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총성, 어떤 수수께끼
1968년 2월 12일
예감은 적중했다. 누군가 단발마적인 비명을 질렀다.
최 중위는 부상병을 후송 조치한 뒤 마을로 들어갔다.
노인과 부녀자, 아이들뿐이었다. 마을 끝에서 다시 총성을 들었다.
탕!
운명의 총소리가 평온하던 마을을 깨운 것은 오전 11시께였다. 짧은 여운이 채 식기도 전에 또 한 발이 울렸다. 탕!
줄을 지어 근처를 지나던 무장 군인들은 순식간에 땅바닥에 엎드렸다. 벼를 보러 논에 나갔던 늙은 농부는 불안한 시선으로 꾹 눌러썼던 삿갓을 추켜올렸다. 초가집 마당 우물가에서 갓난아기를 업고 달래던 엄마의 낯엔 하얀 근심이 서렸다. 동네 어귀에서 동무들과 장난을 치던 아이들의 눈은 호기심으로 동그랗게 커졌다. 대문 앞을 지키던 개들은 컹컹 짖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한가롭게 병아리들을 몰고 다니다 푸드덕 날아올랐다.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구름 한 점 없었다. 평균기온 15~30℃. 찌는 더위는 없고 습하지도 않다. 베트남 최상의 계절. 사위는 조용했고, 동네 주민들은 설과 정월 대보름 사이의 농한기에 있었다.
오전의 느닷없는 총소리는 특별하지 않았다. 밤마다 먼 하늘에선 조명탄이 번쩍였다. 낮이나 밤이나 총과 대포의 폭발음이 귀청을 간질이는 게 이 마을의 일상이었다. 다만 10여일 전부터 좀 더 빈번했다. 베트콩이 먼저 싸움을 걸어 전면전이 벌어졌다는 소문이 들렸다.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곳은 5년째 전쟁중인 나라였다. 그냥 지나가는 총성이었다면, 주민들은 여느 날과 똑같은 하루를 보냈을지 모른다.
빡!
땅바닥에 엎드린 무장 군인들 속에 26살 최영언 중위가 있었다. 3개월 전 수송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 이국 땅에 온 대한민국의 해병 장교. 해병제2여단(청룡부대) 제1대대 1중대 1소대장. 중대 작전이 한창이었다. 마을 남쪽 개활지를 통해 서쪽 좌표로 이동하며 수색 정찰을 벌이는 임무. 그가 지휘하는 1소대는 선두에 있었다. 맨 앞에선 1분대·2분대·화기분대가 걸었고, 다음에는 소대장인 최 중위가 통신병·전령과 함께 움직였다. 끝에는 3분대가 있었다. 그 뒤로는 2소대와 중대장이 속한 중대본부와 3소대가 따라왔다. 일렬종대로 대원들 간 2~3m의 간격. 풀이 사람 키만큼 자란 어느 묘지를 지날 때였다. 빡!
그의 귀는 그날의 총소리를 그렇게 기억한다. ‘탕’이라는 의성어로는 상황마다 다른 총성을 세분화할 수 없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며 다가오는 소리는 짧고 굵게 끊어진다. 전투 현장에서 극도로 예민해진 귓바퀴다. 아마도 소련제 AK47 소총. 숲 속에 숨은 게릴라의 저격이 틀림없다. 예감은 적중했다. 누군가 단발마적인 비명을 질렀다.
고래고래 고함을 터뜨리며 아픔을 호소하는 1소대 부하 병사. 치명적 상처를 입은 자는 말이 없거나 모기만한 목소리를 낸다. 비명과 고함의 크기는 상처의 심각성과 반비례한다는 걸, 최영언 중위는 그간의 경험으로 익혔다. 부상병을 후송 조치했다. 통신병을 통해 중대장에게 저격과 부상자 발생을 알렸다. 그리고 즉각 응사. 총알이 날아온 지점은 서쪽 방향으로 추정됐다. M16 소총이 천천히 불을 뿜었다.
