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삶은 부조리하다.”
아니, 그렇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반박은 설득력이 없다. 우리의 반박에는 지적인 확신이 없다. “삶은 부조리하다”라는 불평은 인간의 이성 전체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우리의 반응은 그저 본능적인 반응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삶이 아니라, 자신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 삶이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는 어딘가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에 불과하다. 우리 자신이 그런 불평을 할 때조차도, 종종 그렇듯이, 그 불평은 우리에게 간신히 들여다보이는 사기와 자기기만의 불쾌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현대의 감수성을 표현하는 경구에 가까운 그 불평 자체의 지적인 정직성은 도전받지 않는다. 고집스럽게 지속되는 우리의 일상생활과 그 속에서 계속 이어지는 습관들에 의해 무시되거나 가장자리로 밀려나기는 하지만 말이다.
문제는 우리 자신에 대한 오해다. 이 오해는 우리로 하여금 “삶은 부조리하다,” “인간은 쓸모없는 정념이다,” “궁극적으로, 그 어떤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는 겉보기에는 반박할 수 없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최고의 철학자들이 다양한 정도의 설득력과 절망을 담아 이런 결론을 표명했다. 그러나 이것은 독특하게 현대적인 오해는 아니다. 이것은 정확히 똑같은 부조리 의식을 피하고, 삶 자체의 외부에 있는 어떤 신적이거나 초역사적이거나 유토피아적인 인간 삶의 “의미”를 입증하거나 상정하려는 시도의 중심에 놓여 있다. 이런 시도들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것으로 2천 년 동안 시도되어 왔다.
문제는 우리의 “비이성,” 이따금 터무니없고 항상 헛된 우리의 욕망과 기대들, 때로는 마음을 밝게 하지만 혼란스럽게 하고 파괴적일 때가 더 많은 우리의 기분과 감정들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요컨대, 문제는 우리의 정념들, 근시안적이고 제멋대로 굴어 객관성과 리얼리티에 관한 지식에서 인간 이하의 수준으로 퇴보하는 그런 정념들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항상 “이성”이라 불리는 “신성한 불꽃”이라고 여겨져 왔다. 이성은 인간을 동물과 구분하고, 잘난 체하면서 시시한 것에 탐닉하고 우쭐대며 허식을 부리는 개인의 감정을 초월하게 해준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항상 해답을 찾았던 바로 그 영역에 있다. 즉 우리가 찾고자 하지만 결코 성공한 적이 없는 의미들을 항상 우리의 삶에 제공하는 척하여 온 거만하지만 유약한 이성이란 개념에 문제가 있다. (실제로는 “문제”를 분해해 버리는 것이지만) “해답”은 바로 아직 적절하고 지적으로 훌륭한 옹호를 받지 못한 본능적인 느낌들에 있다. 요컨대, 해답은 이해받는 경우가 너무도 드물고 그 진가를 거의 인정받지 못하는 우리의 정념들 속에 있다.
이 책의 주제는 아주 간단히 진술할 수 있다. 즉 정념은 우리 삶에서 중추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너무도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부정당해 온 그 역할을 정념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또한 소크라테스 이후로 계속해서 서구의 철학과 종교와 과학을 전적으로 지배해 온 “객관성”과 자신을 비하하는 이성의 허세를 제한하는 것이다. 우리의 정념들은 너무도 오랫동안 철학에서는 그저 주석에나 속해 왔고, 심리학에서는 괄호 안에 넣어지기만 해 왔다. 마치 정념들이 주제넘게 나서 방해하고, 기분 좋게 주의를 딴 데로 돌려줄 때도 있지만 “더 고상한” 용어로 이해되어야 하는 삶들을 배반하지는 않더라도 당혹스럽게 전복시키거나 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정념들이 우리의 삶을 구성한다.
우리의 삶에 의미를 제공하는 것은 우리의 정념들이고, 오로지 우리의 정념들뿐이다.
