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식물도
스프링클러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1997년 여름, 저는 LA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난생처음 와본 그 도시의 첫인상은 무척 덥다는 것이었어요. 공항 건물을 벗어나자마자 섭씨 40도는 될 것 같은 더위가 훅 몰려왔습니다. 마중 나온 선배의 차를 타고 LA 북쪽 발렌시아로 가는 고속도로에 올랐습니다. 고속도로 주변은 황량했습니다. 높지 않은 산은 마른 관목들로 덮여 있었어요. 온대의 기후와 자연환경에 익숙한 나는 사람들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사막까지 찾아와서 도시를 만들었는지 의아할 정도였습니다. 인공물 없이는 사람도 식물도 살아갈 수 없는 곳, 이것이 이 사막 도시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습니다. LA 북쪽에 있는 발렌시아라는 곳에 가서 값싼 아파트를 얻고 칼아츠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 CalArts라는 학교에 다녔습니다. 애니메이션으로는 전 미국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학교였고, 라이브 액션Live Action이라는 이름으로 학과를 만들어서 실사 영화 교육에도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학생 개개인을 한 명의 예술가로 인정하고 학생이 가진 것으로부터 창작을 출발하려는 교육 방식을 갖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과제로 만든 단편 영화가 「어떤 식물도 스프링클러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No plant can’t survive without sprinkler」였습니다. 극영화는 아니고 굳이 얘기하자면 개인적 에세이personal essay 형식의 영화였습니다. 칼아츠 교수진 중에는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는 교수들이 많았고 그들의 수업에서 개인적 에세이 형식의 다큐멘터리 영화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다큐멘터리라고 하면 TV에서 방영되는 「인간극장」류의 휴먼 다큐멘터리나 사회적 이슈를 강하게 다루는 사회적 다큐멘터리만 알고 있던 나에게 이런 개인적 다큐멘터리들은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떤 작품들은 ‘중년의 위기’를 다뤘고, 어떤 작품들은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말하기도 했습니다. 영상도 글과 같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하나의 매체였습니다. 일기 혹은 수필을 써서 자신의 개인적 생각을 표현하듯 영상도 자신의 개인적 생각을 표현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매체라는 걸 배웠습니다.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에 많은 사람이 공감하듯, 에세이 영상도 그 생각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이 많으면 작품으로서 보편적 호소력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다큐멘터리든 극영화든 ‘모든 작품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때 두서없이 생각을 적어놓던 제 노트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학교에서 수업 첫 번째 과제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담은 ‘어떤 식물도 스프링클러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라는 제목의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다른 유학생들보다 많이 늦은 나이에 미국에 와서 사막의 어느 좁은 아파트에 자리 잡은 나의 심정이 그랬습니다. 나는 LA 사막에 던져진, 적응력 없는 온대 식물이고 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프링클러가 필요했습니다. 한국에서 다달이 송금되는, 많지 않은 생활비가 바짝 마른 잔디 위로 분사되는 스프링클러의 물이었습니다.
하지만 30대 중반이 지난 나이로 유학길에 오른 나에게는 하루하루 무언가를 배우고 있다는 확신도 중요했습니다. 그런 확신만이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속 시계처럼 사막에 늘어진 나의 시간을 생생하게 살려낼 수 있는 스프링클러의 물이었습니다.
“이야기는 공부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사막의 스프링클러를 생각합니다. 아무도 없는 밤에 저 혼자 분사되는 스프링클러의 물이 식물들을 살려내듯이 여러분이 이야기를 읽고 쓰고, 궁극적으로 이야기의 삶을 사는 동안에 이 수업에서 공부하는 것들이 지속적인 스프링클러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삶이라는 사막에서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에 지칠 때마다, 혹은 이야기를 쓰다가 길을 잃을 때마다 이 수업의 어떤 기억들이 스프링클러의 물처럼 여러분의 생각을 촉촉하게 적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천재란 무엇인가?
