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클레르의 오후
성당이나 서점을 지나 걸었다
오래된 다리 위에서 클레르가 뒤를 돌아보았다
빨리 와.
응. 빨리 갈게.
클레르의 운동화 바닥은 안쪽부터 닳는구나
걷는 사람들의 오른뺨이 석양을 받고 있다
트램을 타고 외곽으로 간 우리는
어느 황량한 정거장에서 잠시 머물렀다
낮게 이어진 콘크리트 외벽들이 푸르게 잠기어간다
돌아가는 트램을 기다리다 클레르가 말한다
눈을 깜빡이더니
크게 웃는 클레르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였기 때문에 클레르의 얼굴엔
빗금처럼 어둠이 쏟아졌다
잠시 후 우린 잊고 있던 도시락 가방을
클레르의 배낭에서 꺼낼 수 있었다
운하에 모이기
― 빗금 친 겨울, 이태원, 남산, 손은 얼어버렸고
와인 바에 당도했을 때
한꺼번에 녹아내렸다
다정하게 네 손을 찾아보기로 했어
내 검은 장갑 한 짝을 끼워놓으니 알맞았지
춥고 그립고 소용없었는데
곧 녹아서 없어질 것 같은 산을 올려다보며
시원하다고 말한 건 너야
그렇긴 했지 아이스크림 같았어
네가 준 두 권의 책
마주 잡은 두 개의 맨손
맨손으로 지어서 맨션 아파트가 되었다고
어른들이 농담하던 아파트 얘길 했어
너는 깔깔깔
나도 깔깔깔
그런데 그것 참 이상했지
아이스크림 장수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모자를 벗고 인사했지 않니?
단지 두 개를 사 먹었을 뿐인데
다르의 새벽
새벽이 조금 지나도 남은 새벽이 있다. 다르의 방엔 혼돈에 빠진 채 나뒹구는 술병들이 있고 굴곡진 무늬를 가진 천들과 소파, 다르의 크고 검은 친구들. 야구 중계방송. 환호와 맥주. 다르는 몰래 그곳을 빠져나왔다. 가로등이 점멸 중인 거리를 걸었다. 아직 지하에서 환한 불빛이 쏟아져 나오는 상점을 지나고 자동차 수리점을 지나고 바닥에 스민 검은 기름 얼룩들을 살금살금 밟아야 했다. 좁고 긴 날들이라고
다르는 생각한다. 다르는 그 애의 이름을 명으로 기억한다. 아마 정확한 기억일 것이다. 이상하게도 명의 얼굴을 떠올리면 사진에서 본 자신의 어린 얼굴이 그 애의 자리에 들어가 있다. 어느 순간엔 섬뜩해지기도 하는 기억의 형체에는 어떤 실마리도 없다. 그냥 그 자리에 그렇게
다르는 있다. 내내 생각을 한다고 여겨지면서. 시계탑 아래에서 나쁜 일을 목격 중인 듯이. 근처엔 유치원이 있고 놀이터가 있다. 다르는 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왔음을 깨닫는다. 개를 데리고 나오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다. 둘이서 타기에 알맞게 짜인 두 개의 그네, 다르는 하나인데 두 개의 그네에 앉아버린 기분이 든다. 아이들이 바람을 가르며 깔깔 웃는 기분이 든다. 모두가 떠난 후에야 다르는 텅 빈 유치원 내부를 가로질러 바깥으로 나온다. 단단하게 짜인 새벽의 통로들이.
다르를 넘나드는 것 같다. 여러 갈래의 좁은 길들이 나타났을 때 다르는 낮은 주택들이 이어진 마을을 지날 수 있었다. 만화책 속에 들어온 것처럼 산뜻하고 길쭉해진 다르. 명의 얼굴이 시룩한 표정으로 기억되는 것은 사진 속 다르의 어린 얼굴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르는 이 동네가 마음에 든다. 어딘가 도서관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다르는 한여름의 고요한 도서관을 상상한다. 도서관을 찾을 때까지 새벽 거리를 걸어보자고 결심할 무렵 다르를 찾으러 나온 친구들이 멀리서 이쪽을 보며 서 있다. 이제 곧 도서관을 발견해낸 후 강가로 나가서 와인을 마시고 싶어질 다르가 길 건너편을 향해 크게 외친다. 나아! 아직 더 갈 거야아! 온 힘을 들여 외쳤는데
공들여 바라보니 모두 다른 애들 같기도 나무 같기도 공터 같기도
친구들인 것을 다시 알아차릴 즈음엔 모두 돌아가고 없다. 이렇게 멀리에 서서 보는 일이 혼란스럽다. 중계방송은 아직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길들을 되짚어야만 강쪽으로 갈 수 있겠지. 너무 많이 써버린 새벽을 따라 다르는 비탈길을 오른다.
와아 하고 터져 나오는 함성을 들으며 그는 자기 앞을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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