그러나 이 논제를 옹호하기 위해서는 정념 자체의 본성을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봐야 하고, 정념은 이성에 정반대되는 것이라는 주장도 새롭게 들여다봐야 한다. 우리의 정념은 항상 동물적 요소의 난입이고 생리 기능에 기초하여 생겨나는 교란으로 여겨져 왔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정념은 그렇지 않다면 유의미하고 매우 “이성적인” 삶 속으로 산발적이고 비이성적으로 끼어드는 것도 아니다. 정념은 우리를 이쪽 혹은 저쪽으로 미는, 바라건대 “다정한 이성의 빛”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는, 위협적이거나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아니다. 정념 자체는 따라서 우리의 삶은 언급되지 않고 비밀에 부쳐지는 것이 최선일, 불결한 작은 비밀이거나 한 것이 아니다. 이런 접근법은 그 자체가 매우 직접적이고 거침없이 “삶은 부조리하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바로 그런 부정과 무시 시스템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나는 이것을 뭉뚱그려 “정념의 신화”라고 칭한다.
모든 신화처럼 정념의 신화는 자기 잇속만 챙기고, 우리 자신의 자아상을 위해 극적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수동성의 신화다. 우리가 빈번하게 정념들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것들에 굴복하고, 그것들 때문에 제정신을 잃고 어리석게 행동한다는 사실은 자기 잇속을 차리기 위해서 하는 말로 일부만 맞다. 이 신화의 목적은 분명하다. 즉 우리 안에 있는 강력하고 비이상적인 힘들과 싸우는 무력한 순교자의 역할을 우리 자신에게 배정하는 것이다. 아서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염세철학은 우리 내부에 있는 전능하고 비이성적인 의지에 희생되는 것이 윌의 운명이라고 예언한다. 이 철학은 철학자이든 아니든 모두가 2천 년이 넘도록 신봉해 온 주제의 극단적이고 쓰라린 변형에 불과하다. “정념들”이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드는 한,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꼭 필요한 태도들과 행위들은 우리가 스스로 행하고 책임을 지는 범위를 넘어선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느낌과 품행, 자아를 위한 정교하고 편리한 변명 시스템을 마련한다. “어쩔 수 없었어요. 화가 났거든요.” “그녀 책임이 아니에요. 그녀는 사랑에 빠져 있거든요.” “그를 비난하지 마. 그는 당황했어.” 이런 말들은 인간 본성에 관한 단지 불완전한 이론보다 훨씬 더 깊은 상처를 주는 질병의 증상들이다. 이것들은 무책임한 자기 기만의 산물이고, 실은 가장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비난과 책임을 우리 너머에 전가하려는 시도이다. 우리의 정념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감정들과 기분들, 욕망들이 우리를, 우리의 자아들을, 우리가 사는 세계를 규정한다.
정념에 대한 우리의 언어와 사유는 이런 수동성의 신화투성이다. 호랑이 덫이나 늪에 빠질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 우리는 강력한 약을 접종받기나 한 것처럼 무서움 때문에 “마비된다.” 파리나 모기에게 괴롭힘당하듯이 우리는 자책에 “괴롭힘 당한다.” 우리는 자동차에 부딪히거나 한 것처럼 질투에 “부딪히고” 나무가 도끼에 베어져 쓰러지듯이 수치심에 “쓰러진다.” 타악기 부분에서 트롬본 때문에 산란해지듯이 슬픔 때문에 마음이 “산란해진다.” 유령이 출몰하듯이 죄책감이 “출몰한다.” 막대기 몰이를 당하듯이 화에 “휘둘린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시적인 은유들은 수동성의 이미지들인데, 이것들은 지나치게 사용되어서 이제는 진부하다. 우리는 정념 때문에 “비탄에 잠기고,” “으스러지고,” “강타당하고,” “압도되고,” “넋을 잃고,” “파멸한다.” 정념들은 심장에서 나와서 혈관을 타고 흐르는 영적인 동물의 체액이라고 말해진다. 우리의 의지가 미치는 범위를 벗어나 있는 심장은 “머리”와 대조된다. 