쾅!
11살 소년 응우옌탄꺼Nguyễn Thanh Cơ는 그날 오전 집 마당에서 쌍둥이 여동생들과 놀다 폭발음을 들었다. 지뢰 소리 같았다. 소년의 집은 남과 북을 잇는 1번 국도에 서 있는 미군 전차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를 찾았다. 39살의 가장 응우옌쑤(39)는 자식들을 안심시켰다.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니야.”
총소리가 연이어 들린 것은 그 다음이었다. 불길했다. 응우옌쑤는 가족들에게 “나갈 생각 말고 집에 가만있으라”고 일렀다. 응우옌탄꺼는 무서웠다. 5살짜리 쌍둥이 여동생 응우옌티리엔Nguyễn Thị Liên, 응우옌티응아Nguyễn Thị Nga는 엄마 보티찌Võ thị Trí(41)의 품에 안겨 떨었다. 아버지 응우옌쑤의 마음은 복잡했다. 마을은 낮과 밤의 권력이 달랐다. 해가 뜨면 미군과 남베트남군과 따이한(한국군)의 세상. 해가 지면 베트콩 천하. 지금은 낮이다. 창문으로 마을 북쪽을 살폈다. 군인들 무리가 보였다. 따이한이다. 조마조마한 정적이 찾아왔다. 가족들은 집 안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30분, 아니 1시간이 흘러도 총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탕!
실내 가득 총성이 울렸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경호실 지하사격장. 대통령 박정희(51)는 권총을 쥐고 표적을 노려보며 천천히 방아쇠를 당겼다.
영하 10℃의 매서운 한겨울. 군용 점퍼 차림의 박정희는 사격을 계속했다. 한 손으로 권총을 쏜 뒤엔 두 손으로 소총을 들었다. 총성이 울릴수록 적중률은 좋아졌다. 박정희는 만족스런 웃음을 날렸다. 아부인지 덕담인지 측근들이 말했다. “사격 솜씨가 군 재임 시와 다름이 없으십니다.”* 그날 영부인 육영수(43) 여사도 잠깐 총을 들었다.
한국 시간으로 1968년 2월 11일 일요일 오후 3시. 최영언 중위가 수풀 바닥에 엎드려 있던 초긴장의 순간으로부터, 소년 응우옌탄꺼가 방 안에 숨죽여 있던 침묵의 시간으로부터 불과 하루 전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뭔가 작정한 듯 총을 쏘았다. 마음속 표적지엔 어떤 얼굴을 그려넣었을까. 21일 전인 1월 21일, 무장 특수부대를 청와대 코앞까지 내려 보내 자신의 생명을 위협한 북한 김일성(56)이었을까? 12일 전인 1월 30일부터 사이공을 비롯한 남베트남 전역에서 미군과 한국군에 기습적 대공세를 펼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게릴라, 베트콩들이었을까? 대북 응징 보복을 간청하는데도 명쾌한 답을 하지 않는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60)이었을까?
박정희는 이날 아침 김포공항에 도착한 미국 존슨 대통령의 사이러스 밴스(51) 특사와 예정된 만남까지 미뤘다. 대신 사격장으로 향했다. 사격을 끝내고 총을 내려놓을 땐 옆에 있던 박종규(38) 경호실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만하면 나도 급할 때는 싸울 수 있겠지?” 다음 날 〈동아일보〉 관련 기사의 마지막 문장은 묘하다. “…이날 사격은 글쎄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타타타!
베트남의 최영언 중위는 다시 콩 볶는 듯한 총소리를 들었다. 첫 총성이 울린 뒤 1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그동안 소대원들과 함께 마을로 진입해 민가를 뒤졌다. 저격범은 색출하지 못했다. 어디론가 꽁꽁 숨었다. 마을엔 노인과 부녀자와 아이들만 남아 있었다. 젊은 남자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민간인들을 2·3소대가 있는 뒤쪽으로 보냈다. 최 중위는 민가 수색을 마칠 즈음 작은 물웅덩이 앞에 다다랐다. 똬리를 튼 구렁이가 한 마리 죽어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그때 다시 울린 총소리. 마을 쪽이었다. 단발이 아니었다. M16 소총을 자동 모드에 맞춰놓고 갈기는 듯했다.