미국에 가기 전에 저는 장편 상업 영화 시나리오를 세 편 썼습니다. 영화에 뜻을 두고 3년 넘게 다니던 직장을 만 30세가 되던 해에 그만두고 나왔습니다. 선배가 조감독으로 있던 영화팀에 세컨드 조감독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그 팀은 곧 해체되고 나는 갈 데 없는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신문기자로 정신없이 살다가 갑자기 집에 틀어박히게 되면서 성급하게 회사를 그만둔 데 대한 회의가 조금씩 올 무렵, 김홍준 감독님이란 분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그때까지 일면식도 없던 분인데, 내가 기자 시절에 쓴 책을 잘 읽었다면서 본인이 준비하는 데뷔작의 시나리오를 써보지 않겠냐고 제의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영화와 관련된 일이라면 가릴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부탁은 드렸습니다. 열심히 시나리오는 쓰겠는데, 연출을 배우고 싶으니 연출부도 같이 시켜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감독님은 쾌히 승낙했고 그날부터 그 영화팀의 시나리오 작가 겸 막내 연출부원이 되었습니다. 그 시나리오가 「장미빛 인생」김홍준 감독, 1994이었습니다. 가리봉동의 만화방 풍경에서 시대를 반영하고자 했던 감독님의 생각을 충실히 담아내려고 노력했습니다. 당시 사회는 1980년대 군부독재와 격렬히 싸우던 학생운동의 시기가 지나고, 1990년대라는 일종의 개량 민주주의 사회로 진입하고 있었고, 학생운동의 주역들은 사회인이 되면서 자신들의 격렬했던 젊은 날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정리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던 저는 이 후일담 소설들의 관점을 빌려서 학생들이 떠나간 가리봉동을 그려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당시 국내에서 열리던 4대 영화제, 즉 대종상, 백상예상대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청룡상에서 모두 시나리오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연을 맡은 최명길 씨는 그해 낭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쓴 시나리오로 이렇게 많은 상을 받고 보니 저는 제가 당연히 천재인 줄 생각했습니다. 물론 착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콘크리트 벽에 던져진 와인 잔처럼 산산조각이 났지만요. 아무튼 수상 이력 덕에 저는 곧바로 두 편의 장편 영화 시나리오를 더 썼습니다. 김유진 감독님과 「금홍아 금홍아」1995를 작업했고, 영광스럽게도 임권택 감독님과 「축제」1996라는 영화를 같이 작업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특히 이 작품은 작고하신 이청준 선생님 원작이었는데, 제가 시나리오를 쓸 때 선생님도 원작을 같이 써 가는 특이한 방식으로 작업이 진행됐습니다. 그해 봄의 석 달간 두 분과 함께 작품 취재차 남도를 여행한 것은 제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두 분이 나누시던 말씀들, 드시던 음식들도 다 배움이었고, 사람들을 만나는 방식들이나 풍경을 바라보는 방식들도 소중한 배움이었습니다. 세 편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김홍준 감독님께는 영화에 대한 열정과 서구 영화들에 대한 분석적 지식들을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김유진 감독님께는 드라마를 구성하는 본능적인 감각을 많이 익힐 수 있었고요. 임권택 감독님께는 연출과 시나리오가 관계하는 방식, 넘치지 않게 주제를 이야기 속에서 관철하는 방식 등을 배웠습니다. 매일매일 배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영화는 약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라는 영화 철학부터 “클라이맥스에서 쓸 소재를 미리 앞에서 낭비하지 말아라”라는 이야기의 구성 방식도 배웠습니다. “영화를 한다는 것은 역마살 떠돌이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라는 말씀은 양평 장날 노천 주막집에서 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그때까지 쓴 시나리오들은 엄밀히 말하면 제 것이 아니라 같이 작업한 감독님들의 작품이었습니다. 저는 어쩌면 그분들의 머리에 있는 영화에 대한 계획들을 필경사처럼 글로 옮긴 것뿐이었습니다. 그 결과에 기대서 괜히 천재니 뭐니 하면서 우쭐했던 마음은 감독으로서 데뷔작을 준비하면서 여지없이 깨졌습니다. 데뷔작을 위해 쓴 시나리오들은 거의 모든 영화사에서 거절당했습니다. 매일매일 끊임없이 시나리오를 썼지만 몇 년간 나오는 결과들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일은 집에서 시나리오를 쓰는 것뿐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영원히 나의 영화를 만들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영화사나 투자사에서 좋아할 만한 시나리오를 간절하게 쓰고 싶었습니다. 모든 감독들이 천재는 아니니 없는 재능을 박박 긁어모으면 범재라도 영화 한 편은 만들 수 있는 시나리오를 쓰겠다는 희망을 갖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돌아오는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음악 천재는 절대음감을 갖고 있다는데, 시나리오 천재는 무엇을 갖고 있어야 하나, 매일 생각했습니다. 절대적 구성력, 절대적 장면의 시각화 능력, 절대적 대사 능력, 세상을 관통해서 보는 절대적 통찰력 등등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 것들을 배워보려고도 해봤지만 어디서도 마땅히 배울 곳은 없었습니다. 시나리오는 도대체 어떻게 쓰는 것이냐는 질문을 누가 내게 물어봐도, 내가 누구에게 물어봐도 속 시원한 대답을 하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나의 재능에 대한 회의와 안정된 직장을 박차고 나온 것에 대한 후회로 삶은 점점 피폐해졌습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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