변적인 추체험의 기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2.
자기는 한국인이며, 자기가 선험적인 것으로 믿고 있는 서구 문학 역시 경험적이라는 것, 그리고 자기는 거기에 물들어 있다는, 그런 의도되지 않은 배반을 그는 맛볼 것이다. 결국 모국어를 회피할 수는 없다.
─ 김현, 「한 외국 문학도의 고백」
번역은 그렇다면 어떤 작업인가? 번역도 소위, 글을 쓴다는 축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까? 외국 작품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에 그 무슨 주관적 판단이나 창조적 재능이 필요하단 말인가? 원문을 충실히 옮겨야 하는 번역가에게 성실성과 해석력 그 이상을 기대하는 일이 가능하기나 할까? 이러한 통념은, 이분법에 대한 통념처럼, 그것의 견고함처럼, 그저 통념일 뿐이다. 번역, 특히 문학 번역1)은 어쩔 수 없이, 아니 필연적으로, 창조적인 재능과 탁월한 조문造文의 능력은 물론, 뛰어난 창작에 요구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재능과 조건, 태도와 윤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텍스트의 특수성을 파악한다는 전제하에서만 번역을 진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번역은 사실 비평과 멀리 동떨어진 작업도 아니며, 문체의 실험이나 사유의 고안과 크게 무관한 작업도 아니다. 번역 주위에서 자주 발생하는 커다란 오해 중 하나는, 번역을 언어 코드의 단순한 전환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 경우, 번역은 수동적이고 기계적인 작업이며, 외국어에 능통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한 작업으로 인식되어버린다.
1) 나는 문학 번역만이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가 번역이라고 부를 만한 무엇이라고, 번역에 관한 사유를 촉발시키고 번역을 통한 언어적 전환을 사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 사용된 엄밀한 의미라는 말을 조금 확대하여 문헌학적 자료 및 기타 인문학 텍스트를 번역이라고 부를 만한 무엇에 추가할 수 있겠다.
그러나 (문학) 번역은 텍스트의 특수성을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된 채 진행할 수 없으며, 따라서 비평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번역가에게 요구되는 것은 물론 문학작품을 문학작품이게 만들어주는 요소를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때 번역가는 타자의 문학, 특수한 언어로 직조된 글을 제 언어로 담아내고자 하는, 낯선 시험대 위의 곡예를 통해 아슬아슬하게 성공 여부와 번역가 자신의 운명을 시험해볼 뿐이다. 문학 텍스트의 문학적 요소들, 그러니까 문학 텍스트를 문학이게끔 지탱해주는 것, 말하자면 작품성을 결정짓는 문장들의 특수한 구성이나, 작가라면 반드시 염두에 두었을 만한 문체, 고유한 리듬이나 어휘의 독창적인 사용처럼, 우리가 흔히 ‘문학성’이라고 부르는 것이야말로 번역에서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할, 번역의 핵심이자 사안, 번역가의 과제나 다름없다. 문학 번역은 나의 문자로 타자의 문자의 가장 깊은 저변을 파헤치는 작업, 나의 문장으로 타자의 문장의 가장 조밀한 조직을 길어 올리는 실험이기에, 필연적으로 창조적 재능과 풍부한 지식, 뛰어난 감수성과 정확한 판단력을 필요로 한다. 문학 번역은 의미의 두께를 결정하는 언어적 특수성의 양감과 문화적 낯섦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으며, 텍스트의 특수성이 번역에서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기치 아래 외국어와 타자의 문화, 타자의 정신과 사상이라는, 눈을 크게 뜨지 않으면 제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유령과 언제든지 맞서 싸워야만하기 때문이다. 번역이 만듦poïesis을 저버리고 ‘쓰다’의 실천praxis을 도모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으며, 타자의 언어와 나의 언어를 포개어보는, 지난하고도 고달픈 작업에 필요한 이론적 탐구theōria와 성찰 없이 가능하지 않다.
