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책 만드는 사람들
런던은 19세기 영국 지성계의 핫플레이스였다
도서전은 마지막 순간에 취소된 듯했다. 도서전에 내놓을 예정이었던 책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상자에 담겨 한쪽에 잔뜩 쌓여 있었다. 나처럼 도서전을 찾았다가 이곳으로 발길을 돌린 이들이 이미 있었고, 또 계속 들어왔다. 아쉬움을 표하는 사람들의 말을 배경음 삼아 책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웬 장난질인가. 1930년대 출판된 길이 5센티미터짜리 초미니 셰익스피어 희곡집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들고 다니기도 버거울 초대형 16세기 책도 있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다 19세기 영국 지성계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책을 만든 두 쌍의 저자와 출판사를 발견했다. 한 쌍은 19세기 중반 아이돌급 인기를 구가했던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1870와 채프먼&홀Chapman&Hall, 1834이다. 1834년에 설립된 채프먼&홀은 ‘디킨스’를 말할 때 자동으로 함께 호명되는 출판사다. 신생 출판사였지만 무명의 디킨스와 작업, 일약 스타 작가와 주요 출판사가 되었다. 여러 번 거절당한 J. K. 롤링J. K. Rowling의 《해리 포터Harry Potter》를 출판하여 작은 신생 출판사에서 세계적 출판사로 발돋움한 블룸즈버리Bloomsbury, 1986-의 19세기 판이다.
다른 한 쌍은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과 “다윈의 출판인”으로 불리는 존 머레이 하우스John Murray House 출판사다. 1768년에 설립된 이 출판사는 19세기 전반에 조지 바이런Lord Byron, 1788-1824의 시집과 제인 오스틴Jane Austen, 1775-1817의 후기 소설을 출판하여 이미 영국 출판계에서는 알아주는 곳이었다. 반면, 다윈은 ‘아직 뜨지 않은’ 과학자였다. 서구 기독교 세계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무명의 과학자가 쓴 문제작을 내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출판사 사장은 기꺼이 출판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때 형성된 신뢰로 다윈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모든 원고를 머레이 출판사로 보냈다. 서점에는 이 둘의 합작품 중 가장 기념비적인 저서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1859과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1871이 유리문이 있는 책장에 꽂혀 있었다.
디킨스와 다윈의 책 서지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런던’이다. 존 머레이와 채프먼&홀이 책을 만들어 상품화했던 곳, 출판 산업의 심장. 18-19세기 영어권 출판의 선두주자는 1위 런던, 2위 더블린, 3위 에든버러, 4위 필라델피아이고 보스턴, 글래스고, 뉴욕, 옥스퍼드, 뉴캐슬, 케임브리지가 그 뒤를 잇는다. 1750년에서 1790년까지 출판한 총 양을 보면, 런던에서만 115,481권에 달한다. 2위인 더블린의 14,073권보다 약 8배나 앞선다. 그리고 2위에서 10위 도시의 출판물을 모두 합한 것보다도 많은 양이다. 책이 지식 자본임을 고려할 때, 이 통계는 수많은 무인과 지식인의 통찰력과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런던으로 모여들었던 당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발행인의 손을 통해 활자로 인쇄되고 책의 형태로 사회 곳곳에 배달되어 담론을 형성하고, 차곡차곡 문화적 힘을 쌓아 올렸던 곳도 런던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책을 상품으로 본다면 인쇄 자본이 런던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누가 뭐라 해도 19세기 런던은 문화 및 지식 산업에 있어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닌 곳이었다.
런던은 1470년대 윌리엄 캑스턴William Caxton, 1422-1491이 인쇄기를 도입하면서 출판 산업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당시 유럽은 1450년경 독일 인쇄업자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가 금속 활자를 막 발명한 참이었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신기술로 구텐베르크 성경을 인쇄했고 이후에 손으로 직접 쓰는 필사본과 목판 인쇄는 빠른 속도로 금속 활자로 대체되었다. 네덜란드, 벨기에, 쾰른 등지에서 상업에 종사하며 유럽의 변화를 목격했던 캑스턴은 20여 년 지난 시점에 런던 웨스트민스터 지역에 최초의 인쇄소를 세웠다. 인쇄업자로 변신한 캑스턴은 1476년 영국 자국 시장을 목표로 초서Geoffrey Chaucer, 1343?-1400?의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를 인쇄해 판매했다. 이후 출판산업은 현재 세인트 폴St. Paul 성당 부근의 처치야드Churchyard와 파터노스터 로우Paternoster Row에 밀집해 형성되고 점차 런던 서쪽, 현재 중고책 서점 거리가 있는 채링크로스Charring Cross까지 확장되었다.
당시 런던의 ‘책 만들기’는 네덜란드,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유럽 대륙 국가들보다 한참 뒤처져 있었다. 출판 양으로 보면 16세기 말 영국이 생산하는 인쇄물의 양은 유럽 전체 인쇄물의 3퍼센트에 불과했다. 언어적으로 보았을 때도 영어책은 존재감이 미미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유명한 책 상인이었던 디 엘제비어The Elzevier가 발간한 1634년 판 카탈로그를 보면, 500권 이상이 프랑스어, 300권 정도가 이탈리아어다. 영어로 된 책은 7권 정도였다. 18,000여 권을 생산한 1674년 카탈로그에는 영어로 쓰인 책이 단 19권뿐이었다.
초기 영국 출판 산업이 지지부진했던 이유는 소비자층의 특성 때문이었다. 18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영국에서 책을 구매하고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층은 귀족층과 지식인층에 국한되었고 이들이 주로 읽었던 책은 신학과 고전이었다. 이들은 라틴어와 프랑스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영어로 번역된 책보다는 원서 그대로 읽었다. 게다가 수입산 책을 선호했다. 영국 내에서 생산되는 책은 종이 질, 인쇄 및 제본 기술, 가격까지 모든 면에서 경쟁력이 없었다. 처음에는 프랑스나 벨기에산 책이 강세였으나 점차 네덜란드산을 선호하는 추세로 변했고, 네덜란드는 18세기까지 영국 출판 시장을 주도했다.
자국 시장에서도 주도권을 갖지 못했던 런던의 출판 및 인쇄업계가 열세를 딛고 눈에 띄게 성장한 시기는 17세기 중반 이후부터다. 영국 내전English Civil War, 1642-1651을 시작으로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 1688-1689을 겪은 때로 왕정주의자와 의회주의자 간의 정치적 갈등과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종교적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때였다. 극심한 사회적 갈등이 최종적으로 입헌 군주제로 잠재워지기까지 많은 사회적 변화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인쇄물이 증가하는 현상이 단연 두드러졌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