남베트남 민병대원 응우옌싸(30)는 1번 국도 망루에서 자동소총 소리를 들었다. 현장도 목격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볼 수 있는 거리였다. 더 자세히 보고 싶었던 그는 쌍안경을 들었다.
부근에서 작전 중이던 미 해병대 지휘관 실비아sylvia 중위도 같은 소리를 들었다. 마을은 불타고 있었다. 상황 파악에 들어갔다. 한국군 해병 제2여단에 무전을 쳤다. 유엔 장교를 찾았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쾅!
집 안 동굴에 숨어 있던 8살 소녀 응우옌티탄은 공포에 질렸다. 작은 초가집 안에서 발사된 총탄은 폭격처럼 고막을 찢는 듯했다. 얼굴이 검고 덩치가 산만한 군인이 어서 나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소름이 끼쳤다. 서서히 지하 동굴에서 위로 올라와 부엌을 지나자마자 다시 쾅! 오른쪽 옆구리에서 피가 쏟아져 내렸다.
탕!
소년 쩐지옙Trần Diệp(15)도 외양간 앞에서 무너졌다. 나오지 말아야 했다. 집 동굴에 숨어 둘째 동생 쩐트Trần Thủ(5)를 안심시켜야 했다. 뭔가 타는 냄새가 났다. 외양간에 매놓은 물소가 걱정이었다. 쩐지옙은 잠깐 밖으로 나온 사이 총을 맞았다. 오른쪽 다리가 휙 꺾였다. 군인들이 저 멀리서 달려왔다. 그는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 쩔뚝거리며 다시 집으로 숨었다.
탕!
응우옌응예Nguyễn Nghệ(68)와 그의 아내 응우옌긍Nguyễn Gừng(66)은 논에서 맥없이 쓰러졌다. 두 사람은 논물 위에 둥둥 떠다녔다. 다음 날도, 다다음 날도 수습해주는 이가 없었다. 동네 주민들은 딴 데 정신이 팔려 그들이 논에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일주일 뒤 두 주검은 물에 퉁퉁 불은 채로 발견되었다.
베트남의 작은 마을이 불타오르던 그날 아침, 미국에서 발행된 〈워싱턴포스트〉는 박정희 대통령과의 단독 인터뷰를 실었다. 박정희는 말했다. “미국이 북한의 침략 행위를 방임함으로써 북괴의 도발이 계속 조장되어 왔다. 미국은 이제라도 보복 조치를 취하라.” 한국 정부는 이날 전국의 철도경비원 550명에게 무기를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꽝남성 디엔반현 탄퐁사 퐁니·퐁넛촌에서 벌어진 집단학살 사건의 수수께끼는 온전히 풀리지 않았다. 수수께끼의 중심엔 한국군 해병대가 있다. 총 몇 방으로 그들을 부른 베트콩 전사는 유유히 자취를 감추었다. 한국군 일부 대원들은 바로 마을에 진입했고 어떤 사건이 벌어졌다. 마을에서 한국군이 빠져나간 뒤엔 미군과 남베트남군 민병대가 들어갔다.
같은 날, 박정희 대통령은 전날의 좁은 사격장이 아닌 한반도 북녘을 향해 총을 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다. 미국 대통령 존슨은 베트남 전선도 감당이 안 돼 피곤하고 난처한 상태였다. 북위 38도선으로 갈라진 남북한과 북위 17도선으로 갈라진 남북베트남, 그리고 미국이 얽히고설킨 삼각관계.
탕!
그날 오전 퐁니·퐁넛촌에 총성이 울렸다. 운명이 소용돌이쳤다.
*〈조선일보〉 1968년 2월 13일자 聞外聞.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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