이처럼 나는, 번역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삼분하여 소개한 인간의 지적 활동을 총체적으로 구현하는 작업이며, 이러한 능력을 갖춘 상태에서 하루하루 밀고 나가는, 매우 힘겹고도 독창적인 글쓰기라고 생각한다. 번역의 역사를 뒤적거려, 그 어떤 시대를 살펴봐도, 문학을 번역하는 자가, 창작자의 영예로운 지위를 누렸던 작가들보다 덜 위대하다고 평가받을 만한 작업을 수행했던 적은 없었다.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의, 19세기 산업 자본주의 시대 서유럽의, 조선 후기의 여항기나 이후 개화기의, 20세기 초 중국의, 일본의 란가쿠蘭學 시대와 메이지 시대의, 양차대전 이후 서구의 번역가들이 모두 그러했고 그러해야 했다고 말해야 한다. 페르시아어, 그리스어, 힌두어, 라틴어로 된 고전서적들이 가득했지만 아랍어밖에 모르는 칼리프를 위해 알 만수르가 도서관의 책이란 책을 모조리 아랍어로 번역하라는 지식을 내렸던 800년경 바그다드의 번역가들이 이미 그러했을 것이다.
(나는) 왜 번역을 하는가? 나에게 ‘번역하다traduire’는 ‘쓰다écrire’나 ‘고안하다inventer’와 본질적으로 같은 말이다. 나는 심지어, 문학이 그토록 선호하고 옹호해온 ‘창조하다créer’와 ‘번역하다’가 서로 같은 맥락에 위치한 인간의 정신활동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왜 번역하는 것이며, 과연 왜 번역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김현의 표현에 따를 때 나는 ‘외국 문학도’이며 그렇기 때문에 번역을 하며, 번역을 하려고 한다. 대학 때 읽었던 「한 외국 문학도의 고백」을 지금도 다시 생각한다. 내가 태어난 해에 발표된 이 글에서 김현은 말라르메의 시를 대면한 자신의 기록을 짤막하게 남긴다. 말라르메 시의 난해성을 분석하거나 프랑스 문단에서 차지하고 있는 이 시인의 비중을 이야기하는 지면이 아니었다. 김현은 1967년 대한민국에서 외국 문학 전공자의 어떤 절박함과 과잉에 대해 말하고자 했을 뿐이다. 그는 외국 문학 연구자에게 필요한 물음, 외국 문학 연구자가 가질 수밖에 없는 물음이 한국문학의 정체성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에서의 외국 문학이 무엇인가였다고, 말라르메 시의 탁월함에 대해, 프랑스어로 그의 시를, 시의 탁월함을 읽어내야만 하는 고충을 언급하면서, 우리에게 넌지시 건넨다. 그는 말라르메의 시는 “소름이 끼칠 지경”인 말라르메의 “불어에 대한 천착” 때문이 아니라, “한국어의 가치를 알아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는 점에서 무서운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제 몇 년이 지나면 이 글이 발표된 지 어언 50년이 되어간다. 그러나 이 글은 여전히 치명적이다. 여전히 유용하며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외국문학은 한국어의 가치를 알아가야 하는 과제와 대면할 때만 우리에게 외국 문학이 될 수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나는 떨쳐버릴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게 아니라면, 외국 문학은 선망의 대상이거나 인용에 필요한 조잡한 예문의 모음, 누군가의 현학을 보증하는 맹목적인 경구들일 뿐이다. 상황이 이렇다고 한다면, 외국 문학 연구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어의 가치를 알아가게 해주는 일, 즉 외국 문학을 우리말로 대면해나가는 번역이 아닐까?
바로 이럴 때, 외국 문학의 번역은 우리의 문장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할 것이며, 타자의 사유를 이곳으로 끌고 와 예기치 않은 혼란을 경험하게 할 모험의 계기이기도 할 것이며, 타자의 문학과 우리의 그것이 포개질 때 빚어지는 사유의 충격이 발생하는 상호 텍스트의 현장일 수 있을 것이다. 외국문학도인 나는 왜 번역에 관해 글을 쓰고, 번역을 창작의 관점에서, 그러니까 특수성을 결정하는 창조적 행위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하는가? 성취할 수 없는 것을 성취하려 시도한다는 조건하에서만, 시가 시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는 것처럼, 성취할 수 없는 것, 성취하기 어렵다고 여겨진 것을 내 모국어로 실현해보거나 바라보게 할 때, 사유의 여백과 문장의 잉여가 창출될 것이라는 생각에, 번역이 매우 독창적인 인식론적 행위이며 세상을 바라보는 고유한 시선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번역을 하며 번역을 하고자 한다. 비평과 번역은, 투명하게 서로 병행을 유지하거나, 서로 무관하게 등을 돌린 채 진행되는 법이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연관된 일이다. 창작이 벌써 비평이며, 번역이 창작이고, 비평이 벌써 번역이며, 번역이 비평이다. 그럴 거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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