후자는 냉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데, 전자는 희생자의 운명을 겪는다. 우리의 심장은 둘로 쪼개져 있다. 멍들고 피 흘리는 육체이고, 뜨거웠다가 차가워지기도 하고, 쿵쾅거리고, 고동치고, 깨지고, 터지고, 분출하는 사랑이고, “기뻐하는 육체”이고, 돌처럼 딱딱하기도 하고 아픔으로 부드럽기도 하고, 찔리고 부딪치고, 찢어지고 손상되기 쉽다. 시인은 “나에게 말하라, 오 나의 심장이여!”라고 말할 수 있지만, 철학자는 그의 머리에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우리의 생각과 달리 감정은 “본능적”인 것으로 속이 울렁거리게 하고 흥분하여 홍조를 띠게 할 뿐만 아니라 그런 것들에 가깝다. 원한은 담즙 때문에 생기고, 격노는 비장에서 생겨난다. 우리는 슬픔이나 무서움으로 메스꺼워지고 우리의 영혼은 격노로 부풀어 오른다. 화는 야생마를 타는 것과 같다고 호라티우스Horace는 말했다. 호라티우스 이후로 (그리고 그 이전에도) 이런 묘사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정념들은 우리가 영혼의 더 원시적이고 동물적인 부분으로부터 받은 유산이다. “신성한” 기원에서 나왔으며 “인간이 신들에게서 받은 선물”인 사유와 이성과 달리, 이 원시적이고 동물적인 부분은 육체에서 생겨난다.
일반적으로 정념들은 원시적이고 “자연 그대로이며,” 혼란을 조장하며 비이성적이고, 판단력과 목표나 이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거리낌이 없고, 때로는 지독하게 취향이 부족하다. 호라티우스는 또한 “화는 짧은 광기다”라고도 썼다. 반면에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살루스티우스Sallust는 “필멸의 인간은 그 누구도 자신의 정념과 이익을 동시에 만족시키지 못한다”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모두 “사랑은 맹목적이다”라고 배웠다. 1940년대의 한 대중가요는 “만일 내 욕망이 나를 조금 미치게 만든다면 내 잘못인가요?”라고 푸념했다.
현대 우리 시대의 태도는 프로이트의 후기 정신분석학 이론에 나오는 유명하고 조금은 전문적인 용어로 잘 요약된다. 즉 이성의 자리는 “에고” 혹은 “나,” “자아”인 반면에 정념의 집은 “이드”라고 불리는 이질적인 에너지들이 담겨 있는 솥이다. 이드는 글자 그대로 “그것”을 뜻하는데, 우리 자신의 일부가 아니라 오히려 자아 혹은 에고와 그것들의 사회적 동맹자인 “초자아”에 가해지는 외부의 위협이다. “우리” 대 “그것,” 이성과 문명 대 정념의 기괴한 욕구들과 일탈들 사이의 싸움이 인간 정신의 삶을 규정한다. 이런 야생의 짐승들을 통제하는 것이 인간 사회와 종교, 이성의 목적이다. 우리는 성숙해지면 아무리 어렵더라도 그러한 통제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여겨진다. 그렇지만 우리가 정념들 자체에 대해서도 또한 책임을 져야 할지 모른다고 암시하는 말은 전혀 없다. 우리가 정념들은 애초에 우리 자신이 만든 것임을 깨닫게 된다면 그것들은 “통제”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정념의 신화 대신에 택할 수 있는 대안을 추구해 왔다. 어쩌면 이것은 기존의 것을 대체하는 또 하나의 신화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체계적으로 오해받는 이런 현상들에 대한 통제와 책임에 대한 인식을 우리의 자아에게 되돌려주어 자기 자신을 확증하는 장점을 가진 신화일 것이다. 나는 자기를 부정하는 정념의 신화를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감정들을 우리 자신의 판단들이라고 주장하는 설명으로 대체하고 싶다. 이렇게 설명함으로써 우리는 세계를 우리의 목적에 맞게 구축하고, 우리 자신의 생각대로 우주를 조각하고, 리얼리티의 사실들을 측정하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세계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구성한다.” 이런 감정들과 정념들 일반은 교란과 침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존재의 바로 그 핵심이고, 우리의 삶이 발전하고 성장하거나 굶주리고 침체하는 의미들과 가치들의 체계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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