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친구는 말했다.
그땐 모든 것이 가능하리라 믿었지. 동기부여가 필요했던 것 같아. 일단 저질러놓고 그걸 계기 삼아서 더 힘을 내려고 했던 걸까. 아무튼 난 정말 열심히 했어. 아무도 믿어주지 않겠지만 최선을 다했거든. 이제는 무엇을 더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해야겠지. 같은 방식으로 다시 실패하더라도 그 방법뿐이겠지. 중요한 건 결과니까.
그날 그는 ‘믿기지 않겠지만’ ‘믿을 수 없겠지만’ ‘믿기 싫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지만’이란 말을 거듭했다. 그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너는 믿음이란 무엇일까 생각했다. 무언가를 온전하고도 완전하게 믿는 게 과연 가능할까. 얼마나, 어디까지 믿어야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너는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다’라는 경구를 떠올렸다. 믿음은 둘째 또는 셋째구나. 어쨌든 첫째는 될 수가 없구나. 믿음은 사랑보다 슬프겠구나…… 생각하며 믿음, 믿음, 믿음 중얼거리다 보니 믿음과 미움은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도 같았다. 오래전에 좋아했던 노래가 문득 떠올라 잔잔하게 흥얼거리던 너는 ‘맙소사, 다 기억나’ 하고 중얼거렸다. 20년도 전에 발표된 노래의 가사를 전부 기억한다는 사실이 놀라워 너는 우뚝 멈춰 섰다. 외우려고 노력해본 적도 없는 가사를 어째서 기억하는 것일까. 너는 다시 천천히 걸으며 생각했다. 기억이란 참으로 기이하다, 인간의 뇌는 블랙홀 같아……. 너는 네가 기억하는지도 모르면서 기억하는 것들을 모조리 꺼내보고 싶었다. 그것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이어 붙이면 네 삶이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그럼 너를 타인처럼 사랑할 여지가 생기지 않을까. 노래를 재차 흥얼거리던 너는 그 순간 마음을 두드리는 가사가 있어 핸드폰을 꺼내 문장을 적고 네 번호로 메시지를 보냈다.
안 된대도 아무 상관없어요. 내 마음만 알아줘요.*
*이소라 「믿음」. 1998년 발매된 『슬픔과 분노에 관한』 앨범의 1번 트랙.
그때 너는 그 문장이 믿음의 정의에 가장 가깝다고 여겼다.
*
12월의 셋째 날 오후, 너는 제주공항에 내려 102번 버스를 탄다.
너는 핸드폰을 확인하거나 사람들을 둘러보지 않고,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지도 않고, 버스 좌석에 앉아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본다. 한 시간 정도 지나 버스 안내 방송에서 네가 내려야 할 정류장 이름이 흘러나온다. 너는 하차벨을 누르고 버스가 정차하길 기다린다.
제주는 세 번째 방문이다.
첫 번째는 고등학교 수학여행. 그때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두 번째는 20대 중반. 계약직 일을 그만두고 당시 애인과 며칠 동안 여행을 왔었다. 그 기억 또한 흐릿하다. 바다, 오름, 거센 바람, 한적한 도로 등이 뭉뚱그려 떠오를 뿐. 가장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장면은 뒷모습이다. 오름을 앞서 내려가던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네 마음은 복잡했다. 그를 당장 돌려세워 언성을 높이며 싸워서라도 엉킨 감정을 풀고 싶은 마음과 그가 돌아보지 않는 사이 감쪽같이 숨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동시에 들었다. 그는 돌아보지 않고 계속 걸었고 마침내 너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가 너를 찾지 않았으므로 너는 숨을 필요도 없었다. 그는 주차장에 세워둔 렌터카에 탄 채로 너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 기다림이었을까? 수행에 가깝다고 너는 느꼈다. 애인의 역할 또는 책임을 다하려는 수행. 그는 운전석에 앉아 차창 밖의 너를 바라봤다. 너는 그의 노력을 생각했다. 너와 언쟁하지 않으려는 노력. 먼저 화내지 않고 상황을 견디는 노력. 그것은 다음처럼 바꿔 말할 수도 있었다. 너와의 언쟁조차 포기한 사람.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다만 회피하려는 저 사람.
운전석에 앉아 너를 기다리는 그의 생각과 그가 내뱉을 말을 너는 예상했었다. 네가 짐작한 말은 ‘나는 할 만큼 했다’였다. 그러나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냥 좀 넘어갈 수는 없는 거야?
그 말을 듣고 너는 생각했다. 당장 차에서 내리고 싶다고, 제주도를 떠나고 싶다고, 이 사람을 더는 견딜 수가 없다고. 너는 대답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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